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ncient Near East ...Monotheism !!

Pharaoh Necklace
Republic Into the Roman Empire
Sky, Sun, Star & Night, Daylight...가 바뀌는 것은
인간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한 현상을
"종교"를 통해서 설명하고자 하였고, 인류 최초의
과학이기도 한 천문학은 천체를 관찰하는 것에서 출발
하였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관찰 내용을 문자로 기록
할 수 있었고, 그것을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곳에서
"천문학"이 탄생되었다. Middle East 혹은 Central America의
도시국가에서는 왕의 주변에 사제이면서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아마도 그들은 "마법사
혹은 샤먼"
의 후손일지도 모른다. 그 이유로 Old People 들은
종교와 세계(세속)에 대한 지식을 양분할 수 없었던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Greece-China-India 등지에서는 신에게 벗어나서
세계와 인간에 대해생각해 보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한
생각을 시도한 사람들이 바로 새로운 지식의 발명자들이었고,
결과적으로 과학, 철학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것은
이전과 다른 시도라는 명백한 사실과 함께 그들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즉 !! 상호 교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이 발명해낸 것들은  "문자"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진보적인 생각이 현실화 되기 위해서는 각 지역마다
문자가 있어야 하였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인류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였지만 거대한 진보를 이뤄 왔던 사실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현재에 이르러 과학자, 철학자를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으나 예전에는 철학자가 물리학자이며,
수학자이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세계(세속)에
대한 Phusis(퍼시스)로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 성찰이 되는 동시에 이뤄졌던 것이다. Greece Language로
Philo(필로스)는 친구를... Sophia(소피아)는 지혜를 뜻한다.
따라서 여기서 유래한 철학 Philosophy(필로소피)"지혜의 친구"
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위대한 철학자, 학자, 현인들은 이미 !! 오래전부터
문자가 사용되던 모든 곳에 출현하였으며, 그들의 사상 또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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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habet & Animal
Alphabet Story

http://redbeans.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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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문명"이 유럽 문명에 물려준 커다란 유산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Christianity & Alphabet" 의 기원이
동방에서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서방 역사가들은 축소하고 있다.
그렇지만 Orient에서 보다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실용화 되었고,
유럽으로 건너온 이후 커다란 변형과 발전을 거치면서 완전하게 뿌리를
내렸다는 점은 인정하여야 할 듯싶다. 그러나 "종교와 문자"
"Orient" 에서 생겨나 유럽에 전해졌다는 사실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즉 !! "Christianity"  → 동양에서보다 "Europe" 에서 발달하였으며,
Alphabet → 역시 !! Greece... 문명에 전달되면서 비로써 Phoenicia "상인"
들의 매출장부에서 기록되던 "기호의 수준" 을 넘어 서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면 새로운 "종교와 문자" → "Orient" 세계에 존재하던
기존의 것들을 결코 넘어서지 못할 만큼 우수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최초로 문명의 빛이 탄생한 지역에서는 이미 !! 오래전부터 믿어오던 종교와 사용
해오던 문자가 있었으며, "Alphabet" → 탄생하였을 때 "Orient" 세계에서는
"설형문자(쐐기문자)"가 지배하고 있었고, "Alphabet" 의 경우... Phoenicia People
들을 비롯하여 "Hebrew & Arab People" 들이 사용하는 언어이기도 하였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Assyria, Persia" → 공식적으로 설형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문자 기호" 가 수도 없이 많고,
지역마다 어휘도 다른 "설형문자" 보다... 손으로 꼽을 만한
공통된 문자 기호만으로 표기한 "Alphabet" → 지배적이지
못했던 사실이다. "Orient" 보다 후진적이었다고 보이는 Minoan
& Greece Mycenae Civilization
에서 사용한 선형 A 문자,
선형 B 문자도 "문자 기호" 가 쉽게 인지할 정도의 적은 수로 구성
되어 있었다. 따라서 "설형문자" 보다는 좀 더 유리하게 작용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의 가치관을 현실의 인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문명의 초창기에 문자라는 것은 일종의 "마법"과 같은
것으로서 아무나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현대 사회와
다르게 문맹률이 높을수록 좋았고, 문자는 소수 특권층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사회가 건강해 질 수 있다고 최고 권위의
지배 세력은 믿고 있었다. 기원전 5 C → Greece... 도시 국가를 침략하였던
"Persia → Darius" 는 절벽에 새긴 Behistun(베히스툰) 비문을 일반인만이 아니라
"필경사" 까지도 내용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새로운 설형문자로 기록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Tutankhame
Darius
Pharaoh Amenhotep
Old Egypt... "상형문자"도 원래는 종교적
용도를 지닌 "성용문자" 이었고, 여기서 나중에
민간의 용도로 사용되는 "민용 문자"가 갈라져 나오게
되었으며 "상형문자" 를 뜻하는 "Hieroglyph" 에서 "Hiero"
라는 말 자체가 "신성하다"라는 종교적 색채를 포함한다.
이렇게 문자가 달랐기에... "Alphabet" 는 아무리 사용
하기에 편리해도 지배적인 문자가 될 수 없었던 이유가
되었고, 이 후 어느 시점에 이르러 "Alphabet"문자가
일부 도입되기 시작한다. 사회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인
영역에서는 "설형문자" 의 위치가 단연 최고이었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는 고대 설형문자(쐐기문자) 문헌들 중에는 좀 더 연대가
오래 된 "Shumer = Sumer" 의 문헌만 남아 있을 뿐 그 보다 후대라고
할 수 있는 "Assyria, Persia" 문헌은 드물다. 그러한 이유를 학자들은
설형문자가 "Alphabet" 으로 대체되어 폐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필기재료(종이)" 를 착각한 탓이다. Sumer →
문헌은 점토판에 기록된 덕분에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지만 반면...
후대의 설형문자는 세월이 흐르면서 썩어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Alphabet" → 문자기호도 설형문자(楔形文字)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이러한
점은 무엇보다도 문자 기호의 형태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성형문자는
말 그대로  "첨-필"로 점토판을 긁어서 표시하고, 불에 구워 문서를 만들었다면
이집트의 상형문자 혹은 "China" → 한자와 달리 문자기호들이 대부분 원형이나 곡선이
아니라 세로로 뻗치는 모양을 취한다. 이것은 현재의 Alphabet 문자에 여전히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A → Z...까지 철자의 모양을 살펴봐도 "가로 획"
중심의 "문자기호" 는 없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는
점이다. 문자에도 종교적의 영향이 깊게 작용할 정도라면
Orient Civilization 세계는 "종교"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던
사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의 틀이 꽉 짜인 체계 속에서
모든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조화롭게 전체를 이룬
체제를 말함이다. 특히 이집트는 문명의 발생기부터 "중근동
지역"에 격변이 발생하는 기원전 10 C → 이르기 까지 수 천 년
동안이나 거의 체제의 변화 없이 존속되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전통이
썩어 문드러진 것은 나쁜 환경이라고 볼 수 없지만 기존의 층이 너무
두터워서 새 것이 자라날 틈이 없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 그 점에서
"Orient Civilization" → China 문명과 흡사한 구석이 있었다.
다시 말해 너무 일찍 꽃을 피워 번영을 누렸던 탓에 중심만을 보존
하는데 급급하여 문명권의 확대를 꾀하지 못했다는 점이 특징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영원불멸할 것 같았던 세계에도 변화의 물결이
파도를 치는데 그것은 기원전 13 C 무렵...Orient 에서 여타
다른 종교들과는 탄생부터가 "오묘한 종교" 가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One & Only God 신앙을 고수하는 위대한 →
"Judaism" 이다. Egypt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Jews People → "Moses"
에 의해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구체적으로 형성된 가장 강력한
"Judaism" 의 특징은 "Monotheism(유일신) 신앙"이라는 점에 있었다.
이전 인류 역사상 "Monotheism" 을 섬기는 종교는 거의 없었다. 그밖에
"Orient" → 세계 종교들은 예외 없이 "다신교" 이다. 뿐만 아니라 오래전...
유럽의 → Christian → "Olympus 12 신" 을 비롯한 많은 신들을 섬겼다.
그래서 "Orient" 세계의 고대 문헌에는 "신들의 계보" 즉 신 통 기(神統記)를 기록한 것이 많다.

신 통 기(神統記)... 기원전 8 C 그리스의 "Hesiodos
(헤시오도스)" → 쓴 서사시로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 저작도
Orient 세계의 신 통 기(神統記)에 영향을 받았다. 신들 간에 서열이
있었고, 최고의 신은 하나이었지만 "일신교" 유일 신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기원전 15 C Pharaoh Amenhotep(아멘호테프) 4 세가
종전의 다신교를 폐지하고 Monotheism → "Aten(아텐)" 을 섬기는 "종교개혁"을
단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종교개혁"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사후 "신" 으로 섬겨지는 대신 "이단"으로 몰리게 된다. 공교롭게도 그의 종교
개혁을 무효화한 인물은 "Gold Mask" → 주인공 그의 사위 Tutankhamen
(투탕카멘) 이었다. "Judaism"  창시한 "모세"가 이집트 왕궁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Moses → "유일 신앙" 이 어쩌면 200 년 전 "Pharaoh Amenhotep" 에게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당시까지 유일 신앙의 분위기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거나 둘 중 하나 일 듯싶다. 동쪽의 "India People" 들의 "신" 은 수 천 수만을
헤아릴 정도로 진정한 "Hinduism(다신교)"도 들이었다. Mesopotamia-Egypt-Greece-
India
의 고대 신들은 성격과 역할이 정해져 있어서 이름만 다를 뿐 거의 엇비슷한 위계로
구성되어 있다. "Gilgamesh" 의 Ishtar(이슈타르) & Greece 신화(神話) → Aphrodite(아프로디테)
& Dionysos, Egypt 신화(神話) → Osiris(오리시스)처럼 사실상 같은 신이 지역에 따라
명칭만 바뀐 사례도 많다. 그런 점에서 신들의 위계 혹은 역할 배분도 없이 오로지
하나의 신들만 존재 한다고 본 "Judaism" → 확실히 세계적으로 혹은 시대적으로 특이한 종교이다.
Mesopotamia Male Worshiper
Babylonian Exile

Rosetta Stone !! (신성한 문자 해독의 열쇠)
기원전 2 C 제작되어 18 C... "France" 의 손에
들어갔다가 현재는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높이 114 cm 돌에 비문에 문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어 Egypt... 상형문자의 해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용문자 이외에 민용 문자와 "Greece" → 
문자도 있으며, 비문이 해독된 결과 상형문자도 단순한
그림문자가 아니라 일종의 "Alphabet" 문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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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문제는 유일 신앙이 배타적 종교라는데 있다.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자 말라!! " 이것이 Ten Commandments
(십계명)
중 첫 번째 계율이다. Egypt... 노예로 존속되다가 Canaan
땅으로 와서 기존의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내몰고, 국가를 세웠어야 했고,
"다신교" 세계의 한복판에서 "일신교" 를 뿌리내리게 하고자 하였던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엿볼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유대 민족의
대동단결(大同團結)을 위해서는 필요한 조치 아닐 런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Jews People 들은 살아남았고, 그러한 모험은 성공적이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수 천 년 뒤 그 땅에 선민의식을 창조하고 어찌되었거나 State of Israel
건국했지 않은가 !! 또한 현실적으로 험난하였지만 최소한 유대인들로 출생한 이상
"내세의 구원"을 받게 되었다. → 고난에 찬 현실 자체가 유대인이기에 겪는 일종의 특권의식 작용

Babylonian Exile(바빌론 유수), Roman Empire(성전 파괴)
현실 속에서 "유대인" 들은 민족이 강제로
억류되고,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 속에서 "내세의
구원"에 앞서 현세의 설움이 사무쳐 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내세가 아니라 현세의 Messiah(구세주)
기다리게 되었다. 배타적인 종교가 그렇듯이 수난은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굳게 하였다.
다만 문제는 그러한 신앙이 점차로 "유대 민족" 안으로 굽어
드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Jewish Rabbi" 들을 거부
하고 새로운 교리를 설파한 유대인이 출현 하는데 그가 바로
"Jesus Christ" → 이며, 그의 거룩한 이름을 채용하여 생겨난
종교가 "Christianity" 이다. "Judaism" 은 유일 신앙을 확립하였고,
이를 모태로 생겨난 "Christianity" → "포교"를 기본교리로 내세운 종교이었다.
Meah Shearim Street
Jesus Christ
Batsheva Dance
즉 !! "유대교"는 "유대민족" 내부에 대한 공략으로
"민족적 결속"
을 다졌지만 거기서 갈라져 나온 "Christianity" →
전략적으로 외부에 까지 확대되고 자생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올바른 "신앙생활" 이라는 것은 자기 혼자만
계율을 지키고, 기도하며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것을 추가하게 된다. 유사 이래
이처럼 공격적인 포교 종교는 없었다. 당시 세계의 대다수는
여전히 "다신교" 를 믿었지만 그것은 종교라기보다는 "생활양식" 에
가까웠다. 신들이 내린 엄한 계율도 때로는 "생활수칙"에 불과하였으며,
그에 비해 "유일신"은 강력한 "Charisma" 적인...권위를 지닌다.
유대교의 신은 다른 Orient-Greece의 신들처럼 경박하게 처신하지 않으며,
근엄한 태도와 품위를 잃는 일이 없다. 그러한 신의 아들 "Jesus Christ"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이러한 사실은 일반 대중들에게 엄청난 호소력을 발휘하였고, 엄숙한
존재로서 신은 이제 가벼운 존재가 아니라 지엄한 존재로서 다가선다.
Greece-Roman Empire...시대의 신은 그에 비하면 인간적이었으며, 민주적이었다.

신들은 변덕스럽고 자기들끼리도 다투는가 하면 때로는
반역도 감행하였다.  "Zeus " 자신도 "천상의 반역" 을 통해 최고의
신의 자리에 올랐다. 현재 낯익은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의 종교,
지고의 절대적인 존재라는 관념은 바로 "Jesus Christ" → 더불어
생겨난 것이다. 최고의 절대자답게 "Christianity" 의 신은 절대적인
권위로 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의 가르침을 전하라고 명한다. 물론 !!
"Christianity" → 유일한 포교의 종교는 아니다. 그보다 500 년 앞서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佛敎) 역시... "포교" 의 종교이다. 하지만 불교는 신앙을 강요
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신 자체"... 없다. "Christianity" → 탄생할 무렵
불교(佛敎)에서는 "신의 부재" 에 한계를 느끼고, "Gautama Siddhartha
(싯다르타 고타마)"
를 일종의 신적인 존재로 포장하여 공격적인 포교에 나선다.
대략 전래된 Route... India → Southeast Asia → China → 한반도
(韓半島) → Japan
이며, Far East(극동)의 불교의 경우 일찍부터
이 지역은...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들어섰기 때문에 "호국불교" 양상을 취하였다.

때문에  "호국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던 귀족
계층에게 파급되었고, 널리 보급된 적이 없었다. 이 후...
불교(대승불교)가 대중 속에 파고 든 것은 지배층을 모방한 것이나
대안에 없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접해진 것이다. 그에 비하여 고난의
민족이 가진 신앙(유일신)에서 발원한 "Christianity" → "Roman Empire"
으로 건너가 초기에는 지배계층이 아니라 "평민" 즉 !! 피-지배층의 마음
속에 급속히 파고들었다. 그렇지만 Christianity의 정착은 어느 개인의
의지로서 이뤄낸 성과가 아니었다. "현실의 고난" 내세워 지복으로 대체하는
"Christianity" → 교묘한 교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헌신을 이끌어내었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치는 "순교"는 그 전까지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종교적 열정에 비롯되어진다. 그리하여 성인들의 전설과 같은 포교 사실이
또 다른 포교의 소재를 제공하면서 "성인" 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은 유럽 각지에서
초기 Christianity → "포교" 에 결절정적인 공헌을 이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일 신앙이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이라고 해야 될지 모르지만 단점이라고 할 만 한 것들도 존재한다.
Siddhartha Gautama
Mattukarar Community Village In Nagapattinam
Siddhartha Gautama
우선 "교리의 정착" 이 쉽지 않았다. 모든 종교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신에 대한 해석인데 "다신교"
라면 "신" 에 관한 해석이 다양함으로써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신이 여럿이기 때문에 그러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일신앙" 은 단일한 신의 성격과
위상 역할을 두고 까다로운 논쟁과 이견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Christianity" 초기에..."Roman Empire" 에 의해 탄압을 받던 시절에는
이견이 존재하였어도 교세를 확장한다는 일념으로 그저 그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슬쩍 비켜 갔지만 "Edict of Milan(313 → 제국의 공인)"
받고 "교세가 확장" 되면서 어떠한 정리의 필요성에 대해 압박이 현실화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소집된 것이 Council of Nicaea
(325)
이었다. "Judaism" → 에서는 오랜 민족적 수난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구세주의 이념이 성장하였으며, 그러한 구세주의 등장을 예언하고 신의 말씀을
대중에게 전하는 "예언자" 의 전통이 있었다. 그런데 "Christianity" 에서 혼란을
가중시킨 것이 "Jesus Christ" 자체가 "신의 아들" 이라는 점은 오히려 판단을 어렵게 만들었다.

"예언자" → 정의를 내리기에는 넘치고, 신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해 보이며, 구세주라면 세상은 구원 받아야 했다. "Jesus
Christ" → "기름 부은 자"라는 뜻이기에 형식적인 논리로 보면 "Jesus
Christ" → 구세주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교도" 들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으로 암흑과 부정으로 가득한 곳이 세상이었다. 때문에 "Jesus
Christ" → 구세주가 아니다. 이것이 상식이고, 다수의 생각이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상식에 맞서서 소수파는 다른 인식을 드러내는데 "Jesus Christ" → 
"인간의 모든 죄" 를 대속해 주었으니 이제 나머지는 인간 스스로 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전능한 신이라도 인간이 해야 할 도리와 의무까지 대신해 줄 수는
없다는 논리로 귀결시키며, 아무리 현세가 어지럽고 혼탁하여도 "Jesus Christ" → 
구세주이고, 신과 같은 위상을 지닌다는 것을 부정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훗날 다수파로 입지를 다지지만 일단 소수파의 대표자는"Alexandria" 의 대주교이었던
"Alexandros" → 그의 제자이었다. 그래서 이처럼 "Jesus Christ" 의 신성을 믿는
입장을 견지한 족속들을  "Athanasius(아타나시우스파)" 라고 하였다. 반면에 다수파에서
소수파로 전락하는 것은 "Arius(아리우스파)" 라고 한다. 또한 다수의 견해... "Jesus
Christ" → 신과 같은 위상으로 보지 않고 인간 들처럼 신의 피조물로 보았던 것은 "Arius" 이다.
Cave of Qumran ...Murabbaat Cave
Monotheism
Cave of Qumran ...Murabbaat C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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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논쟁은 잠시 추방령 까지 받았던 소수파의
승리이었으며, "Athanasius" 이었다. 교리 문제와 무관하게
"소수파" 가 승리하였다는 사실은 초기 "Christianity" → 커다란
결함으로 표출된다. "Constantinus" → 그저 통합 의도를 관철하는
것에 만족한 것 같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Council of Nicaea" →
계기로 근본적인 교회 통합은 훗날 증명되겠지만 물 건너 간 것이다.
당시에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 시기부터 "동방
교회, 서방교회" 로 분리되었고, 동방에는 이단으로 몰린 Arius(아리우스파)가
중심을 이뤘고, 교황이 버티고 있던 서방에서의 대세는 Athanasius
(아타나시우스파)를 기반으로 한... "Roman Catholic" 이 성립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 후... 두 교회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21 C → 이르러 Roman-Catholic(구교)과 16 C... "종교개혁" 으로 탄생한 여러
교파의 "Protestant(신교)", 그리고... "Eastern Orthodoxy(동방정교회)" 로 나뉘게
된 것은 바로 이시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대립이 종교와 교회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라면 여기서 상세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 하지만  "중세는
종교의 시대"
이다. 포괄적 개념으로 보면 "Christianity" 이지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처음부터 분립의 싹을 보인 것은 중세가 끝나고, 종교적 학습기의 많은 날들 속에서
유럽의 역사에 기묘하고 복잡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Christianity" 를 공인한 "Constantinus" 
"대제"라는 호칭을 부여 받게 되지만 사실은 임종 전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유일 신앙이면 아무 것이나 상관
없었는지 모른다.  성부, 성자, 성령  같은 복잡한 교리
따위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는지도 모르지만 Council of -
"Nicaea" 부터... 순전히 정치적으로 스스로 직접 회의를 주도
하였고, 정치적 결단의 소산이었다. 세월은 흘러 제국의 동쪽 ...
Armenia → Mesopotamia의 일대... Syria → Egypt... 이르는 "Orient"
문명권은 여전히 "예수"가 신과 동급이라는 사실을 좀처럼 믿지 않는
분위기이었으며, 바로 이때 7 C... 급기야... "Islamism" 이라는 새로운 종교가 창시된다.

"Christianity" → 마찬가지로 "Islamism" 은 "유대교" 의 유일
신앙을 뿌리 삼고, "Jesus Christ" 탄생 이후... 크세 세력을
확장한 Christianity를 토양으로 삼아 출범한 종교이다. Athanasius
& Arius
  중에 교리 자체는 "아리우스" 파에 좀더 가깝게 느껴진다.
"아리우스" 파의 학설에 의하면 "Jesus Christ" → 신이 아닌 "예언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또 다른 "예언자" 가 등장하여도 전혀 교리 상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예언자" 가 Muhammad → Arabia Type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Monotheism" 을 내세우는 종교가
여럿이라면 논리적으로는 모순이다. 정말 "유일신"이 존재 한다면 그러한...
"유일신" 들 중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전부 가짜 신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Ancient Near East" → 유일신은 하나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Judaism-Christianity
-Islamism
이라는 여러 종교를 만들었으니 한마디로 Irony... 할 뿐이다.
Christianity → 아리우스파는 서방의 Norman & Germanic Peoples를 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방에서는 "Islamism" → 탄생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렇다면 아리우스파는
Christianity 발전을 저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촉진시틴 것은 아닐까 싶다. 또한
"아타나시우스" 파의 교리를 계승한 "Roman Catholic" → 서 유럽의 중세를 지배하게
된 것은 아리우스파라는 "이단"과 "Islamism" 이라는 "이교"의 간접적인 지원이 컸는지도 모른다.
Via Dolorosa
Athanasius Kircher
Jesus Christ
"교리 상으로는 상극이다."  하지만 "Roman Catholic" → 
"선명성" 을 부각시키는데 도움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Christianity"
→ 문명권의 외곽을 두텁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의 문제이고, 당대에는 이단과 이교의 문제가 곧 사생결단의
쟁점이 되었다. 일단 이단의 문제는 서서히 안정되었는데 "Byzantium-
Empire" → 에서는 여러 차례의 공의회와 종교회의를 통해서 "삼위일체론"
더욱 정밀하게 다듬어지게 된다. 신의 하나의 존재이면서 성부, 성자,
성령
3 가지 우상을 동시에 갖는다. 하나이면서 셋 이다. 교묘한 해결책이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역사가 짧은 유일 신앙과 오랜 전통을 가진 다신교 "신앙의 절충"
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처럼 이단의 문제는 그런대로 해결을 보았으며, 이교의
문제는 종교회의 같은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나 "Islamism" →
"무함마드" 사 후... 종교적 논쟁 따위에 이끌리지 않았고, 그저 들불 같이 세력을 확장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Islamism 자체의 의미가 신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뜻이다. 신의 아들 같은 존재,
삼위일체 같은 정교한 타협은 애초에 필요하지 않았다.
"Islamism" → 신의 목적을 위해 어떠한 수단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포교를 위해서는 전쟁마저도 Jihard(지하드)
즉 !! 성전이라고 부를 정도이었다. "Muhammad" 시대에는
생존을 위해 지하드를 추구하여야 했지만 신흥 종교가 어느 정도
안정된 뒤부터는 "지하드" → 곧장 세계화의 길로 내달렸다. Muhammad가
"신의 계시" 를 받은... 610 년부터 100 년이 지난 후 Islamism 세력은
Central Asia, Africa → "Arabian Peninsular" 걸친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하였다.

Strait of Gibraltar... 넘어 유럽 대륙으로 들어선
"Islamism Army" → Spain(Castilla) 까지 쉽게 정복하였다.
당시 이 지역은 "Germanic Peoples" → 이동할 때...
멀리 "Rumania" 에서부터 이곳까지 밀려온 West-Goth
People → 지배하고 있었으나 6 C... Franks(Clovis) 에게 정복
당한 이 후 West-Goth 왕국은 힘을 쓰지 못하였다. 하지만
Pyrenees Mountain → 넘은 이교도 군은 "Aquitaine" 남서부에서
강적을 만나게 된다. 바로 Clovis의 후손들이 지배하는 Franks이다.
양측은 "Tours-Poitier(732, 투르-푸아티에)" 에서 맞붙게 되었다.
정확한 전적지와 군대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승패는 정확히 알려져 있다.
"Karl Martell"이 지휘하는 "Franks Army" → 기병 술을 활용하여 Islamism
Army → 물리치고, 지휘관을 전사시켰다. 그 공로로 "Karl Martell"
후손 ..."Charlemagne" → "선물"을 받은 것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남겨지게 된다.

"투르-푸아티에" 전투 이전... 유럽의 서쪽 관문에도
Islamism 세력은... "Constantinople"을 포위하고 공격
하였지만 결국 "Byzantium Empire" 의 철벽 수비에 막혀 참패
(717) 하고 만다. 그 뒤에도 "동방제국"의 수도를 공략하는 시도는
빈번하였지만 실패한다. 당시 제국의 주 화력은  "Greek fire(그리스의 불)"
이라는 "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기부터 Islamism 세력은 끊임없이 "Byzantium" 의 동쪽 변방을
흔들었고, 결국 "Mehmed 2 세" → 이끄는 Turk-Osman Empire 
의해 제국의 1100 년... 생존은 끝장(1453)나게 된다. 제국이 유럽의 동쪽 관문을
수호한 것은 당시에는  자체의 생존을 위해서이었지만 멀리 보면 "West-
Europe Christianity" → 사실상 보호한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서-유럽
역사가들은 "Byzantium Empire" → 이질적인 요소로 취급하며 무시 하지만
만약 제국이 8 C... 멸망하였다면 탄생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중세 초기의 서-유럽
세계가 Islamism → 말발굽 아래 여지없이 짓밟혔을 것이다. 서양사에서 "France" 에서
벌어진 전투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만 실질적으로 "Constantinople" 전투가
좀 더 규모가 컸을 뿐만 아니라 이교도와 맞서 "Christianity" → 보호한다는 목적의식도 강했다.

그런데도 "투르-푸아티" 에 전투가 부각되는 것은 서-유럽
세계를 방어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당시 서-유럽은 동-유럽에
비해 문명의 오지였으나 후대에 유럽 문명의 중심으로 작용되었기
때문에 두 사건의 역사적 배분도 역전되어버린 것이다. 이후에도
Islamism → 유럽 공략은 지속되었다. "Constantinople" 의 정복은
15 C... 성공하였지만 Arab People 들은 적어도 스페인 남부를 15 C...
까지 지배하였고, "발칸과 동-유럽" 의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어떻게 보면 "Balkan" → "유럽의 화약고" 가 된 것은 20 C... 일이 아니다.
유럽을 포위한 Arab... 세력 언뜻 보면 상당한 위협 상황으로 볼 수 있었으나
다른 측면으로는 서-유럽이 향후 유럽 문명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배경이 되어주었다. 또한 Islamism 세력이 유럽 지역을 동-서로 포위하고
경제 봉쇄정책을 시도한 것은 유럽세계가 오랜 "중세"에서 일어나 근대의
문턱으로 들어서면서 역사의 장을 여는데 중요한 정신적 기여를 한다. 그것은
바로 "Aristoteles" 사상의 보존과 전승이다. Old Greece 철학은... Platon &
Aristoteles  두 기둥을 삼아 발달되었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관계를 유지
하였으나 철학적 내용은 대조적이었다. "Platon" 은 현실세계와 별도로 사물의 참된
본질 즉 !! Idea(이데아)... 이뤄진 궁극적인 선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Aristoteles" → 이데아(형상)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질료와
혼합된 상태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대체로 Platon →"관념 흔적" "이원론" 을 전개
하였고 "Aristoteles" → 과학적인 입장을 취했다. 두 사람의 이론 중 기독교 신학과
가까운 것은 Platon → 이다. "이데아 세계" 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신이 다스리는 천상의 세계이다.
Dante...
La Divina Commedia
La Divina Commedia
다만... 그는 그리스의 "다신교"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유일신" 을 등장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따라서 "Platon" →
철학에 "유일신" 만 추가하면 그대로 "Christianity" → 신학이 된다.
그러한 신은 "Platon" 사 후.... 300 년 후... 현세에 출현하였다.
"Platon" → "Jesus Christ" 가 오기 전에 생존해 있었으므로 "세례"를
통해 "원죄" 를 용서받지 못했다."Renaissance"  → 신호탄이 된
"Dante" → "La Divina Commedia(신곡)" 에서 그가 천국에 오르지 못하고,
Limbo(림보) 에 머물게 된 이유이다. Dante → "Aristoteles" 를 인류의
스승이라고 부르며 "림보"에 배치하였다. 유럽 세계에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전해준 사람은 "Spain(Castilla)" 에서 활동한 Arab... 철학자 Ibn Rudhd
(이븐 루슈드)이다. 유럽에는 "Averroes(아베로에스)" 라는 Latin Alphabet
으로 서-유럽에 알려졌다. Muslim이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을Greece
→Arab Languag
로 번역하였고 이것이 나중에 "Latin Alphabet" → 재 번역되었다.
유럽과 달리 Arab...에서는 "Platon" 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더욱 중요한 고대 철학자이었다.
반면 서-유럽세계에서는 오랜 시간 아리스토텔레스가 거의 잊어진 존재이기도 하였다.
"Platon"  → 사상은 "예수 탄생" 에 지적 걸음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3 C...에는
New-Platon 사상으로 업스레이드 되어... 초기 "Christianity" → 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Platon" →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 가 홀대 받은 것은 신학에 원용
될 수 없는 현실적인 장치(Prime Mover → 목적 혼과 부동의 원동자) 로...
말미암아 종교적으로 위험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래서 "Augustinus
(아우구스투스)"
 → 같은 초기의 교부들이 "Platon" 의 사상을 교리를 수용한 이래
교회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를 배척하였고, 나중에는 망각 속에 버려졌다.
12 C... 사정이 달라진 것은 "십자군 원정" 의 탓이 크다. 멀리 동방에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서-유럽 세계는 "Christianity" → 문명권 보다 강력하고 방대한
"이교도" 문명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또한 최소한 이교도의

존재는 적어도 "Christianity" 신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 있음을 말해
주었다. 안타깝지만 "Christianity" → 신학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신앙의 커다란 위기이었고, 당연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의 존재와 의지를 인간의 이성으로 해명할 수 있어야 했다. Why !!
이교도들은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기는커녕 성서를 읽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마침 이교도 학문 가운데 그 해결점을 제공하는 것이 있었다. 앞서 설명되었듯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이기도 한 Ibn Rudhd...의 철학이었다. 중세 후기 13 C...
"Thomas Aquinas" 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에 의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Scholasticism(스콜라 철학)을 집대성 한 것이다. 그 해결책은 간단하였다. 신학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단 !!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신학을 계시 신학과 자연신학 둘로
나누어야 한다. 계시 신학은 종전의 신학과 달리 신의 존재와 의지를 연구하는 학문
이었다. 그러나 "지엄한 존재의 신" 이 자연과 인간 세계에 모든 것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물" 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자연 법칙도
굳이 신을 끌어들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설명해주는
학문이 필요해지는 이것이  "자연 신학" 이다. 쉽게 말해 계시신학은 신학이고
자연신학은 "철학"이라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가 자연신학이라고 분류한
학문은... 사실 "과학" 이라고 해야겠지만 당시에는 과학이라는 학문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철학"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돼서 인간 이성이 신앙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자연법칙을 연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것이 "Renaissance" →
문을 여는 사상적 기폭제가 되었다. Arab... 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보존하고
발전 시킨 것이 결국 서-유럽세계의 정신적 지각 변동을 일으킨 것이다. "Islamism"
문명권은 South-Europe의 창문을 통해서 중세의 West-Europe 에서 단절되어 있던 그리스의

"고전 문화" 의 양분을 공급하였다. 누구도 의도적으로 조성하지
않았으나 그러한 토양 덕분에 North-Italy 에서는 "Renaissance" 라는
세계사 적인 변화를 일구어 내었다. 물론 오랜 세월 Arab 권과 통상 관계에
있던 "North-Italy " 도시국가 상인들이 통로가 되었지만 그들 역시 의도한
결과는 아니었다. Arab... 문헌들을 유럽세계에 전한 것도 Arab... 상인들이었다.
인간의 의식적인 활동이 역사를 구성하지만 "역사"를 크게 변화시키는 것은
무의식의 힘이다. 항상 강조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중세"의 출발과 진행 과정을
알고자 한다면 Christianity  → 대해 알아야 하고 반대로 "Christianity(기독교)"의 파생
과정에 대해 좀 더 접근하기 위해서는 중세를 먼저 이해하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흔히 "중세"  → 암흑시대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닌지 모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1000 년의 어둠 뒤에 갑자기 밝은 사회가 출현할 수는 없다. 15 C... 서 유럽세계는
국민 국가를 이루면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비롯해 현대 세계까지 이어지는 갖가지
이념과 제도들이 발달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당연히 100년 간의 암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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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dle Ages Start∼Eurasia... 대륙 전체를 살펴보면
East → 여전히 전통적인 중앙집권적 체제가 자리 잡고 있었고,
중앙의 서남아시아(중동), 동-유럽은 과거 "Roman Empire" 제체를
연상시키는 느슨한 제국 체제(Byzantium, Islam Abbasid Dynasty)
이었으며, West → 서-유럽 세계는 종교적으로 통합된 상태에서 정치적으로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당시 가장 정치적으로 선진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China" → 가장 후진적인 "Europe" 까지 구체제 전체에 걸쳐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Byzantine, Abbasid Dynasty"
헤어 나오질 못하였고, China(송 제국) 또한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안정기에 있었지만
밑천을 드러내어 일종의 추잡스러운 상태에 있던 시기이다. 그런데 세상 일이 알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듯이 서-유럽의 경우 내부적인 혼란과 빈곤 속에서도 잠재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다. 동방의 문명의 확고부동한 중심이었던 China → 과거와 같은 문명의
빛을 상실하였고, "Roman Empire" → 붕괴 된 이후 ...동-유럽이 서방문명의 기둥 역할을 하였으나

"낡은 체제" 의 굴레에 묶여 정체된 상태를 보인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서방 문명은
그 기원에서 완전하게 벗어나 서-유럽 체제로 적통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처럼 서-유럽, 동-유럽의 위상이 역전되었음을 거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서-유럽 세계의 자신감이 집약적으로 표현된 "십자군 원정"이다. 이를 계기로 서-유럽은
유럽 문명을이끌어가는 동력을 확보하기에 이르고, 나아가 세계 문명의 주역으로 진일보하게 되었다.
Humiliation at Canossa
Heinrich 4세
Turning Point
Humiliation at Canossa / 카사노의 굴욕
1073 → 58 세의 나이로 새로 교황에 즉위한
Gregorius 7 세 때 당시 교회는 성직자들의 "부정
부패와 타락"으로 교황 및 성직자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교황 "Gregorius 7 세" 는 성직자의
결혼이나 성직 매매를 일절 금지하고, 그때까지 "국왕
및 제후"
가 갖고 있던 "성직 임명권" 을 교황이 갖겠다고 공포한다.
성직자를 세속의 왕이나 제후들이 임명하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왕" 들은 이에 반발하였고, 서로간의
충돌은 불가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특히 통일 국가가
아닌 연방 성격의 "독일 제국" 으로서는 Gregorius 7 세의 무리한
정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는데, 제국 내 토지의 절반이
교회 감독과 회당장의 소유였으므로, 정책 실행 후 그들이 차후
황제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교황을 따르게 된다면 "독일제국"의
주권은 자칫 붕괴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성직 임명권을 넘겨
준다는 것은 "Catholic" 사회에 대한 황제의 지배권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래서 당시 독일 왕이자 "신성 로마제국" 의 황제였던 Heinrich 4 세는 교황과 대립하게 된다.

교황은 왕의 악정으로 제후들의
반심을 사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독일
제국"에 권위를 행사하려 하였고, 자기 소행을
"로마" 에 와서 친히 변명할 것을 명하게 된다.
또한 황제가 가장 신임하고 있는 감독이 관직매매에
의하여 그의 지위를 얻었다고 그를 파문하기 까지 이른다.
여기서"Heinrich 4 세" 는 소환에 응하지 않고 1076 년 1 월...
"제국 국회"를 소집하여 교황을 폐할 것을 결의하게 되고 반면에
교황은 그 해 2 월에 "Heinrich 4 세" 를 "파문" 함과 동시에 폐위
할 것을 선언하고 국민은 그에게 충성을 다할 의무가 없음을 선언하였다.

"파문" 이라 함은 Catholic 세계로부터의
완전 추방을 뜻하는 매우 이례적이고 치명적인
조치로서, "Catholic" 교도는 더 이상 황제를 만나서는
안 되었으며, Heinrich 4 세 에게 충성을 바치는 제후는 그와
똑같이 불경한 자로 간주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Heinrich 4 세를 지지하던 "독일의 제후" 와 성직자들이 왕으로
부터 등을 돌리는 상황이 전개 되었으며, 파문이 취소되지
않으면 1077 년 2 월... 교황이 주최하는 "아아구스부르크
회의" 에서 하인리히 4 세는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교황" 에 맞서 싸울 지지기반을 잃은
그는 교황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맹세
했다. 그리고 교황을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이것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왕의 얄팍한 꽁수 였다. "Deutschland" 을 떠난 왕은
Italy로 향했다. 꽁꽁 얼어붙은 Rhine River을 건너고
눈 덮인 Alps...를 넘었다. 왕에게는 유난이도 추운 겨울이었다.
교황은 이때 Italy... 중북부의 "레지오 넬 에밀리아" 라는
도시에서 남쪽으로 50 km쯤 떨어져 있는 "카사노 성"에 있었는데
고생 끝에 간신히 도착한 Heinrich 4 세 였지만 교황은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Heinrich 4 세는 추운 겨울날 얇은
옷에 맨발로 눈 속에 서서 꼬박 3 일 밤낮을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그제야 교황은 접견을 허락하고 교회에 복종할 것을
서약 받은 다음 파문을 취소해 주었으나, 이 사건을 일컬어
"카노사의 굴욕" 이라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황이 군주권보다 우위인
교황 권을 수립하게 됐다고 해서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하나의 사건으로 보고 있다.
Canossa Castle
특별히... Humiliation at Canossa(카노사의 굴욕)
& Concordat of Worms(보름스 협약)가 주는 의미는
각별한 것인데 신성과 세속의 갈등이 봉합되며,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시기로서 Pope Urbanus 2 세에 의해 Council of
Clermont(클레르몽 공의회)
가 개최(1095)되고 Islamism 세력이
장악한 "Jerusalem" "성지 탈환"을 호소하면서, 구원의 약속과 전쟁 후
전리품에 대한 물질적 유혹으로 군중(대중)을 선동함으로써 급속히
진행되었다. 표면적 대의명분은 "성지 순례"를 가로막고 있는 이교도를
몰아내자 !! 라고 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현지 "Jerusalem" 에서는
순례자들이 "Arab People" 의 관용아래 자유로운 순례가 보장되었던
상황으로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한 것이 아니라 왜곡시킨 후 대중들을
선동하였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순수한 신앙심에 불타오르던 농민
(농노)들과 Germanic Law(게르만 전통 법)에 따라 장자 상속에서 배제된
귀족가문의 중세 한량들이 십자군 구성의 핵심을 이룬다. 순전히 십자군 원정은
교황의 착각 속에 추진되어 역사적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인류사에
있어서 치욕스런 사건으로  "신"에 대한 믿음이 앞섰던 것이 아니라 세속적 성공
가능성에 대한 신뢰감과 희망이 앞서서 자초된 것이며, 한편으로는 귀족들은 전리품
획득과 토지, 영토획득에 대한 기대감 속에서 내몰리며, 농민(농노)들은 신분 상승과
함께 자유민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 속에 함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치명적으로 작동
되었던 것은 "세치 혓바닥" 으로 군중을 현옥시킨 교황의 "구원"이라는 기대치에 대한
믿음이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 의 직접적인 계기는 이미 Islamism Seljuk-
Turks →  East-Anatolia, Syria 영토를 잃어버린 "Byzantium Empire(동방제국)" 가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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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ta & Rhodes ...Crusade War & Venezia
http://redbeans.egloos.com/2103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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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간...갈등이 치유될 희망이 싹트면서 Urbanus
2 세는 동방제국과의 해묵은 갈등(카노사의 굴욕으로 야기된
황제 파문 사건)을 해결하고 싶었던 것 이었는지 모른다. 따라서
파문을 거두는 것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날리고, 동방의 황제는
Latin Church 에 대한 폐쇄 령을 거두는 것으로 화답하게 되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던 상황으로 급반전 되었는데 이것으로 역사적으로
신성과 세속, 서-유럽과, 동-유럽의 해빙기가 성립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두 양반은 이러한 협력적 체제를 오래도록 유지할 필요를
공감하였으며, 실천적, 정치 목적이 지향되는 어떠한 것으로서 과감하게
십자군 원정군을 조직하게 된다. 그러나 원정은 참패로 끝났고,
2003 년 03 월... 교황 "Pope John Paul 2 세" 에 의해 십자군 원정에 대해 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역사적 과오..."라는 공식적 사죄의 뜻이 담긴 언급이 있게 되었다.
Shobak Crusader Castle
Ten Commandments
Crusade Castle With 39 towers-Mamure Kalesi
그렇지만 당시 "서방의 교황" 의 입장에서는 원정은 실패
하였지만 향 후 서-유럽 세계에서 종교적 중심만이 아니라
정치적 구심점으로 지위를 확립시키는 계기가 되었기에 웃기는
일이지만 교황의 입장은 어느 정도 까지는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억해야 하는 점은 "십자군 원정" 자체가 교황의
호소(선동)로 조직되었다는 점으로서 교황의 권위와 권력, 그리고
재산은 서-유럽의 어떤 개별적 군주보다도 막강하였지만 모든 군주들이
교황을 받드는 것은 아니었다. 중세 초기 교황은 막강한 지위를
누렸지만 현실 속에서는 황제처럼 섬겼던 군주들이 점차로 세력을 키우면서
교황을 종교적 지도자로서만 역할을 한정시키려 하였고, 교황도 교황령
이외의 곳에서 세속적인 권력을 발휘하기에는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십자군 원정은 그러한 질서의 반영이기도 하였는데
교황이 제기한 것이지만 "신성과 세속"이 분업화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Charlemagne" 체제 이래 착실하게 진행되어온 분업
체계는 "십자군 원정" 에 이르러 최초로 실행에 옮겨진 것이고, 원정은 실패하였으나
"교황" 만이 바라던 것을 얻게 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동안 유럽 문명의 변방이었던 서-유럽 세계가 도약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Middle Ages... 틀 속에서 교황의 "정치적 구심점" 이라는
것의 설정은 공식적으로는 정치적인 역할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조금 입장이 다를 수 있었는데
교황은 서-유럽 국가들의 내정에는 관여하지 않으면서 국가들 간의
분쟁이 발생하거나 이해관계가 상충할 때 조정자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즉 !! 서유럽 군주들은 내치와 자율권을 갖고 있었으나 "외교권" 은 교황에
위임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십자군 원정 이 후 교황은
서-유럽 세계의 각 군주들 간에 벌어지는 온갖 문제에 개입하며 외교,
명분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컨대 14 C..."Avignon
Papacy" →
교회 대분열은 그러한 관계가 빚어낸 사건의 일부이기도 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부터 교황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정치적 권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상징적 권력의 우상으로 등장한다. 또한 그러한 사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는데 15 C... Pope Alexander 6 세 → "Treaty of Tordesillas
(토르데시야스 조약)"
으로 화려하게 꽃피우며, 교황의 역할, 궁정의 정략적 결혼,
신대륙 발견 등 중세 서-유럽 세계의 특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일화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게 된다.

바야흐로... "Christopher Columbus" 의 신대륙
발견으로 독점권을 획득하고 훗날 Karl 치세 Spain
(Castilla)의 황금시대가 개막되었다. 여기에 변수 등장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Spain(Castilla) 왕국이
성립되기 전부터 대서양 항로 개척에 All-In... 하였던 "Portugal"
→ 불만이 증가하였다는 점이다. 전쟁이 아닌 교황의 중재로 양국은 문제
해결의 의지를 갖고, 당시 Pope Alexander 6 세 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당시"Portugal" 의 주장은 간단하였다. 신대륙으로 가기 위해서는 Africa
"베르데 곶"과 대서양의 관문에 해당하는 "Azores(아조레스)" 제도를 거쳐야
했는데 이러한 지역이 "Portugal" → 발견한 지역으로서 일정 부분 자신들의 몫이
정해져야 한다는 억지스러운... 그러나 일리가 있어 보이는 주장이었다. 어찌되었든지 이러한
"Portugal" → 주장은 관철되었다. → Portugal = Joao 2세 + Spain = Castilla Isabella + Fernando

Castilla Isabella + Fernando(1469) → 정략적 결혼
Salvador Dali
The Dream Of Christopher Columbus

Oil Painting
Commercial Revolution
The Moneylender and his Wife
Spain Salamanca Clereca ...Treaty of Tordesillas
겉으로는 "중재자 교황" 의 권위를 100 % 인정하고
명령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고수 하였지만 교황의 판결에
따라 전쟁의 명분이 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20 대에
추기경이 되어 숱한 여성 편력을 벌였고, 세속적인 욕심이 컸던 Alexander
6 세는
그 무렵... North-Italy → 넘보는 "France" → 견제하느라 Portugal,
Spain 양국이 제기한 요청에 관심이 없었는지 모르지만 교황의 판결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는 단순 무식하게  "경도"를 이용해 양국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도저히 배운 사람의 지혜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Cape Verde(베르데 곶)에서 서쪽으로 400 km
떨어진 대서양의 경도선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Portugal,
서쪽으로 Spain(Castilla)의 영토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지침에 따라 양국의 대사들은 Spain → Tordesillas 에서
만나 협상을 가진다. 그렇지만 교황이 정한 경도선은 바다...
한복판이었다. "Portugal" → 영토가 될 수 있는 땅이 없었으므로
"Portugal" → 당연하지만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양국은 교황의
제안대로 경도선을 기준으로 위치를 서쪽으로 1400 km 가량 옮겼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Treaty of Tordesillas" 이다. 결과적으로 "Portugal"
→ 이러한 조약으로 많은 반사 이익을 거둔다. 그것은 새로 발견된 Brazil
동부 지역이 바로 그러한 기준선에 걸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Brazil
→ Portugal 식민지령이 되었고, 현재도 Central And South America 지역에서
"Spain Alphabet" → 아니라 유일하게 "Latin Alphabet" →  사용하는 국가가 되었다.

1493 → Alexander 6세가 승인한 기준선, 1506 Julius 2세가 승인한 기준선

또한... 중세 전성기처럼 교황이 직접 나서서 원정을
조직하거나 군주들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시대는 지났다.
"토르데시야스 조약" 에서 보듯이 중세 후기에는 유럽 각국들이
교황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거나 명분을 쌓으려할 뿐 교황의 권위에
복종하고 명령에 따르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중세
사회가 해체"
될수록 교황은 점점 "외교적 중재자" 로서의 힘을 상실해 갔다.
때문에 중재자를 잃은 유럽 세계는 전란의 회오리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그러한
신호탄은 "종교 전쟁" 이었지만 이것은 곧 !! "영토전쟁" 으로 바뀌면서 더욱
치열해진다. 놀랍게도 그러한 혼란기는 400 년 넘게 진행되며, 중세 유럽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외교적 조정자, 상징적 권력의 역할에 충실하였던 교황이 권위를
잃는 시기부터 현대의 새로운 조정자
UN →
 등장하는 시기 까지 다시 말해 "종교
전쟁" 이 후(16 C) 제 2 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20 C 중반 까지 유럽의 역사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얼룩지게 되었다. Reformation(종교 개혁)으로 교황이 몰락하면서 외교 조정자도 사라진다.

서-유럽 각국은 곧바로 치열한 전쟁에 돌입하며, 16 C
유럽 각국에서 전개된 종교 전쟁을 필두로 17 C... 최후의 종교
전쟁이자 최초의 근대적 영토 전쟁인 30년 전쟁이 벌어졌다.
계속하여 Spain... 왕위 전쟁, 중반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 년 전쟁, America, India 를 무대로 한... United Kingdom + France
식민지 쟁탈전 19 C... 초기의 Napoleon Bonaparte 전쟁이 이어진다. 19 C
후반...까지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은 20 C 의 제 1 차
세계 대전으로 정점에 이르렀고, 그 마무리로서 "제 2 차 세계 대전" 이다. 중세의
교황과 현대 UN → 사이의 시대, 350 년에 달하는 조정자의 공백기는 곧 유럽
세계의 격렬한 진통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전쟁들을 모조리 거치고 나서야
비로써 유럽 세계는 "새로운 조정자" 가 생겨났다. 교왕이 지배하던 중세는 근,
현대... 유럽 세계를 품고 있던 시대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유럽의 중세(Middle Age)는
명칭부터 잘못된 느낌이다. 중세는 고대와 현대의 중간시대라는 의미보다는 유럽
세계의 틀을 이루고 서양문명의 특수한 성격을 형성한 그 자체로 고유한 내용을 지닌 시대이다.

전쟁 자체로 실패한 원정에서 의도치 않게 서-유럽
세계는 교황이라는 리더를 얻었다. 하지만 원정의 의도치
않은 성과는 그것만이 아니다. "십자군 원정"을 통해 로마제국
시대 이 후... 처음으로 지중해 동부의 무역에 뛰어들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서-유럽이 경제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도약 할 수 있는
중대한 계기를 제공한다. 그것이 바로 "Renaissance" 이다. Roman
Empire가 무너지고 나서 지중해 무역은 잠시 Byzantium이 장악하였다.
그러나 Islamism → 흥기하면서 지중해는 Arabia 호수처럼 변했다. North-Africa를
모두 점령하고, Spain(Castilla), Sicilia 까지 무역과 군사상 기지를
설치한 Arab... 상인들은 서-유럽의 많은 인구를 상대로 막대한 무역 이익을 얻게 된다.

Crusades(십자군 원정) Arab... 세계를 크게 약화시키지
못했으나 적어도 시장 균점의 효과를 가져 왔다. 특히 "Italy
도시국가" 와 "플랑드르 지역" 은 무역에서 뛰어난 기동력을 발휘
하면서 동방의 물자를 서-유럽에 전달하는 창구의 구실을 하였다.
North-Italy의 상선들이 "Syria" → 항구에서 동방의 물자를 Italy
항구에 까지 실어오면 거기서부터 육로를 통해 물자가 북송되기도
하고, "Flandre" → 상선들이 "Iberia Peninsula" → 돌아서 북-유럽으로
전달하기도 하였다. 뒤늦게 Arab... 문명권에서 풀려난 Portugal, Spain이
대서양 항로 개척에 나선 것은 North-Italy & Flandre 가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어떤 이유에서 North-Italy
& Flandre →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고 선진적인 위치에 있었는지 살펴보자 !!
China → 역사에서 보듯이 "중앙집권적 정치" 는 경제 활성화에 독소로 작용한다.

그런데... North-Italy & Flandre 경제권에서는 그러한 강력한 정치권이 존재
하지 낳았다는 점으로서 "North-Italy" → 교황령이 자리 잡은 중부 Italy,
황제 직할령이 있는 Deutschland & Austria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때문에
황제와 교황, 제국과 교황령의 반목 사이에서 심한 경우 정복하여야만 하는 쟁탈지가
되어야 했지만 상대적으로 자유와 자립을 누릴 수 있었다. 분쟁이 고조되는
시기에"Dante" → 고향 "피렌체" 를 떠나 망명지에서 신곡을 쓰던 13 C...의 일이다.
그 무렵 North-Italy 도시 국가들은 황제와 교황 사이에서 정치적인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황제를 지지하던 세력은 "Ghibellini(기벨린파)" 라고 불렀고,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을  "Guelfi(구엘프파) " 라고 불렀는데 도시마다 양 파로 나뉘어 심하게 반목하였다.
Les Demoiselles d'Avignon
Westphalia Treaty = Westfalen
Avignon Papacy
반목하는 형태로 한 쪽이 집권하면 패배한 쪽은 그 도시에서
추방당해야 했다. 하지만 14 C... 후반부터 황제가 North-Italy 지역에
관심을 끊었고, 교황도 때마침 Avignon Papacy(아비뇽 교황청)시대이었기
때문에 Ghibellini & Guelfi  → 대립은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어둠이
있으면 빛도 있는 법이다. 두 적대 세력의 완충지대 힘의 공백지대이었던
North-Italy 는 정치적 환경은 열악하였지만 오히려 다른 부분에서는
활발하고 역동적인 분위기가 흘러 넘쳤는데 서-유럽 세계에서 봉건제가 절정에
달했던 11 C...부터 이곳에는 이미 탈 봉건적인(자본주의 출현을 예고하는...)
"자치도시" 들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십자군 원정" 으로 서-유럽 세계의 발언권이
신장된 "지중해 무역" 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Firenze, Pisa, Genova 등이
대표적인 자치 도시들이었지만 선두주자는 한때"Constantinople" 까지 점령하였던
Venezia → 이다. 이러한 자치도시들은 공화정과 왕정이 뒤섞인 독특한 정치
체제를 취했으며 이러한 자치도시들의 정치체계가 변해가는 것을 보면 시대에 따른
진보적인 체제의 정의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현대
사회에서는 왕정을 공화정에 비해 후진적인 체제로 간주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초기에 시민들은 과거 Roman Empire... 원로원의 전통에 따라
"공화정" 을 택하게 되었지만 왕국이 대세인 시대에서 느슨한 공화정으로는
강력한 도시국가를 현성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여러 정치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내분과 다툼, 정치 불안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시민들은 점차로 고정된 중앙정부가 권력을 확고히 장악하는 체제를 선호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정부를"Signoria(시뇨리아)" 라고 부른다. 시민들의 여론을 대변
하는 의회가 있었으므로 공화정의 전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은 언제나 똑같다. 우두머리라는 뜻의 "Signore(시뇨레)" 는 점차로 왕처럼 세습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자체 도시들마다 지배적인 가문이 대를 이어 권력을 독점하기에 이른다.

Firenze → Medici(메디치 가문)... 비롯하여 Milano → Visconti &
Sforza(비스콘티와 스포르차), Ferrara → Este(에스테), Verona → Della Scala
(델라 스칼라), Padova → Carrara(카라라)가문 등이 모두 그러한 식으로
권력을 세습하였던 사례이다. 특이한 것은 Venezia 이다. Roman Empire 말기
Germanic People이동이 일어나면서 생겨난 이 도시는 8 C...부터 Byzantium
Empire 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발달되었고 이미 당시 Venezia(1797 년 까지 존속)는
공화국 체제를 확립했으며, 앞의 사례와 달리 권력의 하나의 가문 내에서 세습
되지는 않았다. North-Italy의 자치도시들이 독특한 체제를 유지하게 된
이유는 이 지역에 단일한 "중앙권력이 없었고, 도시들 마다 분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Flandre" 지역도 마찬가지이었던 것으로서
Deutschland의 경우 제후국(영방국가)들로 분열
되어 있었던 가운데 Flandre에도 일찍부터 Brugge
(브뤼주), Gent(겐트), Hamburg(함부르크),
등 자치 도시
들이 생겨났다. 남쪽으로 The Holy Roman Empire
(신성로마제국), 서쪽으로 Franks, United Kingdom 같은
강대국들이 있었지만 "North-Italy" 의 경우처럼 Flandre도 열강의
바다 위에 뜬 섬처럼 힘의 공백 지대이었다. 그래서 자치
도시들은 "정치권력" 의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자유롭게
경제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들은"North Sea & Baltic Sea" → 
무역을 장악하고 번영을 누렸다. North-Italy는 황제와 교황이
호시탐탐 넘보았지만 "플랑드르" 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자치도시
들에게 위협적인 요소는 주변의 강대국들보다 "해상 무역"을 저해하는 해적들이었다.

공동의 대비책으로 이들은 "한자 동맹"  결성해
통상을 강화하고, 자체의 상비군까지 조직해 무역 로의
안전을 확보하였다. 이들의 공격적인 무역 정책에
"Denmark" 가 저항하자 아예"Denmark" → 정복하여 한동안
지배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자동맹은 단일 국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시들의 모임이었고, 통합적 의회는 있었어도 도시
들을 일괄적으로 규제하는 법이나 규칙 같은 것은 없었다.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전형적인 자율적 체제이었다. 정치적으로
꽉 짜인 틀이 없는 지역은 경제와 문화의 방면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15 C... 일어난 "Renaissance" 만 하더라도
"North-Italy" → 발원지로 하였고, 상업적 교역 망에 영향을 받아서
Alps → 넘어 Flandre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호가인할 수 있는데 North-Italy,
Flandre 이러한 두 지역은 영토에 눈을 뜬 왕국들이 주변 일대를 빈틈
없이 영토화한 상황에서도 느슨한 도시국가의 틀을 유지하였다. 그 때문에
비록 정치적으로는 후진적이었으나 정치에 비해 인위적인 성격이 약한
경제와 문화의 부분에서는 유럽의 어느 왕국보다도 선진적인 면모를 보였다.
양 지역이 속한 "Italy-Deutschland" → Renaissance" 로 유럽의 근대를
이끌었지만 19 C... 후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통일을 이루고 마지막으로 근대의...
전환점의 올라서게 되었고, 그러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남들이 훌러덩... 먹고
남은 뒤의 파장 무렵의 식민지 쟁탈전에 동참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불만은
20 C.. 양차 대전으로 이어지는 비극과 연결된다. 하지만 유럽 문명 전체로 보면
North-Italy & Flandre → 중세 후반 서-유럽의 경제-문화적 허파로 기능하면서도
유럽 세계가 근대의 문턱으로 들어서는데 반드시 필요한 산소 공급을 해주는 역할을 다했다.
Caesarea
Femme Fatale ...Salome ...Macrame
Amud Horses
어쩌면 넘치도록 훌륭하게 소임을 다했고, 언제나
정치적으로 꽉 짜인 체제를 유지하였던 East-Asia 세계와
비교하면 "North-Italy & Flandre" 는 유럽 문명의 빈틈이었으며,
그러한 틈새는 유럽 문명의 형질을 변경해 한 단계 상승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되어 주었다. 십자군 원정에서 시작된 중세 후기의 변화는
서-유럽 세계에 내적인 통합(교황의 위상)과 외적인 팽창(지중해 무역)
가져다주었으며 이제부터 서-유럽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바깥을 내다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십자군에 참여해 동방제국에 도착하여 휘황찬란한
"Constantinople" 거리 풍경에 촌놈처럼 어리둥절하던 서-유럽인들은 서서히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Eurasia" 국제무대에서 데뷔하기 이전에 그들
먼저 Central Asia → 강력한 "Tackle"을 견뎌내야 하였는데 유럽은 엄청난 충격 속에 휩싸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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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be & Sube`etei
Naadam
Pax Mongol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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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ercook | 2009/05/13 05:40 | History ...Package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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