2009년 10월 14일
Roman Republic → Empire ...01

.
.
.

Italian Peninsula를 기반으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훗날 Empire으로서
발돋움한 Urbs Roma의 발전과 역사는 대다수 유럽의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지리적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 요소 중 하나가 Alps-
Mounatain의 존재이다. 인종적으로는 Aryan(인도-유럽어족)의 일파인 Latin 족속에 속하게
되며, Tiber River 유역의 평야지방에 정착한 사람들이기도 했고, "농경과 목축"을 행하던
촌락 민들이 구릉지대(일곱 개의 언덕)를 각각 장악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이들 개별 촌락들이
점차로 성장하여 기원전 8 C-기원전 7 C 동안에 "Gens Claudia(씨족) 중심의 촌락"들이 마치
허물을 벗어 버리듯이 탈-공동체적인 형태로 진화되었고, 도시 국가로서 통합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 후 Palatinus 언덕을 중심으로 Southern-Eastern-Northern의 정착지
들을 흡수하여 규모가 커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시점에 Pomerium(일정한 경계)의
주변 영토와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미 !!
이러한 지역에는 선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로서 그러한 족속들 중 Etruria People
들은 지중해의 고대 해양 족속으로 여겨지는데 이들은 대략 기원전 1200년 이 후 Italian-
Peninsula 각지에 분포 되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기원전 6 C 경에 이르면
서-지중해에서 해상 상업 활동을 전개하며,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Latin Type의 "로마 인"들은
북쪽에 인접해 있던 Etruria People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더불어 당대 Italian Peninsula
(남부)의 Sicilia에는 Greece People들이 식민시(Colony)를 건설하여 거주하고 있었는데...
Roma People 들은 이러한 지역을 Magna Graecia라고 불렀다고 한다. 반면에 Italian Peninsula
북부 지방과 유럽대륙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 지대에는 또 다른 Aryan(인도-유럽어족) Type
Gallia(갈리아) People들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살아가고 있었고, Greece & Roma People 들은
이들을 Celt(켈트) People이라고 불렀다. 전승에 의하면 대략 기원전 509년까지 Urbs Roma는
왕정체제 하에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Rex(왕), Senatus(원로원), Comitia Curiata(민회)를 중심으로
사회 구조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또한 Romulus를 포함하여 왕이 7명이 있었다고 하였지만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실존했던 왕은 따지고 보면...그들 가운데 3명의 왕 뿐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전승 그대로 인정하면 Romulus 이 후 처음 3 명의 Rex(왕)는 Latin People,
"사비눔 출신"이었고, 마지막 3 명(3 - 1 = 2)의 왕은 Etruria People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Etruria 출신들은 초기 로마 정치, 경제, 문화 체제에 주요 특징을 확립시켰고, 이렇게 전승된
특징은 도시의 역사가 지속되면서 존속 되어졌다. Etruria People들은 현재의 Toscana에서
상당한 수준의 자체 문명을 가지고 여러 개의 도시국가 형태로 자리잡고 있으면서 Urbs Roma 사회를


정치적으로 지배하였는데 느슨한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국가를 성립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종국에는 Roma People 들에게
도시를 송두리 채 파괴당하기에 이르렀으며, "공화정" 말기에 이르러서는 변방의
보잘 것 없는 족속으로 전락되었다. Urbs Roma 성립 초기 이 후 2 C 동안
커다란 범주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정도이다. 대내적으로
"귀족과 평민"의 신분 투쟁이 본격화 되었던 점이 그 하나이고, 대외적으로는
Roman의 지배권의 팽창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인데 점차로 귀족들과 평민들 간의
정치적 투쟁은 역사 서술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신분투쟁 과정에서 질서 있고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 갔으며, 양자 간에는 어김없이 양보를 얻어내는 세력이 있었고,
그때마다 법의 제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훗날 "토지 귀족과 평민"들이 대규모
권력투쟁이 전개되면서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 공화정 초기에 있었던 "신분 투쟁"은
그 성격에 있어서 하나의 파벌이 득세하면 정치적 활용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것이다. 특징적인 사실로서 Latin & Roma People 들의 관계는 초기 역사에서 그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하였는데 그들은 기본적으로 통상을 하고 전투를 치루거나 통혼이
가능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 않았나 싶다. 설명하자면 왕정 시기에
Urbs Roma는"알바누스 산"에서 Jupiter Latiaris 신에게 "공동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만들어진 동맹체를 주도하게 된다. 또한 동등한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조약을 Foedus Cassianum(카시아수스)라고 하였으며, 이것은 "청동 서판"에 새겨져
Cicero 시대까지 Urbs Roma의 중심지에 남겨져 있었다. 의미적으로는 동등 자 사이의 조약
이라고도 했고, "평등 조약"의 고전적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Latin League
이라는 명확한 토대 위에서 Roma People 들은 Etruria, Sabini, Aequi & Volsci People
들에 대하여 우월적 관계를 설정하였으며, 그러한 중심에는 Disciplina Etrusca System이 존재
하게 된다. 초기 "로마인"들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족속은 Sabini People 들로서 가장 근접
되어 대립관계에 있었고, "사비니 여인의 강탈 사건" 이 후 Romulus와 공동 통치를 하였던
Titus Tatius(타티우스) 왕은 Sabini Type에서 배출한 3 명의 왕중에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또한
Sabini People 중에서 가장 지명도 있는 이주민은 Attus Clausus(아투스 클라우수스)으로서
훗날 막강한 권력을 행사 하게 되는 Gens Claudius(클라우디우스)의 선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이주되지 않은 Sabini People들과 반목했으며, 수많은 전투를 거친 후 팽창하는
Urbs Roma 세력에 의해 기원전 290년에 이르러서야 마지막 거점이 함락되었고, 그 후 Urbs Roma
시민(기원전 260)으로 편입되었다. 이외에 Central-Italy을 기반으로 하던 호전적 선주민이었던
산악 족속으로 분류되던 Aequi(아이퀴) & Volsci(볼스키) 들이 차례로 복속시키고, 바로 !! 이들이
거주 하였던 지역에 Roma People 들은 식민시를 건설했는데 대표적적인 것으로 Alba Fucens가 있다.


아무튼... Roman은 "에트루리아 인"들의 영향을 받아 경제, 문화,
정치적으로 급속한 성장을 하였으며, 이제는 초기에 조잡한 촌락들이
결합된 Small Polis가 아니라 Tiber River 하구를 따라 상당한 면적을 차지
하였고,Latium 평야지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Polis로 새롭게 탄생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기원전 6 C-기원전 5 C에 마침내 Central-Italy Peninsula
지역의 핵심적인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역사적 혹은 신화적
다수의 인물들이 교차하며 등장하였는데 대표적으로 Aequi, Volsci의 침입을 저지한
인물로서 Coriolanus(코리올라누스)와 Cincinnatus(킨킨나투스) 그리고 Gallia =
Gaul People 들의 침입을 사실상 저지한 인물으로 Camillus(카밀루스)가 있었다.
Urbs Roma 왕정의 정치, 사회적 제도들은 기원전 6 C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Etruria People 출신 그러니까 사실상 3명(3 - 1 = 2)의 Rex(왕)치세 동안 전환기를 맞이
했는데 대략 이러한 시기 Roma People의 씨족과 원로원의 세력이 약화되었고, 12 개
도시의 연맹체를 이루고 있던 Etruria People들의 힘(권력)은 기원전 6 C에 절정에 이르러
점차로 North→Po River, South→Palatium 지역, Campanis(캄파니아) 지역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Etruria People 들은 Aegean Sea→ Greece-Phoenicia-Eyght
People 들과 활발하게 교역을 벌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더불어 Etruria의 도시
들을 모방하여 Roman에서는 많은 공공건물과 산업적 용도의 건물, 신전이 세워졌고, 이러한
시기부터는 외국의 상인과 수공업자(거류 외국인들이 모여 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왕정 말기에 이르면 Urbs Roma는 "카르타고" 와도 의미있는 해외무역을 하게 되었으며 어느
시점부터는 군대 조직을 강화 시키는 목적으로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당대 Roman의 군대 조직이라고 하면 혈연적 단위이었던 Comitia Curiata
(코미티아 켄투리아)를 기초 자원으로 활용하고 심지어 Etruria 치세 시기에는
용병을 받아들여 군사적으로 봉사(용병)하는 대가로 시민권을 제공하기도
했다. 왕정(王政)시대 이래 Urbs Roma은 기본적으로 혈연적인 3 개의 Tribus
(부족)로 나뉘어져 있었고, 이러한 부족은 다시 열 개의 Curia로 분할되며, Curia는
다시 열 개의 Gens(씨족)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러한 시기부터 실질적으로
귀족과 평민 사이에는 계층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Patricci(귀족)들은 스스로를
진정한 시민 혹은 고유의 Roma People이라고 일컫고 넓은 토지를 소유하며,
참정권을 독점하였고, 점차로 Plebs(평민)들과의 통혼을 절연하고, 봉쇄적이며,
배타적인 집단이 되어 갔다. 그러던 것이 기원전 6 C 중엽 Servius(세르비우스) 치세
시기에 기존의 씨족에 의한 부족 제를 폐지하고 분리시키기에 이른다. 따라서
시민들을 20 개의 거주 단위 속에 등록시켜 지연적인 4개의도시 Tribus, 16개의 농촌
Tribus(트리부스)의 경우 Census-도시의 기초 단위로 구성하였다. 이러한
제도상의 특징은 Tribus 별로 시민을 등록시키고 "군대 소집과 징세"를 위한 것으로
동시에 시민들의 재산과 연령 등을 면밀하게 평가하는 제도로서 이러한 제도를
바로 Census(센서스)제도 라고 했다. 따라서 Urbs Roma 은 과거 씨족들이 기초한
사회에서 공동체와 군대의 구성원들인 시민에 기초를 두는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던 셈이며,
이때 부터 "재산 상태"에 따라 시민들을 몇 개의 등급으로 나누고, 등급마다 일정 수의
Centuriata(백인조)를 조직하여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동시에 백인조마다 한 표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전체 시민들로부터 병사들을 소집하는 새로운 시민 군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바로 !! 이러한 시스템을 Hoplite Phalanx(중무장보명 밀집대)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군사 개혁은 당대에 모두 완성 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기원전 6 C 후반 동안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평가되며, 기원전 5 C 초기에 거의 완성되지 않았나 싶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도시 국가 형성 초기의 군대라면 가장 부유한 지주 귀족들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겠지만 복잡한 주변의 상황으로 전술의 변화의 가져오며 씨족들의 정치, 군사적 역할이 감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체로 강력하였던 왕정이 기원전 6 C 말엽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으로서 당시 공화정으로 이행한 이유를 여기서도 부분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
.
.



Turning Point
01. Rex(왕)
Rex(왕)이라는 기능은 종교적인 기능을 담당한 사제
(= Pontifex Maximus)로부터 출발되어진다. 초기 Urbs Roma
국가의 통일과 권력 그리고 권위를 상징하였으며, 종신직으로서 세습
되지 않고, 능력에 따라 대 귀족 가문의 Paterfamilias(가부장들...)에
의해 귀족 중에서 선출되는 방식이었으며, 민회에서 확정된 듯하다. 또한
"길흉 판정 권"의 확보는 선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왕은
신들의 지지를 확인(신탁)하여야 진정한 의미의 권한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Urbs Roma의 왕은 Greece Polis 들의 왕들과
달랐을 뿐만 아니라 왕권은 사실상 귀족들에 의해 제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선출되면 왕의 권한은 나름대로 막강
하였던 것이다. Rex(왕)의 사후에는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 먼저 돌아
가면서 Interrex(간왕)를 선출하였고, 어차피 귀족 가문에서 배출한
인물이 선출되는 방식이었기에 아마도 돌아가면서 한번 씩 집권하지 않았나
싶다. 일단 왕이 선출되면 "민회의 시민"들은 창과 방패를 치켜들고
함성을 질러 새로운 왕에게 Imerium(지휘권)을 부여하였으며,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게 된다. 또한 Pax Deorum(신들의 평화)를 유지하는 고위
사제이자 최고 행정 수반이기도 했다. 전쟁과 강화를 결정하였고, 전쟁터에서는
총사령관이 되었고, 대외적 업무(외교)에 관한 책임도 함께하였는데
왕의 권한은 가정에서 가부장의 권한과 배치된다고 보면 적절하다. 당시 왕권
이라고 함은 가장 중요한 것이 전쟁에서 군대를 효율적으로 지휘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분야에서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행정적인 면에 있어서도
귀족사회 씨족 원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통제를 하는 권한도 보유하고 있었다고
보여 진다. Rex(왕)는 필요하다면 원로원의 자문을 받을 수 있었고, 이러한
권한들은 Etruria People 출신의 마지막 왕들에 이르면 그 권한이 강력해 진다. 애초
왕정의 시작은 Romulus가 스스로 Rex(왕)이 되는데 동의한 100명의 가부장들로서
원로원을 구성되었고, 그래서 원로원 의원들을 Patres Conscripti (소집된 가부장들...)
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초기 원로원은 씨족 장들의 모임이었을 뿐이었으나 그 후
씨족사회가 많은 수의 가문들로 나뉘어 짐에 따라 원로원에서도 변화에 대응하여
새로운 구성원들이 충원된다. 기원전 575-기원전 450 사이 어느 시점부터 300명
정도의 규모가 관례화되었으며, Sulla(술라, 기원전 85-기원전 80)이전 시대까지 유지되었다.
02. Senatus(원로원)
원로원의 권고가 항상 왕에 의해 수용되는 것도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역시 !! 왕이 자문을 구할 때 순수 자문 기관으로
충실하게 응하는 것으로 공식적 입법권은 없었으나 원로원이 가문과
정치적 영향력에서 뛰어난 종신 원로원 의원들의 협력 체 임을 감안하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Rex(왕)에 의해서 거부권이 행사된다고
가정하면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작동되었을 수도 있었고, 사실상 왕정 초기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 왕이 선출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특권을 누렸던 것으로 볼 수 있다.
03. Curia(민회)
무장 가능한 전체 성년 남자 시민의 총회로서 민회가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의사가 자유롭게 표출되거나 민주적인 의회와는 거리가 멀었고,
로마 사회에는 "혈연관계"가 시민의 공적, 사적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에
"가부장"은 경제, 사회, 종교적으로 기본적 단위이기도 한 Familia(가족)의
구성원에 대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지만 공동의 조상에 대한 결합된 가족들로
Gens(씨족)의 통제를 받았다. Curia(쿠리아)회는 특정지역에 거주하는 씨족들로
이루어졌거나 생각되는 단위로서 총 30개가 있었다고 한다. 10 개의 Curia가 하나의
Tribus(족속)를 이루고, Tities, Quirltes, Luceres( 3 족속)이 전체 Populus Romanus
(로마 시민) 혹은 Quirltes를 구성하였다. 시민들이 투표를 통해 의사를 표현할 때에는 각각의
Curia 단위가 되어 Curia에 한 표를 행사하였고, 각 Curia의 표는 구성원의 과반수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투표를 통한 입법 활동은 할 수 없었다. Curia는 "혈연을 통해
귀족"들이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던 민회로서 수동적인 기구이었을 뿐이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선포, 국정 청취, 왕의 취임식, 왕에게 Imerium을 부여하는 의식, 충성과 복종의 맹세,
초기 혈연적 유대가 중시되는 사회에서 Curia는"시민의 유언과 양자 상속"을 확인하는
기능도 지녔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보적인 민회는 공화정 초기에 이르면 정치적으로는 유명무실해진다.



.
.
.
Vicus Tuscus(비쿠스 투스쿠스) = Etruria Area
Esquilinus, Quirinalis, Aventinus, Palatinus Hills → Toscana
지도를 펼쳐보면 Italian Peninsula의 자연 환경은 단순해 보인다. Alps Mountain이
거대한 호(弧)를 그리면서 Northern-Italy & Central-Euripe으로 나뉘고, 서쪽 끝에는
Maritime Alps(메리팀-프랑스, 이탈리아 국경을 따라 약 190 km 뻗어 있다.)가
"아펜티노 산맥"과 연결되며, 양대 산맥 사이에는 Po River 유역의 평원이 Adriatic Sea
(아드리아 해)를 향해서 이어지고 있다. Genova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Italian Peninsula가
남동부 쪽으로 뻗어 있는데 남서쪽 끝에 오면 Italian Peninsula는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Sicilia와 분리되었다. "아펜티노 산맥"은 Italy의 등뼈로서 "메시나 만"을 가로 질러서
Sicilia의 좀 더 높은 산맥으로 이어져 있다. 또한 이러한 외형적인 통일성 밑에서 기후와
토양의 다양성이 전개되며, 지역적인 차이가 가져다 준 커다란 혜택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지리적으로 Po River 유역은 유럽 대륙에 속한다. "아펜티노 산맥"은 산들이
단순히 연결되었다기 보다는 다양한 산들이 복합적인 형태로 모여 있는 듯 보이고,
멀리 떨어진 계곡, 깊은 골짜기 그리고 높은 고원지대는 고립된 채 오래전부터
목축 생활을 하는 공동체들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특별히 산맥의 서쪽면과 바다 사이의
지역에는 농경 생활에 유리한 평원과 낮은 구릉들을 가진 3 지역 즉 !! Arno & Tiber River
사이의 Etruria, Roma = Rome-Latium, Campania-Napoli 지방이 자리 잡고 있다.
Latium-Campania의 비옥한 화산토는 일찍이 이곳에 경작이 시작되었을 때 풍성한 수확을
보장 했던 곳으로 알려져 왔으며, 동쪽으로는 산들이 해안에 가까이 위치하고, 양떼와
소떼로 유명한 "아풀리아 평원" 만이 유일하게 펼쳐져 있다. Italian Peninsula 내륙으로 흐르던
강들은 비교적 짧았기에 항해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주로 육로와 바닷길이 주요 통로가
되었으며 좋은 항구들은 모조리 서쪽에 위치했다. 에컨대 Genova-Napoli 대형 항로 선박들을
위한 항구이고,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항구들에는 작은 선박들이 몰려 들었다. Venezia는
Roman Empire 이 후 세워진 도시이다. Venezia는 여러 가지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설명해 주고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Italian Peninsula의 북동쪽으로는 Julian Alps(줄리안-
유고슬라비아 북서부와 이탈리아 북동부)를 가로지를는 용이한 고갯길을 넘어서면...Donau-
Sava River 유역으로 연결되고, 계속해서 나아가면 "헝가리 대평원과 흑해"가 나온다. 북쪽...
북서쪽에서 Fracce & Swiss로 통하는 길은 상당히 높게 느껴지지만 통행이 가능하였다고 한다.
Pennine Alps(펜닌-스위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있는 알프스 산맥)의 고지대 통로마저도 민족
이동이나 외부의 적대적 세력으로부터 침입에 이용되었다고 하며, 남쪽으로는 Sicilia로
연결되었는데 North-Afica와 인접되어 있고, Tunisia-Cape Bom(본 곶)이 가장 가깝게 위치한다.


.
.
.
자 !! 이제부터 마치 미궁(迷宮) 속 같은 Italian Peninsula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풀어 나가도록 하겠다. 하나의 국가가 성립되면서 어느 곳이나 마찬가로 건국 신화 또한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건국 신화라고 하면 양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
해야 하는데 은폐하는 측면도 강하게 작용하지만 사실적인 부분들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서
일부 섞이게 됨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 근거하여 보면 Roma People 들도
예외일 수 없이 기원전 350년 자신들의 도시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말해주는 신화을 만들어
내었다. "암-늑대"가 쌍둥이 형제를 젖을 먹여 길렀다는 신화가 말해주는 것은 당대에
이미 !! 원시적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Italian-
Peninsula가 비교적 낙후된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다.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Romulus(로물루스) & Remus(레무스) 시대 보다 먼 과거로 돌아가 소급하여 찾으려
했던 점에 비추어 "국가라는 틀" 속에서 그 이전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거나 적어도 최소한의
문명도 없었다는 점을 부각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에
진정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North-Italian Peninsula에 근접된 현재의
서-유럽을 이루고 있는 France & Deutschland 지역에도 역시 여러 족속과
문명의 불빛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제시하고 있기에 전방위 적으로
역사적 인식을 함양해야 함은 당연하다. 역사의 기록은 전적으로 승리자에 의해
남겨지는 흔적으로서 어느 시기부터 Roma People 들은 주변의 인근 족속들을 통합
하더니 절대 강자로 올라서는데 결과적으로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비극적 신화도 함께
그들의 역사 속에 압축 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Italy Peninsula 전체를 아우르는
절대 패권자로의 완벽한 위치는 갖고 있지는 않았고, 지역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 Lgurians-Veneti-Umbrians-Piceni-Sabines-Samnites-Latin People


당연하지만 기원전 8 C 문명의 중심지는 동부-지중해의 Persia &
Egypt이었다. Levant(동부 지중해)의 Phoenicia People 들은 North-Africa
연안에 "카르타고"를 그들의 교역 기지로서 건국(속국)하였으며, 지중해의
북쪽과 남쪽에는 역동적이며 창의적인 Greece Polis 들이 번성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Phoenicia People들이 Sicilia, Southern-Italian Peninsula까지 식민지를 개척
하고,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에 Italian Peninsula 나머지 지역에서는 동방의
문화에 견주면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반도 중부"에는 Etruria People 들이 인근 족속
들에 비해 선진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으며, 남쪽에는 Sicilia를 중심으로 혼란스럽게
널려 있던 Greecce의 식민지 즉 !! Magna Graecia(마그나 그라에키아)가 공존하면서 당대
국제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참고로 Sicilia(Siracusa)의 경우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Hellenism 세계 최대 도시 이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듯이 "마그나 그라에키아"는
쇠퇴기에 접어든 Greece 본토에서 보다 발전된 문명을 누리고 있었던 것 같다. 즉 !!
외연적인 Greece 식민지이었을 뿐 정확하게 인식하면 Italian Peninsula 지역으로 옮겨온
Greece 문명이었던 셈이다. 또한 "마그나 그라에키아"는 Greece 본토의 장점과 단점를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장점 → 지중해 무역을 통한 경제 번영과 문명의 발전을 의미했고, 단점
→Polis 간에 분열과 다툼이었다고 정리될 수 있으며, 이러한 모든 것은 Roman의 발전에
좋은 양분이 되어 주었던 것이고, 가장 확실한 도움이 되었던 것은 선진 문명을 전해주면서도
자체 통일을 이루지 못한 Italian Peninsula에 정치적인 위협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점진적으로 접촉의 빈도가 증가하게 되면서, Roma People 들은 스스로 Greece
문명에 포함되고 싶어 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Greece 문명을 답습한 표준화된 국가 체제를 갖기를
원했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목표를 달성 하는방법 가운데 하나로 Roman & Greece People이
만나는 모든 경위를 "Greece 신화"와 공통으로 다룰 수 있는 건국 신화 하나를 채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Troy & Aeneas의 전설적인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점이 Old Greece 세계가 Urbs Roma의 새로운 질서로 변형되기
시작한 순간이기도 했다. 전승에 의하면 Italian Peninsula 거의 대부분 지역은
오지나 다름없었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당대의 상황에 대해 한줄의
문자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나 "일곱개 언덕을 중심으로..." Urbs Roma가 탄생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Persia War & Alexandros의 동방 원정이 있은 후 Greece
문명은 본토를 벗어나 동부-지중해 전역에 문명의 확산을 도모하였으며, 비록
사람들이 발붙이는 모든 땅을 포괄적으로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유럽 문명을 키워내는 것은 Greece 문명의
몫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 Greece가 오래전부터 Orient 문명을
받아들여 좀 더 향상된 문명을 이루었듯이 지중해 서쪽의 중심 지역이였던 곳에서
앞서 언급되었듯이 작고, 놀라운 변화들이 감지되었는데 Italian Peninsula
(중서부 지역) Tiber 강변의 Latium(라티움) 평야에 세워진 작은 도시 국가에서
부터 마치 사실처럼 가공되었거나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시작되었다. 예컨대
왕정(王政)의 마지막 왕이었던 Lucius Tarquinius Superbus 시절 도시 Urbs Roma의
크기는 동-서 48 km, 남-북 24 km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Italian-
Peninsula에서 조차 보잘 것 없는 세력에 불과하였다. 또한 이러한 시기 고대 역사가 혹은
연대기 작가 들에게마저 관심을 끌만한 지역도 아니었고, 더구나 구성원들은 대부분
문맹이어서 자신들의 역사 조차도 기록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초기 로마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민간에 전승 되어진 구전과 신화, 허구 따위를 모아 놓은데 불과 한 셈이었다.
주로 사용된 언어는 당시 Italian Peninsula내의 모든 종족들이 사용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움브리아어 + 오스카어, 라틴어와같은 방언이었으며,
그중에서 오스카어는 기원전 1 C 까지 Italian Peninsula 중부와 남부의
공식 언어이었다고 한다. Urbs Roma의 전설적인 이야기에 온전히 의지하면
기원전 1184, 10년간 저항해온 Troy → Greece에 의해 장악됨으로써 역사의 흔적으로
남겨졌고, 미(美)와 사랑의 여신 Venus(베누스) = Aphrodite(아프로디테) &
Anchises(안키세스)의 아들이자 Troy 왕족이기도 한 Aeneas(아이네아스)가 부친과
함께 초-자연의 안내를 받아 불타는 Troy를 빠져 나오게 된다. 이제 Aeneas는
같은 시대 인물 Odysseus와 마찬가지로 길고 긴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모르나 배가 태풍을 만나면서 North Afica Carthago 해안까지 떠밀려
왔고, 이때 Carthago 여왕 Dido(디도)가 마침 Aeneas 일행을 환대 했으며, 그러한 인연으로
묶였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은 곧 !! 짧지만 굵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도시를 건설해야만 했던 운명이 Aeneas를 계속 방랑의 길로 내몰아 그는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했다. 한편 그가 떠난 빈자리 슬픔을 이기지 못한 Dido 여왕은 자결하게
되었으며, 전설에 의하면 이것이 훗날 Roman & Carthago의 반목의 "씨앗"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어찌되었든지 Urbs Roma의 건설에서부터 공화정 초기의 역사는 지극히
모호한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시기에 대한 중요한 역사서이기도 한
Livius(리비우스)의 "로마 사"와 Dionysius(디오니시우스)의 "고대 로마 사"가 구전과
전설에 입각한 신빙성 없는 사료들을 근거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 의해 그 내용이
의도적으로 가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로로 유랑자들이 Septem Montes
(셉템 몬테스, 일곱개 언덕)에 도착되었는지 확인된 기록도 없다. 전승에 따르면 Urbs-
Roma는 3 번의 시기에 걸쳐 이룩되었다고 하는데 Aeneas(아이네아스)가 Carthago를
떠난 후 여러 해를 방랑한 후 Latium 평야지역에 도착하여 그곳의 실권자 Latinus(라티누스)를
만났으며, Rex(왕)의 딸 Lavinia(라비니아)와 혼인에 성공하며, Lavinium(라비니움)을 건설
하였고, 그의 아들 Ascanius(아스카니우스) 또한 Alba Longa(알바롱가)라는 도시를 건설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Romulus에 의해 Urbs Roma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건국 과정은 Greece에서 들여온 "분리되어진 집"이라는 뜻을 가진 Apoikia(아포이키아)라는 식민시
즉 !! Polis Model과 일치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도시의 12대
Rex(왕) Numitor(누미토르)는 아우 이자 야심가이기도 했던 Amulius
(아물리우스)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면서 내쫓기게 되었는데 그에게는 Rhea-
Silvaia(레아 실비아)라는 딸이 있었다. 여기서 Amulius는 그녀가 차후
왕족의 혈통을 이어받을 아이를 갖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녀를 아예...
"처녀 사제"로 만들었는데 졸지에 처녀 사제가 된 Rhea Silvaia는 곧 !!
죽을 운명에 이르렀으나 "신의 유혹"으로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주장이 대중에게
신뢰감을 얻어 간신히 죽음만은 묘면했다. 자 !! 이렇게 되어서 "전쟁의 신" Mars
(마르스)와 처녀 사제 사이에서 쌍둥이 Romulus & Remus가 태어나게 되었지만 쌍둥이
들은 바구니에 넣어져 곧 바로 Amulius에 의해 Tiber River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표류하던 쌍둥이는 공교롭게도 극적으로 어미늑대에게 구조되어 늑대의 젖을 먹고 성장
하게 되었고, 이 후 Faustulus(파우스툴루즈)라는 반-유목민에게 발견되면서 왕의
혈통을 갖고 태어났으나 양치기 아들로서 성장하였으며, Plutarchus(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개념대로 이해하면 비천한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Urbs Roma는
간단히 말해서 살인 위에서 세워진도시이며, "Asylum(피난처)"를 구하는 자들에 의해
세워지게 된 도시 라는 의미도 갖게된다. Urbs Roma의 건국 신화는 Persia Cyrus의 탄생
비화와 대부분 일치하기도 하지만 Romulus에 의해 선택된 Palatinus 언덕이 Roman
최초로 촌락이 형성된 곳이라는 사실들이 점차로 고고학자들에 의해 유적들이 발견됨으로써
신빙성을 지닌 사실들로 증명되어진다. 또한 기원전 753 → 04월 21일(건국일) 이전에도
사람들이 살았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 흔적들이 발견되었고, 실제로 이 지역에 가장 오래된


"공동 묘지"들은 기원전 11 C-기원전 10 C 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Urbs Roma에서는 오래전부터 "지하 묘지 = 장례 유물"
들을 가장 오래된 거주 흔적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Froum 지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의 잔해들이며, 철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
또한 다수 발견 되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고고학 적으로 기원전 13 C-기원전
12 C 중-청동기 시기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점으로서 Macedonia의 상인들과 식민시
개척자들이 "아펜티노 산맥"에 출몰하였던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어찌 되었거나 촌락
들은 가파른 비탈면을 따라 물이 있는 곳 근처에 생겨났으며, Capitolinus 언덕의 돌출부와
Forum Romanum을 굽어보던 Tabularium(타불라리움)의 반대쪽 지역에서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Palatinus 언덕은 역사 속에서도 의미 있는 장소로서 존재하였고,
종교적인 장소이었으며, 최고의 주택가마저도 이곳에 형성되었다. 훗날
대략 그곳에 살던 몇 사람을 예로 든다면 Octavianus-Cicero-Marcus Antonius-
Crassus등이 이곳에 자신의 저택을 지었고, 말 그대로 제국의 중추적인 장소
(신성한 곳)가 되었다. 또한 앞서 언급되었듯이 Septem Montes(일곱 언덕)에 형성된
도시가 고고학적 증거와 유사한 일치를 보인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는 사안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참고로 당시 Alba Longa의 시민들을 비롯하여 Latin 족속 들에게는
"신성한 봄"이라고 하는 관습(종교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조상의 땅에는 자기
몫이 없으므로 새로운 땅을 개척해야 한다는 의미로서 그들은 자신들을 받아들여 주는 곳
(도시)이나 전쟁으로 정복한 땅을 자신들의 국가로 여기고 그곳에 정착하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전통에 따라 Latin People 들은 촌락의 성원 들이 증가하면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가도록 했는데 "신성한 봄"이라는 말은 봉헌의식을 치르던 계절을 차용 한 것으로 어쩌면
건국신화에 관한 수많은 전설들은 놀랍게도 어쩌면 역사적 사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Roma People들의 원초적 고향으로
알려진 Troy의 경우도 전설 상에서만 존재하다가 고고학자들이 19 C에 이러한
지역을 발굴하면서 허구가 아닌 사실로 드러났지 않은가 !! 전설 속에서 Aeneas의
눈길이 닿은 곳은 Tiber River 어귀 에서 24 km 떨어진 장소 즉 !! 일곱 개의 언덕
(기원전 7 C)이기도 했다. 이곳은 해상 교역로에 직결되는 항구도 없었으며, 해발 50 m
언덕 기슭의 습지로 Tiber River가 자주 범람하는 곳으로서 정착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물을 빼야만 했던 지역이기도 했다. 장래 황제들의 주택이 들어설 Palatinus
언덕에는 기원전 1000년 즈음 그곳에 살기 시작한 반-유목민들과 나무로 지은 움막들이 있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그곳은 사람들이 살기 좋은 터전이 되어주었는데
무엇보다도 이곳의 커다란 잇-점은 침입자들에 대한 천연적인 방어 시설이
되어 주었다는 사실로서 Tiber River 계곡은 비옥한 농경지 Latium 평야로 이어졌고,
북쪽에 있던 Etruria라는 또 다른 지역을 이어주었던 다리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주목되는 곳이었다. 다시 돌아와서 Romulus & Remus는 작은 무리를 이끌고, 자신들이
버려진 장소에서부터 도시를 세우기 시작했는데 먼저 방어시설(성벽)을 쌓았으며, 대략...
이러한 시기부터 "권력의 단맛"을 알게 된 Romulus & Remus가 변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새로운 도시의 주인으로 누가 더 적합할까 !! 전승에
의하면 Jupiter 신은 그곳의 수호신에게 결정권을 넘겼다고 하는데 Romulus & Remus는 결국
"새가 날아가는 방향과 숫자"에 의해 결정할 것이라고 암시 받게 된다. 그래서 Romulus-
Palatinus VS Remus-Aventinus 언덕에 자리 잡게 되었으며 사실 "레무스가 로물루스"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Romulus가 먼저 Palatinus 언덕을 중심 지역으로 정하고 요새화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신성한 경계선이 그어졌으며, 그것이 바로 !! 사각형의 Roman Quadrata
(로마 콰르라타) 이었다. 그러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Remus가 재빨리 침범함으로써
신성성을 부정하게 되었고, Romulus는 즉시 !! 자신의 동생을 살해하고 그 장소를 4개의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신성한 "울안의 땅"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처럼 도시는
"존속살인" 위에 세워졌으며, 이제 도시를 채울 성원들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는데 Romulus는 성벽 안에 신전을 세우고, 그곳에 들어서면 누구나
체포를 면할 수 있다고 선포하여 인근 족속들의 주변의 도시에서 망명한
자와 낙오한 자 들을 끌어들였다. 즉 !! 원하기만 하면 모두 받아들여 시민으로
인정 했던 것이다. 반면에 변칙적인 방법에 의해 남성들을 채워졌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여성들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무법적이고 야만적인 방식이었고, 그것은
"사비니 여인의 강탈"이라는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다. 사실 !! 기원전 753년 04월 21일
이라는 숫자도 사실상 500년 후 역사가들에 의해 수없이 반복된 계산 이 후 나온 숫자에 불과
하다는 점에 비추어 실제 있었다고 인정 하기 어렵지만 "사비니 여인의 강탈" 이라는 고대적
사건이 개인적으로 흥미롭기만 한 이유는 Korean Type의"보쌈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
Septem Montes = Seven Hills of Rome
Aventine-Aventinus, Caelian-Caelius, Capitoline-Capitolinus
Esquiline-Esquilinus, Palatine-Palatinus, Quirinal-Quirinalis, Viminal-Viminalis
Palatinus-Latin People + Quirinalis-Sabines 정착과 같은 역사적
장면들...만으로 Urbs Roma의 창건 과정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Latium은
대략 1,000,000년 전 화산이 폭발하여 생겨난 응회암과 화산재를 주요 기반 층으로
하는 암석으로 이루어졌다. 충적토로서 형성된 편평한 바닥 위의 완만하게
경사진 계곡으로 넓은 굴곡을 그리며 강이 흐른다. 전승으로 보면 Romulus에 의해
초기 시대의 "도시의 틀" 이 형성되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한 사람에 의해 정치,
종교적 행위로서 정확하고 엄숙한 의식에 따라 실행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암소 한쌍에 멍에를 씌우고 청동 쟁기를 잡고, 위대한 쟁기질을 했다는
사실로서 이때 땅 바닥에 생겨난 선(線)이 Urbs Roma의 경계선이기도 한
Pomerium(포메리움)이 되었다. 또한 경계선 안에 위치한 가장 높은 곳(언덕)에
수호신의 거처가 마련되었고, 동-서를 이어주는 Decumanus(데쿠마누스)
거리와 남-북을 관통하는 Cardo(카르도) 두 개의 도로가 만들어짐로써 그렇게 구획
된 종교적 관념의 영역은 이상화되어졌으며, Urbs Roma Type의 "아크로폴리스"
이기도한 Capitolinus 언덕에 Etruria People의 가장 위대한 신이었던 Jupiter(유피테르)-
Juno(유노)-Minerva(미네르바) 신전이 있어서인지는 모르지만 Urbs Roma의 발달은
Central-Italy In Etruria- People로 부터 비롯되어졌다는 사실이 실제로 그 어떤 증명된..
사실들 보다 확실해 보이는데 아마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Etruria People 한 사람에
의해 주도적으로 초기 "국가의 틀"이 형성 되어졌을 것이라는 추정이 현 시점에서 가능해 보인다.
Etruria People에 대해서 고대 역사가 Herodotos(헤로도토스)는 Persia-
Empire의 영향을 받은 "리디아"의 Tyrrhenus(티레누스)가 일단의 족속들을 인솔
하여 서쪽으로 이주하였다고 말한다. 반면에 Diogenes(디오게네스)는 그들이
살던 애초의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이라고 하였으며, 그러한 주장은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분석된 것으로 Vulci(불치)에 있는 Villanova(빌라노바) 문화를 바탕으로 한 철기
시대 민족이라는 사실이 배경으로 설명 된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기원전 1200년 경 동부 지중해를 주름 잡았던 바다의 족속 그러니까 해적 무리들 중 "투르샤"
족이 있었는데 기원전 6 C Asia Minor 해안에 있던 "램노스 섬" 사람들의 언어와 유사한
언어 체계를 사용했음을 볼 때 그들 일부가 청동기 시대 말기 Toscana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할 때 역사적으로
추정하면 Etruria People들은 기원전 8 C-기원전 7 C 역사의 수면위에 떠올랐다고 확인 된다.
.
.
.

Boustrophedon(부스트로페톤) 서법 →
마치...소가 밭 고랑을 갈듯이, 왼 쪽에서 오른 쪽으로 그 다음
줄은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방식을 일컫는 고대의 좌우
교대 서법이며 읽을 때는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읽어야만 하는 비문(석비)
.
.
.

Karkemish → Hieroglyphic Luwian-Read Boustrophedon
Into the Faces of Animals or Body Parts-Some Exceptions-
Starting at Top Right—of the Left Stele-Lines 1 3 5 7 9 Read Right–to–Left
무엇보다도 그들은 건축의 귀재였으며 고대 Urbs Roma의 장점으로 꼽히는
대규모 Colaca Maxima(하수시설)은 물론이고, Greece People 들도 경탄해 마지
않는 수도관을 주도적으로 건설하였고, Tiber River를 걸어서 건너는 유일한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당시 !! Italian Peninsula에서 가장 번영한 Etruria-Campania를 연결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 했을 것이라고 판단(정치, 경제, 군사) 되는 최초의 "목조 다리"
Pons Sublicius(수브리키우스) 마저도 그들이 이룬 성과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 석조
다리도 아니고 목조 다리 이었을까 ? 그 이유는 유사시 적들과 전투를 치루면서 파괴
하기 용이하고 쉽게 복구가 가능 했기에 목조다리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 Italian-
Peninsula의 통일을 이루고, 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루었을 때 비로써 석조 다리가 들어서게
되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점은 어떻게 보면 군사적인 충족 요건으로
Etruria People들의 지배가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라는 점인데 그들은 과학과 기술을 바탕으로 한
문화적 침투로 애당초부터 지배 영역을 넓혀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진보적
문명의 우수성은 결과적으로 문명을 발달시키는 발판이 되어 주었으며, 이미 !! 경제,
문화 적으로 당대에는 별다른 저항없이 식민지화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으로 일련의
집단에 의해 정치적으로도 완벽한 지배 구조를 확립(기원전 616)하기에 이르렀다. 더불어 이러한
시기는 Forum 지역을 안정시킨 건조 공사가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였다. Forum-
Romanum을 중심으로 모든 Forum 들이 연결(소시장, 약용식물과 야채시장, 생선시장)
되었고, 북-동쪽 또 다른 길은 Tiber 계곡으로 연결되었는데 Tiver River 하구 근처
"오스티아"의 통하는 "소금의 길"로서 Ostia는 말하자면 "소금의 도시"로 불리던 곳으로서
당시 재정적 이유로 중요하게 다뤄지던 전략적 상품의 산지이기도 했다. 기원전 6 C →
Roman 최초의 정치적 혁명은 Rex(왕)을 몰아내고, 자유를 획득한 것 이었으며, Urbs Roma는
공화정을 확립시킬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는 듯 했고, Rex(왕)의 축출이
이루어지던 시기가 바로 !! 모든 면에서 촌락에서 도시화 되어 가는 첫 번 째 단계로이기도
했으며 또한 Roman의 초기 역사 전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하였다.
정치적 자유에 대한 갈망과 "일인 지배체제"에 대한 거부감은 표면적으로 Octavianus에 의해
제정이 성립되기 이전까지 지속 되었고, 이러한 자유이념을 지키기 위해
귀족들은 주목할 만 한 원칙에 합의 한다. 그것은 왕정(王政)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권력이 한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고, 서로를
독점적 권력으로부터 방어하도록 한 것으로 궁극적으로 두 명의 행정관에게
권력을 분산시켰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혁신은 과거와 완전하게 단절
시킬 정도의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군주제"는 철폐되었으나 몇 가지
것들은 여전히 남겨져 있었고, 새롭게 만들어진 정치체제이기도 한 "Republic
(공화정 = 공화국)"의 제도가 갖는 연원은 아주 오래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이러한 용어가 의미하는 바는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국가를 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초기 Republic(공화정)은
근대적 의미의 공화정이라기보다 귀족들이 주도한 "과두 정치"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권위에 의한 수탈에 항거한 혁명 이 후에도 평민들은 군주에게 압제를 당한
것처럼 귀족들의 독재에 시달리게 된다. Rex(왕)의 색깔이라 할만한 "Royal Color"로 Toga
(토가)의 단을 대는 것은 그들의 최고 행정 고위직의 특권이었다. 고대 도시국가에서는
대체로 모든 권한이 세분화 되어 있지 않았고, 권력의 집중을 가져 왔는데 Republic(공화정)에서


집정관은 군사령관이었으며, 법관이자 수상이기도 했고, 주교(사제)가
되기도 하였다. 귀족을 중심으로 한 최고위층은 "점이나 주술, 점성술"을
신봉하여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였고, 심지어 자신들이 "신의 후손"
이라는 주장까지 일삼게 되었으며 공히 Urbs Roma 사회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전승
되어온 의례에 따르게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Tarquinius에 의해 남겨지고
Jupiter 사원에 보관된 Sibyl(시빌)의 신탁이라고 불리던 신비로운 예언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어찌되었든지 Roma People 들은 예언서를 소중하고, 엄격하게 보관
했던 것으로 보여 지는데 Republic에 심대한 재앙이 예고된 경우, 그 어떤
대안도 모조리 사라져 버렸을 때 두루마리가 펼쳐지고, 희미한 Greece Alphabet
으로 된 문자를 손가락으로 확인하며, 예언을 해독하였다고 전해진다.
기본적으로 왕정 통치 → 과두 체제로의 접근은 약화되었던 Gens을 바탕으로 한
귀족 가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잘 알려진 전승에 의하면 Roma People
가문이 중심이 되어 Etruria 출신의 거만한 왕이었던 Lucius Tarquinius-Superbus
(타르퀴니우스)의 "왕정(王政)"에 대항하였으며, 그의 아들 Sextus에 의해
귀족 부인 Lucretia(루크테리아)가 강간당하자 Lucius Iunius Brutus(브루투스)를
중심으로 귀족 가문들이 봉기하여 왕을 추방하고 왕정을 종식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은 상업적 이해 관계자들에 대한 토착 귀족들의 항거이었으며,
기원전 525년경에 Etruria People들의 느슨했던 도시 연맹이 "캄파니아" 지역의
도시 Cumae(쿰마이)를 장악하려다 군사적으로 심각한 패배를 당하면서 본의 아니게
활발하게 전개되던 Etruria & Campania 간의 육로 통상을 단절시켰고, 이러한
시기에 “삼니움인”들과 그 밖의 산악지대 족속들이 Latium 지역을 침입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런 상황은 Etruria의 영향력 하에 경제적으로 확장되던
Roma People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분쟁은 공화정 초기 신분 투쟁에서도 중요한 역할로서 작동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위대한 가문을 이끌고 있었던 귀족들은
번영의 시기에는 참을 만 했으나 점차로 경제적인 환경이 부정적인
상황에 노출 되자 의식하지 않았던 Rex(왕)의 억압적 통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고, 때마침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으려 집단적 행위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Rex(왕)를
추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왕정(王政)의 붕괴는 어느 날 갑자기
특정한 사건에 의해 촉발 되었다기보다는 경제적 침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이러한 시기 귀족 계층은 자신들이 헌신하는
목표가 충돌하는 과정에 정치적 원리를 만들어 내었고, 일차적으로 국가 혹은
좀 더 커다란 사회 보다는 Gens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었다. 대체로 귀족들은
동료나 가족(= 친척)들을 수행원으로서 가능한 장소에서 함께하였는데 이들은 하나의
가문에 포함되어 있었고, 모두 같은 "선조의 후손"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러한 비-공식적인 Network 내의 성원들은 지속적으로
정치 권력, 신분, 국가에 핵심적인 위치를 점유하였으며, 존속
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Gens Julius(율리우스)-Claudius(클라우디우스)
일족의 경우 말하자면 공화정 시기부터 Urbs Roma의 황제 계보를
구성하게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고대 Etruria People 왕정(王政)
시대에서는 명성 혹은 명예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Rex(왕)에게 집중된
"권력"이기도 했다. 그래서 왕정 → 공화정으로 옮겨가서도 "권력"이
Roman Republic(공화정)의 정치 구조에서 지배적인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던 셈이다.
예컨대 Roman의 권력(공권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Fasces
(파스케스)는 1.5 m 길이의 "느릅나무 혹은 전나무" 막대기를 여러 개
묶은 다발인데 막대기 다발로 도끼를 감싸고, 붉은 색 가죽 끈으로 묶었다.
이러한 막대기 다발이 상징하는 "전제 주의"는"Fascism(파시즘)" 이라는 용어
속에 근대에 이르러서도 살아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 Etruria Rex(왕)
들이 사라진 이 후에도 Imperium(임페리움)의 권력은 존속되었고, Roman의
입장에서 그것은 정복을 합법화하고 정당화 시켜준 요소이기도 했다. 또한
Pons Subliclus(수블리키우스) 목조다리의 전설적 전투 신화는 모든 것의 출발
이면서 그에 걸 맞는 역사적 흔적으로 작동되었다. 훗날 Gallia = Caesar 병합이든지,
Dacia(루마니아) = Trajanus 침공이든지 황제의 Imperium은 항상 정의의 실행
이라는 명예로운 외관 뒤에서 거침없이 실행되었고 Republic(공화정) 초창기부터 모든
공직은 위대한 Patricci(귀족)에 의해 독점되었다. 그러한 배경에는 그들의 "순혈주의"가 강조
되었으며, 그들의 말에 의하면 Etruria People의 왕정 시기 부터 정치적 직무를 수행하는
자리에는 자신들이 가장 적합 하다는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또한 신들과 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Patricci 뿐이며, 그렇기에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Patricci이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 기원전 545-기원전 509
01. Romulus → 기원전 753-기원전 716 / Remus
02. Numa Pompilius(누마 폼필리우스) → 기원전 715-기원전 673
03. Tullus Hostilius(툴루스 호스틸리우스) → 기원전 673-기원전 641
04. Ancus Marccius(앙쿠스 마르키우스) → 기원전 641-기원전 616
05. Tarquinius Priscus(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 기원전 616-기원전 579
06. Servius Tullius(세르비우스 툴리우스) → 기원전 579-기원전 535
07. Tarquinius Superbus(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 기원전 534-기원전 459
.
.
.
건국이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르면서 Roman Republic(공화정)은 더 많은 사회적
격변과 시민 대다수의 시민권 확대 요구, 법의 개혁에 지속적으로 대응했고,
혁신적인 변화의 몸부림을 치게 된다. 보수적이었으나 유연하기도 했던 Roma People
들은 실효성 있는 것들을 택하였으며, 실패에 적응하고, 과잉이 되어버린 것도 다소
있었으나 그들은 이러한 모든 것을 신성하게 여기며, 자신들의 영역 안에 소중하게 보관하게
되었고 선조들의 관습에 충실 하게 따르는 것이 다른 어떤 방식보다 현명함과 동시에
우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당대 Roman Republic(공화정)은 내전과 혁명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파괴되던 Greece Polis들과 비교하여 말하자면 Roman Republic이 세워진 뒤에도 처음 100년
동안 온갖 소요와 시민들의 피가 거리에 흘렀으나 Roman Republic 자체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Civitas(시민권)의 공유"라는 발상은 Greece People 들의 발상이기도
했으나 Roma People들이 보기에 그보다 소중했던 것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그들의
정의가 되었으며, Roman Republic에서 훌륭한 시민이라는 개념은 남들이 보기에도 그럴듯하게
훌륭하게 보이는 시민이기도 했고, 일단은 도덕적 잣대와 평판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Old Roma People 들에 의해 사용되던 언어에서 이러한 개념은 동일한 단어 Honestas
(명예로움, 고귀한, 존경스러운, 덕성스러운, 훌륭한, 탁월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에 찬 시민
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때마다 그러한 행동의 목적은 언제나 더 많은 영광과 커다란 명예를
얻을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최고의 공포도 있었는데 그것은 "굴욕"이었다고 한다.


Roman Republic 시민의 90 %를 차지한 계층은 자신들이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평민으로서 피-지배 계급으로서 참정권이 없었고, 당연하게도
"병역과 남세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던
귀족들은 여전히 왕정시기와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획득한 Ager Pulicus
(아게르 푸블리쿠스, 공유지)를 분할하여 독점할 뿐 아니라 평민의 토지를 불법으로
빼앗는 등 횡포가 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계에 천적이 존재하여 왔듯이
어느 한 순간 "부"를 축적하여 귀족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 한 경제력을 가진 Plebs를
중심으로 기원전 5 C 중 선동적인 조직체가 만들어졌고, 결정적인 승리를 획득하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기에 이르렀는데 그들의 저항이 이뤄졌던 장소는 Aventinus Hills
이었다. 이처럼 치열한 신분투쟁이 전개 되면서 평민들의 정치적 힘(권력)이 증대
되었으며 점차로 "신분 투쟁의 긍정적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367년
국가의 최고위 공직자로 입후보 할 수 있는 권리가 시민(평민)들에게 주어졌다. 앞서
설명되었듯이 귀족들은 Senate(원로원)의 성원으로서 과두 정치를 공식화 했는데
순수 혈통 가문의 귀족들 중에서 다수의 Magistrate(정무관) 그리고 두 명의 Consul(집정관)을
임명하여 그들에게 정치를 맡겼다. 또한 왕정을 혐오 했던 탓에 정무관과 집정관을
철저히 임기제로 운영하며 독재를 막았다. 국가 비상사태 시에는 집정관이 일시적으로
Dictator(디타토르, 독재관)가 되면서 전권을 장악하였지만 그러한 기간을 6개월이 넘지 않도록 했다.
"민회" 또한 있었으나 초기 민회를 소집하는 권한이 집정관에게 있었으므로 다소
정치적 목적에 의해 사실상 평민들의 발언은 원천 봉쇄되었다. 더구나 평민 중 일부는
귀족들과 Clientes(피호 관계)를 맺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것은 경제적 자립 능력이 없는
사람(노예)들을 해방시켜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들은 귀족과
신의와 의무를 바탕으로 한 도덕적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일반적인 평민과는 달리 귀족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훗날 중세 시대에 도달하면 이와 같은 관계가 영주와 기사
계급에 의한"계약관계"로 확장되기도 하였다. 또한 원로원 명단이기도 한 Album(알붐)을
재검토하는 감찰관-Censor(켄소르), 재무관-Quaestor(콰이스토로), 법무관-Praetor
(프라이토르)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로의 유지를 책임지는 고위 고관에 해당하는 공공건물
관리인이기도 하였던 조영관-Aedilis Curulis(아이딜리스 쿠룰리스)가 있었다. 이들을
제외한 평민으로는 도시와 장인, 자유로운 농민, 부유한 상인, 가난한 이주민 등이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해관계가 달라서 행동 통일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기원전 5 C 초기
Urbs Roma의 상황은 Solon의 개혁이 실시된 80년 전의 Greece In Athens 보다는 중벌주의
(重罰主義)로 대변되던"Drakon 법전"이 생겨날 무렵 그러니까 200년 전의 Athens와 비슷하였다.
신분투쟁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 되었다는 것은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의미하지만 당시만 해도 평민들에게 가장 고통을 준 것은 정치적
권한에 앞서 "법체계"로서 현실적으로 명문화된 법전(성문법)이 없었으므로
모든 법은 관습적 족쇄가 되었고, 귀족이 임의대로 입맛에 맞게 처리하는 방식
이었다. 그저 귀족들의 편의에 의해 악의적으로 법이 시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평민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역사상 전무후무한 비-폭력
저항운동(집단 이탈)을 구사하게 되었다는 것(기원전 494)이다. 귀족들의 권력을
제어 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수단이기도 한 파업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비-폭력적이었으나 선동적으로 호소했고, 외부의 위험요소가 있을
시기 시민(평민)들은 그냥 무기를 내려놓고, 집단적으로 Urbs Roma를 빠져
나가는 것으로 문자 그대로 총-파업(Secessio, 철수)을 시도 한 것이다. 그저 그들은
신성한 언덕으로 향했으며, 이것은 싸우기를 거부한 것으로 기존의 공화정을
탈퇴한 동시에 일시적이었으나 언덕 위에 자신들만의 또 다른 공화정을 만든 것이기도 했다.



더구나 Urbs Roma를 빠져 나온 평민들은 "곡물과 대지의 여신"
Cres(케레스) 신전이 있던 성스런 언덕에 모여 있었으므로 물리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해산시킬 수도 없었다. 이것은 원로원의 정치 귀족들과 민중
사이의 권력 균형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한 것으로 공화정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평민들은 이러한 단 한방의 파업의
결과 많은 것을 얻게 되었는데 먼저 자신들의 순수 정치 조직이기도 한 "Concilium-
Plebis(평민회의)"를 구성하게 되었고, 훗날 귀족들의 꼭두각시가 되고 말았으나
그들의 대변인 격인 호민관-Tribunus Plebis(트리부누스 플레비스)이라는 행정관직을
신설하게 되었고, Tribunus 들은 이렇게 해서 행정, 사법, 군사, 모든 분야에서
태생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귀족들의 관습법 악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성문법의 제정을 요구하였는데 마침내 기원전 449년에는 Urbs Roma
최초의 성문법 이기도한 Lex XII Tabularum(12 표법)이 Decemviri(데켐비리)
/ 10인 위원회에 의해 제정 되기에 이르렀다. 이 후 평민은 민법상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 받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그저 평민들이...
대승을 거둬 이뤄진 산물만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국가 속의 국가를 세우기를
원했던 귀족들은 자산들의 이상에 따라 국가를 형성할 것을 고집함으로써 평민들을
배제 시키려 했는데... 그러한 사실이 잘 드러난 것이 호민관이 선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평민들을 고려하지 않고, 국가 공동체를 운영하려 했다는 사실이며,
"귀족들의 주요 목표는 귀족 자신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규정된 공동체와 국가의
질서 속에 평민들을 재-통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4년 뒤 Lex-Canuleis(카눌레이우스법)
으로 귀족과 평민 간의 통혼이 이뤄지게 되었고, Struggles of the Order(신분 투쟁)
혹은 Conflicts of the Order(t신분 분쟁)의 결과로서 절정기 즉 !! 기원전 367년에 "시민의
평화"로 일컬어지는 Lex Licinia-Sextia(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이 제정되면서 부터로 볼 수 있다.
어찌되었든지 결과적으로 기원전 4 C-기원전 3 C 전반기에
이르게 되면 귀족과 평민 간의 법적인 평등이 마침내 실현된다. 이것은
당시 Urbs Roma의 외적인 팽창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상황에서
평민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으며, 귀족들은
평민들의 요구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절박함이 있었다. 그러나 평민들이
주도 하던 신분 투쟁의 고삐도 늦춰야하는 중대한 위협이 닥치게 되는데 그것은
건국 후 Urbs Roma로서도 처음 겪게 되는 최대 강적의 압력이었다. 어쩌면 Etruria
Rex(왕)들이 축출되었고, 힘의 공백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라
볼 수도 있으나 상대가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Greece와는 달리 주변의 족속들과
생존 경쟁에 나서야 했던 Roman은 일치감치 군사적 측면이 강조 되어왔고
이미 신분 투쟁의 결과로 오래전부터 개혁이 진행되어 군대 또한 "중장보병 밀집 대형"
전술의 활용도가 증대 되었던 상태이었다. 또한 상비군적인
성격을 갖추고, 외형적으로는 정복 국가로서 자리매김했으나 사실
기원전 390년 무렵 Gallia가 걸떡 거릴 때만해도 "상호 불가침 평화조약"을
외교 노선으로 정할 정도로 허약한 국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
이러한 시기 갑자기 Italian Peninsula Po River 인근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던
Gallia 족속이 보잘 것 없던 Roman을 치게 된 것일까 !! 그 이유는 간단
하지만 중요하다. Latin League(라틴동맹) 배경을 믿고, Italian Peninsula의
"곡창지대와 소금 생산" 지역을 방어하며, 독점하려는 Roman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개입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Gallia가
신생 로마가 감당할 수 없는 힘(군사력)을 갖춘 강적이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Etruria
People들은 몰아내고 Latin League를 주도했던 Roman은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호전적이었던 Celt = Sens(상스인) 전사들에게 박살나고
말았다. Roman의 영토는 약탈과 방화로 유린당했고, 광장의 12 표법 청동 판은
이때 유실된 것으로 보여 지는데 이로써 "갈리아"는 Roman을 최초로 정복한 이민족이
되었으며, Roman으로서는 역사상 최대의 참극이기도 했다. 어찌되었거나 Gallia People
들은 그저 배상금만 챙기고 철수하는데 급급하였다는 사실은 대략 난감 하지만 Urbs
Roma이 살아날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민중의 권력-평민 화 되었던 귀족 등장 → Populares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Roman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균열(평민→신분 투쟁)의
조짐을 보였고, 배상금도 문제이었지만 그로 인하여 경제적 침체가 찾아왔고,
그리하여 정복활동이 중지된 것이 치명적으로 다가선 때이기도 하며, 토지 부족과
부채에 대한 관습법의 가혹성, 대지주와 소작농들의 이해 충돌 등이 중요한 쟁점이 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Latin League 소속이면서 결코 만만한 세력이 아니었던
"Samnium"이 "로마 인"들의 사정을 파악하고, 가장 먼저 반기를 들게 된다. 그러나
Roma People 들은 "삼니움"정도는 언제든지 상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였다. →
Samnium에게 승리한 후 Campania , Neapolis(= Napoli)를 접수한 이 후→캄파니아
지역 지배권을 획득 하게 되자 이번에는 또 다른 Latin League의 자잘한 세력들이 평화적으로
경제적 분배와 Foedus Cassianum 자체의 수정을 요구하며 도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점력이 강했던 Roman의 입장에서 그러한 조약의 수정은 도저히 들어줄 수 있었던 입장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해결 방식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전쟁이었다. 끝없는 전쟁의
연속이었는데 "삼니움 전쟁"을 치룬지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았던 기원전 340년의 일로서 "로마 인"
들은 또 다시...오뚜기 처럼 일어나 또 다시 동맹도시들의 연합군을 상대로 힘든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여기서 Roma People 들은 참으로 놀라울 만큼 신속한 회복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힘은 어쩐지 과거와는 판이한 차이를 보였으며 거의 Italian Peninsula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는 듯 했다. 참고로 삼니움 족속을 처리하는데 Roman은 집요함을
드러내었지만 실제 3회의 전투 중 한 차례 정도는 산악지재의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삼니움의 창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치욕스런 시기(기원전 321)도 있었다고 한다. →
Samnium에서 분화된 족속(사비눔) → 70년 / 3회 전쟁, The Inexpiable(씻을 수 없는 전쟁)
기원전 338년 전쟁 능력을 상실한 "동맹 시"들은 마침내 강화 조약을 제안
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사실상 백기투항이었던 셈으로 Italian Peninsula 위치는
확고해졌으며, 그들의 앞에는 풍성한 식탁이 차려졌다. 따라서 이제 Italian Peninsula의
패자가 되기 위한 수순으로 마지막 마무리 만 남겨졌다. 그것은 아직도 완전히 복속
되지 않았던 Samnium의 저항을 분쇄하는 것과 과거와 같지 않던 Magna Graecia를 접수
하는 일이었다. 이 후 Roma People 들은 남-북으로 거의 행군하면서 종횡무진(縱橫無盡) 저항
하는 모든 국가들은 모조리 붕괴시켰다. 그렇지만 기원전 295(센티눔 전투 이 후) 앞으로만
내달리던 불굴의 전사들 앞에 생각하지도 않았던 장애물이 들장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장화처럼
생긴 Italian Peninsula의 발굽 모양에 해당하는 부유했던 항구도시 Tarentum(타렌툼)이
Urbs Roma이 새로운 주인이기를 거부하고, 과거의 주인 Greece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Greece는 이미 !! 기원전 338년에 Macedonia에 굴복해 있던
상황으로 이때 Tarentum의 요청을 받아들인 곳은 Greece의 북-서부에 위치한
"Epirus(알바니아)"의 왕 Pyrrhic(피로스)이었다. 애당초에 그는 역사 속에서
Alexandros 사 후... Hellenism 세계를 정복 하려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급작스런 타렌툼의 요청으로 서부-지중해의 상황을 주시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Italian Peninsula의 정복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 중요한 것은 장래 광대한
Empire를 건설하게 되는 Roman 세력과 과거 화려하고 꿈같은 나날을 보냈던 Hellenism
세계의 군사력과 정면(그리스 용병 + 마케도니아 + 알바니아)으로 충돌(기원전 275)
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Pyrrhic는 코끼리를 앞세워 진격하였고 승리를 초기에 확신한 듯
했지만 Greece에서 받아들인 후 발전을 거듭하며 무수한 전공을 세웠던 "밀집대형
전술과 장창"에는 코끼리도 소용없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전쟁에서 승리한 Roman은
Pyrrhic가 물러간 뒤에 Tarentum = Taranto을 접수하며 드디어 기원전 272년 Italian Peninsula의



정치적 영토통일을 달성하였고, 이러한 정복 전쟁으로 얻어진 부수적인 소득은
다양하였다. 우선 땅(토지)은 병합되고 쪼개져 Roman 시민들에게 분배되었고 또한
자치 공동체와 동맹 관계 맺기도 했는데 이러한 동맹은 외형적으로 양쪽 모두
상대방의 요구가 있다면 군사지원을 해준다는 조약을 토대로 하였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현대 국제관계에서 가끔 언급되는 "핵 우산"과 같은 개념으로 이러한 조약이 체결되면
Urbs Roma은 상대를 보호하거나 후원해주는 관계가 자동으로 설정되었다. 때로는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였는데 이러한 경우는 양 공동체의 시민권을 동시에 가지며, "로마 연합"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정복에서 요구되었던 것으로 Urbs Roma에 대한
충성도가 절대적이었다. 반면에 저항하는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시키고, 중립적인 도시는
그저 자치권(Key Word / Monroe Doctrine)만 부여하였다. 기원전 753년 04월 21일 건국하여
우여곡절 끝에 기원전 509 한차례의 혁명적 시기를 보낸 Roman은 무자비한 영토 팽창
의지를 보이면서, 시선을 한곳에 집중 하였는데 얼마 후면 지중해를 피바다로 만들고, 전 지역을
흡수 통합(기원전 3 C)하는 첫발을 내딛게 되었으며, 기원전 1 C가
되면 지중해 전역의 패권자로서 등극하게 된다. 대략 지금까지의 강대국
Urbs Roma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방위와 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국가체제를 조직적으로 대응시켰는데 가장
먼저 Gallia People들의 침입과 내란으로 힘을 상실한 Etruria People를 간단히
기원전 4 C 굴복시켰으며, 이어서 남쪽 Campania(캄파니아) 평야를 차지하고
있던 Samnite People 들과 3회에 걸쳐 전쟁을 벌여 기원전 290년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안정시킨다. 그리고 기원전 270 까지 Tarentum(타렌툼)을 비롯한 Southern-Italy &
Magna Graecia(Sicilia)를 정복하고 동시에 Northern-Italy →Po River 지역까지
진출하여 기원전 265년에 이르러 Rubicon River 이남의 Italian Peninsula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때 정복지의 통치 방식은 Devide et Imperra(분할하여 통치)한다는 수평적 원칙에
따라 서로 예우를 달리 하는 동맹자로 받아들이는 간접 통치 방식을 취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피-정복민들이 상호 단결하는 것을 막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일종의 동족 의식을
갖게 하여 Urbs Roma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시켰다. 또한 Greece Polis들이 외부인에
대한 시민권을 거부함으로써 상호 배타적이고 폐쇄적이 되어 대립과 분쟁을 거듭하였던 것과는
달리 Roman은 주변의 족속들에 대한"시민권"의 확대와 동맹 정책을
통하여 Italian Peninsula 전체를 "Romanized(로마 화)"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지중해 세계 전체를 그들의 체제 내에 통합하였다. 따라서 걸릴게 없었던 Roma-
People 들은 이 후...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꾼 일련의 전쟁을 주도적으로 추진
하게 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Numidia(누미디아)로부터 Gibraltar
해협에서 North-Africa 해안에 걸쳐 있는 Carthago↔Roman 3차에 걸친 Punic War이었다.
.
.
.


Phoenicia의 식민지(기원전 800)로 애초에 수립되었으나 기원전 6 C
Persia에 흡수된 Phoenicia와 단절하고 점차적으로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로
변신하였다. Carthago의 번영은 Spain & Britannia으로부터 나오는 은과 주석,
등의 자연 자원과 North-Africa의 열대성 작물을 중심으로 외국과의 교역에 의존했다.
당시 Carthago는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 3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의 핵심적 권력을
상인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뇌물과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정부의 거의 모든
조직을 통제하고 있었다. 즉 !! 금권을 바탕으로 한 과두 정치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정치적 결함에도 비옥한 농지를 갖추고, 도시는 아름다운 원형의 항구와 더불어
고층의 사원들과 건물들로 가득 찬 Africa의 최대 도시이기도 했다. 또한 어떤 면에서
Carthago는 자신들만의 영혼이 없는 도시이었으나 지중해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적 업적과
호사스러운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고 보여 진다. 참고적으로 Baal Hammon(바알 함몬) &
Tanit(타니트)를 숭배하고 있었는데 알려진 바로는 Tanit(타니트)가 "아기의 살"을 원한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빈번하게 유아 희생 제의를 행하였다. → Carthago(정신) = 상업적 모험과 황금.
피, 쾌락 추구 자 !! 그럼 흥미로운 역사 속의 Roman-Carthago의 대결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하겠다. 사실 "로마 인"의 입장에서 Carthago와 생사가 걸린 전쟁은 그들이
지금까지 겪어 왔던 잔챙이 세력과의 싸움이 아니었다. 또한 가장 지독한 전쟁
이기도 했다. North-Africa 연안에 일찍이 정착한 셈-족 계통의 도시 Carthago는 이미
당대 서부-지중해의 교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최소한 Roman 만큼 어쩌면 좀 더
위대한 위치에 있었던 가장 선진적인 문명을 갖고 있었다. 또한 막강한 물적, 인적 자원은
물론이고, 해군력에서는 거의 적수를 찾기 힘들만큼 압도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Magna Graecia세력과 수세기를 거쳐 오면서 유일하게 승부를 벌이고는 했는데
Roman의 함대가 Messina해협 너머에 집결하면서부터 Sicilia 주변의 군사적 균형관계가
혼탁스러워지기 시작 했다. 일찍이 Sicilia Island In Greece People 들은 끝도 없는 Carthago
와의 분쟁에 Urbs Roma의 힘을 끌어 들이고 싶은 유혹을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일단 분쟁에 꼬여
들어가면서 Republic(공화국)의 원칙은 파기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기원전 264을 기점으로
Roma People 들은 지금까지는 지루하게 소모적인 분쟁을 전면전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Greece 문명의 붕괴를 가져온
Peloponnesos War의 발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Greece 양대 동맹과 무관한
지극히 단순한 지역적 문제로 당시 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었던 도시국가들이 개입 되었으며, 마치
애들 싸움이 어른들 싸움으로 되듯이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갈등 구조를 만들었고...
이것이 화약고가 되어 폭발한 것 아닌가 !! 마찬가지로 Carthago ↔
Roman 분쟁의 초기 구도가 그렇게 의도되지 않거나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Roman의 원로원은 아마도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시 Roman의 사정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폭발 일보직전이었고, 이에 대한 해결 방법을 평민층에서 찾았던 것이다.
"까지 것 인생 뭐있어...한번 붙어 보자 !!" 아마도 Roman의 평민층은 이렇게 생각
하지 않았나 싶다. 다시 말해 무엇보다도 심각한 경제난이 평민들의 모험심을 자극하게
된 것이다. 오로지 "토지" 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던 평민과 농민(하층민)들을 과거에는
정복하여 얻어진 공유지가 풍족하였기에 분배하는 것으로 Control 할 수 있었으나
과밀한 인구 팽창(도시화)으로 토지는 갈수록 부족해 졌고, 점차로 쌓여져 가는 부채에
시달려 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가난한 농민(하층민)들은 빚을 얻어 살게 되었는데 채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자 귀족들의"채무 노예"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은 채권자로서 있었기에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었으며, 상대적으로 평민 혹은 농민(하층민)들은 이러한 빈부의 격차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 회복하지 못하고 사회적 박탈감 더욱 커져만 갔던 것 갔다. 때문에
어떤 돌파구가 필요 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전쟁이었고, 결과적으로 Carthago
와의 전쟁은 평민들이 주도한 전쟁이 되었던 셈이었다. 일견 인류 역사에서 대표적인
정복 활동은 예외 없이 모두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층의 결정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Urbs Roma
의 경우는 다르다, 설명되었듯이 Roman의 정복 활동은 전적으로 평민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 이유는 식민지를 얻어야만 평민들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국력을 키운다는 의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존과 결속을 위한 것이었다. 제국으로서의 팽창은 모든 Roma People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필연적 요소이었다. Greece의 경우 국가건설 주체들이 주로 경제적 동기
(이윤추구)에서 스스로 이탈되어 자발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때 Roman의 식민도시들은 근본적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건설되었으며, 영토 개척을 통해 과잉 인구를 식민화
시킨다는 필요성이 강하게 작동 되었다. 따라서 경제적 동기보다는 전략적인 측면이
두드러졌고, 하나의 예로서 Greece 식민시들이 주로 해안(항구)에 집중되었다면
Urbs Roma의 경우 내륙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 그러한 사실을 증명 해주고 있다.
더불어 Greece의 식민도시들은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해관계로만 묶인 정도이지만
Urbs Roma의 식민도시들은 정치, 군사적으로 본국과 분리될 수 없기도 했다. 그래서 Punic-
War이 진행되는 상태에서도 정복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것이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정복하여 개척한 식민도시들을 이어 주는 돌 벽돌을 수직으로 박아
넣은 방대한 거대한 도로망이 설계되고 실행되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Roman Capua = Santa Maria Capua Vetere" 까지
200 km에 달하는 Via Appia(아피아 가도)이다. 도로의 주 목적은
군대와 보급물의 수송에 있었다. 기원전 3 C 무렵 지중해 세계는 동-서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반도를 중심에 두고 동쪽으로는 문명의발원지이었으며,
전통적으로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지역으로서 Macedonia-Egypt-Syria →
Hellenism 3 강이 지배하던 세계이었다. 그렇다면 정복자 Alexandros가 서쪽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 그 이유는 지리적 잇 점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가 33 살이라는 나이에 요절을 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만약 Alexandros가 최소한
10년만 더 생존했어도 Roman-Carthago 세력이 서부-지중해 지역을 양분하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역사 속에서 탁월한 정복자로 남겨졌던 Alexandros는
지구상에 없었다. 그리고 당대 서부-지중해의 패권은 Carthago가
쥐고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실제로 Roma People들은 기회가 오면 신흥 시장(서부-지중해)으로 언제든지
진출하고자 했다. 반면 기원전 4 C 이 후 Hellenism 세계를 통합한 동부-지중해는
무역 도시들로 인해 포화 상태에 있었는데 당시 Carthago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던 강역은 Spain-Corsica-Sardegna-Malta-North Afica-Afica(중부, 콩고)의
미개발 지역 까지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나마 Urbs Roma 이전에 견줄 수
있던 세력이 Magna Graecia이었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구도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중해로 진출하고자 하는 Urbs Roma의 승부욕이
불타올랐고 가장 먼저 곡창지대 Sicilia를 손에 넣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을 법 하다. 따라서
어차피 맞서야 하는 상황이고 명분만 갖추어진다면 언제든지 선방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싶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긴 것은 Sicilia이었다. 당시 Roman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지중해 진출을 꾀하기는 힘에 벅찬 것이 사실이었다. "반도
통일"을 이룬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상대는 그렇고 그런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그들의 용병과 기병의 전투력은 이미 지중해 전역에 명성이 자자했던 때이기도 했다.
더구나 Roma People 들은 반도 통일 이전 까지 Carthago와 대외적으로 평화적
조약을 통한 선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여 진다. 조약의 내용은 Roma-
People들이 서부-지중해무역에 진출하지 않는 대신에 Italian Peninsula의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Roman에게 명분과 실리를
가져다 준 것은 서부-지중해 완충지역으로서 양측에 전략적 가치가 높았던 Sicilia이었다. 즉 !!
Messina & Siracusa 간의 싸움이 벌어지면서 한쪽이 Roman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그나마
묶여 있던 족쇄를 풀어주게 되었다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 속의 Punic War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기원전 217년 이 후 "Lake Trasimenus(트라시메누스 호수)"
에서 30,000명의 Roma People들이 전사한 대참사 이 후 절망적인
외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Hannibal ad Portas(한니발 아드-포르타)
"Hannibal이 성문 앞에 있다." Roma People 들로서 "굴욕"적인 현실이기도 했다.
.
.
.


Punic War은 “카르타고-로마”의 전쟁이기도 했으나 Gens Scipio-Barcr
가문의 대결이기도 했다. 20년에 걸친 전쟁(First Punic War)에서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은 Roma People 들이다. 더구나 내륙에서 이뤄진 전쟁도
아니었기에 Carthago의 충격은 컸을 것이다. 반면에 Roman은 강력한 해상 국가를
물리쳤다는 경험이 미래에 대한 자신감으로 연결되어 사기가 충천하였고, 정복
전쟁에서 커다란 전환점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일단 1 차전은 Roman의 평민들이
승리한 전쟁이기도 했다. 이 후 내륙에서 대패하는 아픔(본토 공략 실패)도 있었으나...
Sicilia에서 전개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단 우위를 점하게 되었으며,
중요한 것은 배상금과 전리품으로 Sicilia는 물론이고 Corsica-Sardegna-
Siracusa를 확보하게 되면서 최초의 속주를 거느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식민시 정책은 Roman의 기본적인 식민지 경영체계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또 다른 사실은 대규모 함대를 육성해야한다는 자각과 함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일정 규모의 함대를 보유하였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경험이 축적되었으며, 뒤이어 벌어진 제 2차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동기부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반면에 뜻하지 않게 처참하게 패전하고, Sicilia를 빼앗겨
불확실해진 Carthago의 전략적 무대는 이제 Spain 땅이 되었으며, 기원전 237년
최고 장군 Hamilcar Barcr는 당시 9 세이었던 Hannibal을 데리고 삼림지대 곳곳에 떼 지어
살던 난폭한 족속들을 휘어잡으면서 "귀금속 채굴"에 나서 이를 바탕으로
8년의 기간 동안 번영하는 국가 기틀을 마련하고 상당한 규모의 방어 군을 양성
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Sicilia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그는 이번에도 불행함으로 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인지 모르나 기원전 229년 배후에 Roma People들의 간계가
있었음직 한 죽음을 당한다. 이로써 Hamilcar Barcr(하밀카르 바르카)아들이기도 한
Hannibal과 "로마 인"들은 철천지원수로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절치부심"26살의 나이로
Carthago의 최고 장군으로 성장한 복수심에 불타는 "한니발"장군은 점차로 Roman을
향해 압박해 들어가면서, 어떤 환상도 배제했다. 또한 무조건 전면전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고,
Urbs Roma을 철저히 파괴시키지 않는다면 승리는 없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기원전 218년 Hannibal이 이끄는 Carthago 군대가 Spain → Gallia(남부) 즉 !! 현재의 France
남부 해안을 끼고, French Wine의 본고장 Rhone River 유역을 거쳐서
Alps Mountain(브리앙송, 몽제네브레 고개)을 넘어 간 것은 이와 같은 전술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장군은 일반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
넘는 전술로서 "로마 군단"에 접근 했으며, "티치노 강 평원, 트레비아 강 좌안"
전투로 North-Italy(= Gallia Cisalpine)지역을 획득하고, "한나발 원정"의 전환점이
되었던 Lake Trasimenus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더욱이 Battle of Cannae
(기원전 261)에서는 로마군단(Legion) 여덟 개를 전멸시켰는데 이것은 Roman Republic
역사상 최악의 패배이었으며, Roman의 피의 가문들이 몰살할 지경에
이를 정도로 그 파괴력은 엄청난 현실을 동반하였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Hannibal 에게도 고민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장 커다란 고민은 Italy(남부)로
진격하면서 멀리 떨어져나간 병참선(보급) 문제로서 도시 Capua에 교두보는
확보했으나 마지막 한방을 날릴 수 없었다는 것인데 그러한 고민은 Punic War(2차)의
Key Word이기도 했다. "보급이 없는 상태"에서의 전쟁은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시적 혹은 단기적으로 더 이상의 진격을 유보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이것이 패착이 되었던 것이다. 반대로 Roma People 들은 지루한
치고... 빠지는 전술(Qunintus Fabius Pictor)을 구사하면서 전력을 재-
정비하는 시간을 벌었고, Hannibal과 싸우는 법을 터득하였으며, 새로운
영웅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웬만해서 그런 치명적 패배를 당하면 당대의
관례상 Hannibal의 승리를 인정하고 평화협상을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Roma People은 실제로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을 받아들이라는 권유를 받아
들이지 않았고, 파국에 직면해 있어서도 두려움을 갖고 있었을지언정 그들은
지속적으로 도전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순간에 당연한 일이었으나 Roman의
최고위층들은 Sibyl(시빌)의 예언서에서 조언을 구하면서 Carthago Army와
전면적으로 붙어서는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때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꿈을 꾸는 난세의 영웅의 용틀임이 시작되었다. "장강"의 앞 물결이 뒤의 물결을
후려친다고 했다. Battle of Cannae 전투 당시 19 살의 Scipio Africanus는 그의 부친과
삼촌이 열어둔 Spain 영토를 발판으로 공격을 가하며, 이렇게 해서 600년 동안 지속
되는 Spain 지배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Scipio Africanus 그는 자격을 갖춘 영웅이었다.
한때는 자신의 개인적 우상이기도 했던 Hannibal의 초승달 포진을 모방하여
역으로 Spain을 정복하고 개선하였으며, 이러한 시점부터 대체로 일방적이었던
전황을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했고, Hannibal은 Italy(남부)에서 고립되는 위기에 처해
졌다. 여기서 한때는 항복을 권유했던 원로원은 총 공격을 주장했으나 Scipio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하였는데 그것은 받은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한니발"이 Pyrenees-Alps Mountain을 넘어 예상치 않았던 공세를 취한 것처럼
이미 Spain을 접수한 상태에서 Carthago 본토를 공약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Scipio는
원로원의 불신을 신뢰로 극복하며, "전쟁의 신 마르스와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에게
집정관 자격으로 제례를 올리고, Carthago로 함대를 띄우게 된다. 그는 기원전 204년 North-
Africa 해안에 상륙하였으며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Carthago를 유린하였다. 이제
"한니발"도 더 이상 Italy(남부)에만 머물 수 없었고, 그것은 Carthago의 부패한 상인귀족
들이 원하는 바도 아니었다. 그래서 역사 속의 두 영웅은 기원전 202년 "자마 평원
(Second Punic War)"에서 숙명의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양측의 병력은 비슷했으나 기병을
좀 더 많은 수 확보하고 있던 Scipio가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이렇게
해서 한니발의"초승달 포진"은 기병 전술에 막혀 무의미해 졌고, 코끼리 부대는
Roman의 나팔 수 들에 의해 힘을 쓰지 못했다. 마치 과거 공화국이 "Epirus(알바니아)
의 피로스”의 침입을 막아내었던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1차전에서 내분으로 Urbs Roma에
예상치 못한 승리를 안겨 줬던 “백전백승”의 Carthago의 용병들은 Scipio의 충성도 높은
기병과 보병 앞에서 그들의 전투 기량이 발휘되지 못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전쟁의 승리 이 후
Urbs Roma은 평화조약이라는 미명 하에 Carthago를 무장해제를 시키고,
다른 국가와 전쟁을 금지하였으며, 막대한 전쟁 배상금마저 물렸다. 그러나
이것으로 전쟁은 종결 된 것이 아니었다. "로마 인" 들은 그들의 땅에서
벌어진 Battle of Cannae에서의 패배를 되새김질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상당한
시간이 흘러 잊을 만 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어쩌면 "한니발"이라는 인물
보다 전쟁에서의 패배 자체를 그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더불어 "한니발" 또한 그렇게 쉽게 잊혀질만 한 인물이 아니었던 셈이었는데 그들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 주었기 때문으로 오죽했으면 그들의 심장부에 동상을 세워 무려
수 백 년이 흐른 뒤에도 그날의 치욕을 기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제 잔인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Second Punic War 이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이제 Carthago...


배상금을 모두 갚고, 또 한번의 비상을 꿈꾸고 있을 때이었다. 바로 !!
그런 순간 공화주의자이기도 했던 "Cato"의 선동적이며 정치적인 연설이
파장을 일으켜 도저히 Carthago를 묵인할 수 없게 되었다. 자 !!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전쟁이었으나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자신들의 속국이었던 Numidia를
부추겨 Carthago를 공격하도록 만들었고, 여전히 타국과의 전쟁 금지조항(Casus-
Belli, 전쟁의 빌미)에 묶여 있던 Carthago가 방어와 공격을 시작한 것이 결과적으로 조약
위반이 되면서 또하나의 전쟁이 기획되어진 그대로 실행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Urbs Roma에게 명분을 챙겨준 "꼴"이 되면서 거의 학살에 가까운 만행으로 Third Punic-
War은 시작되고, 순식간에 끝난 셈이다. 그들이 주장한 것처럼 잠재적 적국으로 전락한
Carthago는 유적지에서 동맹이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소생 불능의 황무지화 되었으며, 역사
속에서 Roman의 공격은 그만큼 잔인하고 일방적 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훗날 그 와중에
불타오르는 Carthago의 도시를 배경으로 총사령관이었던 "Scipio Aemilianus의 눈물"이 서정적인
수준에서 묘사되었으나 아마도 대다수 Roma People 들은 정복된 땅에 "Salt..."을 뿌렸을 것이다.
이제 Carthago는 지상에서 사라졌고, Roman는 전설적인 번영을 누리게 된다.
또한 진정한 승리자는 Scipio 가문이 되었다. 반면 패장 "한니발"은 지중해 일대를
떠돌면서 망명 생활을 하며, 기원전 184 역사가 Plutarch가 묘사한 대로 말기에는 너무
늙어 버린 한 마리 새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평생을 "로마 인" 들의 증오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스스로 독배를 마시고 자결(64 세)한다. 흥미롭지만 같은 해 Scipio Africanus도
죽음을 맞이한다. 공식적으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받고 추앙되었지만 권모술수
(權謀術數)가 난무하던 정치판은 그에게 전장보다 혹독한 곳이었으며, 결국 그는 뇌물을
받았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고발 당했는데 아마도 그 또한 자살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훗날
그의 양자이기도 했던 Scipio Aemilianus도 Tiberius Gracchus개혁이 추진되던 시기에
그의 아내와 Roman의 서자(노예와 새롭게 시민권을 획득한자)들의 공모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
.
.


결과적으로 생사가 걸린 전쟁에서 Roma People 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해상을 장악하는 힘(해상의 권력)이 Roman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니발"이 Italian Peninsula에 10여년간 머물며 소모전을 벌이면서도 그 어떤 소득도
없이 없었던 것은 당시 !! 강력하게 부상한 Roman 함대의 해상 봉쇄로 본토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비록 Macedonia와 연합 전선(Philippos 5세)을 구축
하는데 성공하기도 했으나 본국의 보급이 전무한 상태에서 모든 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었던
것이다. 해상이 봉쇄 되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있었을까 !! 참고로 "한니발"은 정복 전쟁
초기에 Macedonia-Carthago-Spain의 전력을 가동하여 Italian Peninsula를 삼면에서 압박
하는 전술을 추진하고 있었고,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해상 강국이 되어버린 Roman의 함대 앞에서 기본적인 전략과 전술 구도가 물거품이
되었던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Punic War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 기원전 190년 부터
이미 "로마 군단"은 동시 다발 적인 전쟁을 수행할 정도로 패권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들은
Asia로 몰려 들어가서 지방 독재자들의 전투 조직을 파괴시켜 버렸으며, 당시 그러한
지역의 강대국 Egypt-Syria는 알아서 머리를 조아리며 공화국의 지배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그저 Roman은 제한적이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Macedonia-Sicilia-Spain를 비롯하여
기원전 140년경에 이르면 로마 본토에서도 낯 설은 먼 지역까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고
패권적 힘이 강성하게 확립되어 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Carthago의 패전은 Urbs-
Roma의 패권적 힘 앞에서 어쩌면 당연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결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Cartago의 본토 공략과 함께 맞물려 Roman의 패권적적 행보(기원전 149)는 도시가
있던 장소에 누구도 도시를 세울 수 없다는 경고와 함께 메아리치게 되었는데 Cartago를
황무지로 만든 사실은 특히 주변의 Greece 도시 국가 들로서는 엄청난 현실이 되어 다가선다.
아울러 점차 제국주의적인 전쟁으로 숨 가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갔는데 이 후
Roma People 들이 발 빠르게 정복의 움직임을 보였던 곳은 Oyster의 산지Adriatic Sea
(아드리아 해)를 가로질러 도착한 Balkan Peninsula이었고, 그곳에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지
못했던 Greece & Macedonia가 있었으며, 가장 먼저 Greece People 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주지시키는 작업부터 시작(기원전 146)하게 된다. Titus Quinctius Flamininus(티투스 큉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기원전 197 Cynoscephalae 언덕에서 Philippos 5세로부터 Achaean League
해방시킨 이 후 한참 지난 일로서 즉 !! Roma People 들이 확립한 세력균형의 원칙을 남쪽의 Greece-
Polis 들에게 알린다는 것으로 시작하기 무섭게 끝나버린 전쟁에서 Greece는 참담하게 패하고
말았다. 대표적으로 Corinthos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돌무더기 신세로 전락되었고, 약탈된 도시에서는



엄청난 전리품과 전쟁포로(노예)들이 확보되었다. 더불어 순식간에
지중해의 도시 두 곳을 파괴시킨 사실은 경악의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후
잠시 "한니발"과 동맹을 구축하기도 했던 Macedonia는 4개로 쪼개져 200년
동안 지배 당하게 된다. 또한 집요하리만치 잔인하게 진행된 대소 전쟁의 출발을
알리고, 가해지는 압박전술은 단지 !! 영토의 병합 차원이 아니라 평화유지를 위한 명분을
내세워 전개되었으며, Roman Republic의 위상을 각인시키는 노림수가 배경에서 작동
되었다. 대략 이러한 시기부터 Roman의 도로망이 거의 윤곽을 드러내었는데 "돌과 자갈"로
이루어진 "Via Egnatia(비아 에그나티아)"는 Balkan의 황무지를 관통하고 Adriatic Sea →
Aegean Sea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연결시키게 된다. 이러한 도로는 Greece & Roman을
완벽하게 연결시켜 주었으며, Aegean Sea 푸른 색 너머에 있는 지평을 열어주는 출구가
되어 주었다. 더불어 그 너머에서는 "금과 대리석"으로 번쩍이는 도시, 예술과 철학 사상이 공존
하는 도시들이 특별한 저항도 없이 Roma People들을 맞이하여 주었다. 앞서 설명 되었듯이
기원전 197 -Macedonia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 Greece는 기원전 146 "자유와 평화"를 상실한다.
같은 시기에 Cartago의 식민지령은 모조리 Roman Type의 속주(Afica)가
되었으며, 양다리 걸친 Celtiberia People(켈티베리아)들에게 Roman의 존재를 존중
시키기 위해 기원전 133 Spain-Numantia(누만티아)가 불태워진다. 그러는 동안
지중해 반대쪽에서 "페르가모의 왕"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왕국을 고스란히 Urbs Roma에
바치는 역사상 드문 일까지 벌어졌다. 이리하여 Roman은 화려한 도시 Ionia →Ephesos
(에페수소)를 차지하며, 기원전 125년부터는 Gallia로 눈을 돌렸고, 그곳에도 Provincia
(프로빈키아)는 어김없이 건설되었다. 따라서 당대 국제적인 세력 판도가 이렇게 바뀌자 정복을
계속 할 때마다 Roman의 "부와 권력"은 더해갔다. 더욱이 Roman의 팽창은 기원전 396년
"티베르 강 계곡"의 통제권을 얻기 위하여 경쟁자 Etruria People의 도시 Veium = Veio을 10년간의
포위 끝에 파괴시키고 얻어진 "부"가 현실화 되면서 지속된 것이기도 했는데 경제적으로는
사실 이러한 시기만 해도 도시 시민들의 생활이 그저 농업만으로도 충분히 유지되고, 이미 !! Urbs-
Roma는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참고로 습지를 통해 경작지를
얻은 Roma People 들에게 배수 기술은 필수적이었는데 이들은 실제로 운하체계(Cuniculi)를 설계
하였고, 활용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Urbs Roma 최초의 곡물 공급지 → Tiber River의 동쪽의
Rus(시골, 영역)과-서쪽의 야니쿠룸 언덕과 바티칸 언덕을 포함한, 지역이었으며, 훗날 대부분은
Latium 평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곡물 경작이 농업의 근간을 이루었고, Fresh Vegetable
또한 재배되었으며, Greece 농업의 영향으로 Grape & Olive Tree 재배가 전략적인 환금 작물로
취급되었다. 반면에 산간 목초지 에서는 "소와 양" 그리고 숲지대 등에서는 Pork가 사육되었다고 한다.
.
.
.



어찌되었든지 기원전 2 C-기원전 1 C경에 이르면 Urbs Roma
도시의 보물 창고에는 Gold & Silver로 살찌워 졌고, Empire의 모습을
변해가는데 동시에 많은 전쟁 포로(노예)들이 도착하였다. 나열해 보면...
기원전 201-35,000 → Cartago People, 기원전 177-1,700 → Corsica People,
기원전 167-150,000 → Macedonia People, 기원전 104-140000 →Cimbri(킴브리) /
Teutoni(테우토니) People 따라서 이러한 많은 자산과 노동력을 이용하여 기원전
2 C 부터 Greece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과 대등해지려는 야망을 가지고 훗날 위대한
도시에 걸 맞는 건축물과 신전 등을 세우게 된다. 또한 이러한 시기 건축된 모든
건물이나 장소에는 One’s Initials of SPQR 이라는 선명한 글자가 새겨지게 된다. 한마디로
원로원과 민중의 동반자적 의미를 강조한 상징성을 갖는 뜻으로서 Roman의 법체계
장엄 함을 나타내는 가장 "로마적인...Initials이라고 할 수 있고, 어디서나 눈에 띄는 것이기도 했다.
.
.
.

The Stranger / Billy Joel

# by | 2009/10/14 02:01 | History ...Package | 트랙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