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erranean Sea ...In Genova & Venezi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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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nival of  Venice
Republic Into the Roman Empire
Venezia Gondola
지중해는 지구상에서 육지로 둘러싸여 있는 바다 중
가장 커다란 바다라고 할 수 있다. 길이 4,000 km, 최대
너비 1,600 km, 평균 수심 1,458 m
에 이르고 비교적 좁은
바다라고 할 수 있지만 가장 깊은 곳으로 알려진 지점은
5,092 m로 확인되었다고 하는데 지중해는 3개의 대륙과 인접
되어 있지만 기후 혹은 생태에 다양성을 보이고, 포괄적으로 공통적
요소도 갖고 있다. 또한  "지중해 성 기후"와 이곳만의 특이한
해류는 지중해 전체를 연결시켜 독자적인 생태 환경을 갖추게 하였다.
지리적으로 닫힌 바다라고 할 수 있는 지중해의 유일한 통로는
Strait of Gibraltar로 그 범위는 바다뿐만 아니라 인접되어 있는 육지에
이르기 까지 포괄적으로 적용하고 있으며, East → Syria, West →
Iberia Peninsula, North → Alps, Pyrenees, South → Sahara(이북지역)의
North Africa Maghreb 지역을 포함하고 있으나  이렇게 경계된 지중해는
협소하게 제한된 범위 설정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역사 속의 지중해는
Roman Empire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작용하였던 Sahara 이남의 "수단" 지역
혹은 South Africa Sahel 지역을 포함하고 서유럽, 전부 혹은 North-Europe
일부에 이르기 까지 광대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Roman Empire
시대 이전에는 Old Orient 지역(적갈색 피부를 가졌던 백인) → Africa을
흡수한 그야말로 역사 속에서 백인 중심의 인류문명의 핵심적인 곳이라 이를 만하다.

반면 Egypt "흑인 문명"에서 해답을 찾는 다면 Greece,
Roman Empire는 사실상 Orient Empire의 판박이라는 주장을
대입시켜 볼 때... 지중해의 지리적 공간은 백인과 유럽 중심으로 이해
하여 왔던 지중해에 대한 고정관념의 해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생태적으로는 하나의 공간으로서 작용하고 있으며,
긍정적으로 고대 역사 속에서 지중해의 "시간과 공간"은 Old Africa,
Orient, Hellenism & Hebraism, 중세 유럽과 Byzantine & Islam에 이르기
까지 아우르는 활발한 문명교류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낭만적으로는
푸른 바다, 강렬한 햇빛, 온화한 기후 조건, Greece의 바다, Islam의 바다,
Roman의 바다 이전에는 Africa의 바다이기도 하였다. "판-구조 론"에 의하면...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지중해는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볼 수 있고, 그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Africa 대륙이
유럽 대륙 방향으로으로 이동하고 있는 현상 때문으로 지중해가 닫히게 되면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중요한 것은 과거와 미래를 통해서  언어(문자),
생태 모습마다 "팔색조"와 같은 다변성이 존재하였던 지중해 문명의
교류는 "수평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떠한 문명이 중심이 되고
주도 되었던 것이 아니라 서로 흡수되는 가운데 새로운 변화들이 발생 되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교류를 실현하였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환경 생태적인
측면에서 지중해 성 기후가 작용하는 가운데 지중해는 지역적으로 성장하였고, 단적인
예로서... Olive Oil의 교역은 지중해의 문명적 교류를 이루어 확산되는 동시에
지역적으로도 하나로 묶어지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확실한 것은 지중해 자체로는
그들 모두가 공유하였던 지역이었음이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유럽 대륙
(내륙)이 역사상 단 한 번의 통일이 되었던 적이 있다. → 8 C 그러나 그것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묶여지는 구조적인 통일이 아니라 강렬한 Charisma에 이끌렸던 일시적인 통일이었다.
Coloseum ...Roma
Strait of Gibraltar
Florence Duomo
따라서 유럽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통일성을 갖게
되었던 것은 오래전...Platon & Aristoteles 시대 이후 Roman-
Empire가 지중해 전역의 패자로 군림하면서 흡수한 Cartago, Greece
남쪽으로 Sahara까지 지중해 전역을 통치하면서 이뤄진 영토 확장
작업을 두고, 사실상 유럽 최초의 통일을 이뤘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지중해라는 용어 자체가 떠오른 것은 Roman Empire 시대이었고,
문헌상으로는 기원전 6 C에 나타나고 있다. 개념적으로는 Islam과 분리
시키려는 경향 속에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으나 지중해는 어느 하나의
세력에 예속되어 있던 바다가 아니고, 모두의 바다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다.
Late Antiquity(후기 고대)에 이르러 Roman Empire가 와해되는 한편 "동-로마"
제국이 성립되면서 지중해 전반에 걸친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 충돌과 교류가
활발하게 발생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Germanic People의
"고트 족"의 남하가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로서 분명
그것은 "서-로마"의 몰락과 "동-로마"의 존속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점에서 Roman의 존속 여부는 Germanic People의
호전성과 Arab 세력의 확장에 따른 것이며, 참고로 7 C
이뤄진 Islam 세력의 확장으로 인한 동, 서양의 교류는 주목되는데
이전의 활발하였던 지중해의 무역을 후퇴 시켰으나 8-9 C에
이르러 지중해 무역(교류)은 되살아난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중해는
North Africa, Middle East를 포괄하는 또 다른 질서의 지리적 표현이 되었다.
사실상 Islam이 지중해와 공간적으로 합치되는 양상은 역사적으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Hun-Turk-Mongolia 세력(유목민)의 확장에
따른 동, 서의 또 다른 접촉은 전면적이라 할 수 없어도 많은 부분 지중해 지역과
연관되어 있고,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Osman Empire는
South Anatolia와 남동부 유럽의 Byzantine 영토를 차지하고 "발칸 국가"들을 속국으로
하였는데 15 C에 이르면 발칸 속국들을 직접적으로 통치하며, Constantinople
= Istanbul을 정복(1453)하게 된다. 그리고 동쪽으로 Euphrates River & Hungary
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렇게 해서 16 C 말엽에는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해 발칸 제국,
중부 유럽 → Hungary, Middle East, North-Africa 대부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처럼 Osman Turk의 확장은 지중해 "해상 로"를 위협하였고,
교역로가 교란되는 가운데 15 C 유럽은 드디어 "희 망 봉"을 접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북-서 유럽과 동방이...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서도 안전하고 쉽게
연결되는 등 지중해의 지리적 기능이 16 C 이래 적어도 19 C 중반까지
약화되는 현상을 갖게 되었지만 16 C 까지도 지중해의 바다는 그냥 바다가
아니었다. 무역망(교역)이 깔린 공간으로서 단일 세계 경제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구분 되어 있었으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의
경제 단위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Genova, Venezia, Milano, Firenze같은 North-
Italy의 도시 국가들이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것은 실로 모든 경계를 초월한 무역상의
구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중해 세계 경제 주도권은 점차로 소멸(1650)되면서
18 C에 이르면 대서양 시대가 열리면서 새로운 세계질서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지속되게 되는데
그 중심의 핵심적인 국가들은 다음과 같다. → Portugal → Spain → Netherlands → England →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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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ulus(로물루스)가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가는 강 근처에 도시를 세운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바닷가라는 위치에서
얻을 수 있는 온갖 이점을 활용하면서도 단점은
모두 피해 가지 않은가 !! Roman에 없는 물건은 바다를
통해 수입하고, 반대로 남아도는 것은 수출할 수 있다.
이렇게 해상교역에 의지하는 것 이외에 토지를 최대한 경작할 수 있다. → Cicero(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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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le of Romulus
오래전부터 유럽은 지중해를 둘러싼 여러 국가들로 구성되었고,
유럽 문명의 시초는 동부 지중해 연안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지중해 지역에서
Egypt-Cnossos 정도가 최초로 국가 형태를 이루고 발전을 시작하였다. 즉 !!
Maghreb 지역과 Creta Island에서 진정한 의미의 도시 문명이 탄생되었다는 의미이다.
그 뒤 Aryan People 들이 Asia에서 서쪽으로 확산되어 Greece 도시국가 그이외의 지역으로
유입되었고, 현재 Old Greece People 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Aryan Type의 Greece
People 들이다. 애초의 그들은 아마도 그 이전에 India로 내려온 Aryan Type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가 감지되었고, Aryan 족속의 양대
계통 설은 점차로 달라져 갔다. India-Aryan Type은 그들이 오기 전에 있었던 India Civilization과
Mohenjo-Daro(모헨조다로)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문명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 수 있는데
Aryan + Dravida(드라비다인) People은 서로 많은 것을 주고받았으며, 공통된 문화를 탄생 시킨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Greece + Aryan People도 그들이 Greece에
도달되어 있을 때 이미 그곳에서 번영하고 있던 Cnossos Civilization
에서 깊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Cnossos-
Civilization을 받았으면서도 동시에 Cnossos Civilization과 그 주위의 문명을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자신들의 문명을 세웠다. 참고적으로 Aryan Type의
족속들은 모두 일당백의 전사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호전적이기도 했던 그들은 온순하고 개화된 여러 민족을 파괴해서 흡수해버린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Cnossos Civilization은 기원전 1000년경에 멸망하였고, 새로운
Greece People 들이 그 주변일대의 섬들에 정착하게 된다. 그들은 선박을 이용하여
Asia Minor = Anatolia 서해안과 South-Italy Sicilia Island, South-France(Gallia)
까지 진출하였고, Gallia-Marseille는 그들이 세운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지역에서는
그들 보다 먼저 해상 무역을 위해 멀리까지 항해하던 Phoenicia People 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좁은 Strait of Gibraltar 해협을 통과하여 Britain 까지
진출하였고, Greece 본토에서는 Athens & Sparta, Thebes(테베), Corinth(코린트) 등으로 확산되었다.
Male Limestone Bust Mohenjo-Daro
Mediterranean Sea
중요한 점은 전반적으로 고대 유럽 국가들은 점차로 도시
국가, 제국, 왕국 등으로 전환되어갔으며, 그것은 전쟁의 수단에
의한 정복활동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유목 + 정착민(Central Asia)이 혼재한 양상으로 전개 되었는데
Middle East 지역에서는 Mesopotamia = Asia Minor(소아시아)의
Hittite, Assyria, Babylonia 왕국 등이 있었고, Persia(기원전 500년경)에
의해 거대한 Empire가 건설되었으며, Alexandros the Great는 지중해
동쪽 지방이 Greece에 영향을 받기 이전까지 India → Egypt가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고 대제국의 위용을 확립시켰다. 주목되는 것은 Alexandros the Great
동방 원정이 지속되면서 본격적으로 Egypt → India에 걸쳐 민족이 혼합되기
시작하며 "Hellas People"들에 의해 도시 국가 Greece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앞서 설명되어진 것처럼 Aegean Sea,
Creta Island와 같은 곳에서는 이미 !! 호화로운
궁궐을 건설하고, 풍요롭게 살아가던 인류의 자취가
남아있었다. 이러한 도시국가, 제국, 왕국이 위치
하게 되었던 지역은 전반적으로 고원이나 산록지역에
살던 유목민들이 Minor & Mesopotamia에 정착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침략과 약탈에
의해 형성되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 하였다. 따라서
유럽의 초기 왕국들 또한 Greece의 도시국가들이 하나, 둘 증가
하는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확보해 갔으며, 진정한 Empire의
형태는 Roman Empire가 지중해에 접한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며 성립되었다. 인류 최초의 도시는 기원전 4,000년경
Tigris-Euphrates River 사이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인 Mesopotamia에서 발생되었다.
Hellas People
Santorini ...
그 후에 Indus → Nile River, China → Yellow River
유역에서 차례로 도시들이 세워졌고, 예컨대 Indus River에서
생긴 도시 Mohenjo-Daro(모헨조다로)에는 6 만 명 정도의 인구가
밀집되어 거주하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특히!! Mohenjo-Daro의
가옥에는 "목욕탕과 화장실" 같은 문화시설도 완비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China의 경우 "상 왕조 마을"이 형성(기원전 1900) 되었다고 한다.
초기 제국 화 되었던 문명을 보면 Mesopotamia Akkad(아카드), Sumer
(수메르)이고, 가장 널리 퍼진 제국은 Egypt이며, 위대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Creta Island → Cnossos, Mesopotamia → Uruk(우르크),
Stonehenge(기원전 3,000년경), Ziggurat, Pyramid =  Egypt / Inca / Aztec /
Maya 나열해 볼 수 있을 듯싶다. 이러한 것들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들이며,
기본적으로 "노예, 장인, 상인, 농부" 등이 총 동원되어 건설되었다고 전해진다.
지중해는 Europe, Asia, Africa를 이어 주었던 상징적인 시공간으로서 존재하여 왔다.

지중해 문명이 서방(서양) 문명의 뿌리라고 하는 것은
Old Celt Civilization 이래로 해상 무역과 국제화를 통해...
하나의 문명을 이뤄 왔다는 것으로 Hellenism & Hebraism이라는
사상에 의해 견고해 졌고, 커다란 변화를 이룬다. 대략 이러한
시기부터∼역사가 서방(서양) 중심으로 재편되는 놀라운 변화의
시점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 Hellenism & Hebraism = Renaissance

Roman Empire가 창건 될 무렵 혹은 그 보다 먼저
고대 세계에 또...하나의 대도시가 건설되었는데 그것은
Maghreb 지역의 Carthago이었다. 이러한 도시 국가는 마침내
커다란 해상세력이 되어 Roman과 격렬하게 대항하며, 크고 작은...
전쟁을 거듭하게 된다. 그렇지만 Roman은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하며
Carthago를 초토화시켜 버린다. 그리고 Egypt-Assyria-Babylonia이
끊임없이 충돌하던 Palestine 땅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Cnossos
Civilization이 파괴될 무렵 Palestine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던 Judah
왕국의 왕은 "Saul"이었다 그 뒤에 David → Solomon으로 왕위 계승이 이루어진다.
Florence Piazza della SignoriaStatues
Strait of Gibraltar
Hannibal ...Battle of Cannae
특징적으로 Greece People들은 커다란 형태의
왕국 혹은 제국 형태를 선호하지 않았다. 그들은 작은
도시 국가들을 좋아했으며 말하자면 각 도시들마다 하나의
독립된 국가체제를 이루고 있었던 셈이다. 또한 도시는
작은 공화국이었으며, 중심에 도시가 있고 주변에 농지가 있어서
식량을 공급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도시국가들에는 왕이
없었다. 부유한 시민 계급(귀족)에 의해 다스려 졌고, 보편적으로
일반인들은 정치에 대해 발언권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는데 참정권 없는
많은 "노예" 그리고 여성들 또한 이에 대한 아무런 권리를 누리지
못했으며 훗날 대의 정치가 실현된 것은 어쩌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는지
모른다. 또한 Greece People 들은 Sicilia Island, South-Italy 그리고
지중해 연안으로 진출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이러한 지역을 포괄적으로 지배
하는 하나의 정부를 갖고자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별개의 도시국가를 세웠던 것이다.

Persia의 경우도 그렇고 India의 경우도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왕국들이 등장하지만 Greece에서는 한사람에 의해
세계를 정복하려는 마음을 먹기까지 정말 오랜 세월을 흘려보내게 된다.
정복자 그는 바로 위대한 Alexandros the Great이었다. 또한 이들은
서로 독립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부지런히 서로 싸우게 되는 모습으로 보였는데
그들 사이에는 격렬한 투쟁의 일환이었고, 때로는 전쟁도 불사하였다.
참으로 난해한 사람들 아니었나 싶다. 무엇보다도 이들 도시국가들이 결합
될 수 있는 공통점(언어, 문화, 종교)을 분명하게 소유하고 있었건만 집요하리만치
투쟁으로 일관하였다. 그렇지만 묘하게도 외부의 압력이나 침략이 있어서
위험이 닥칠 경우 곧 !! 하나로 뭉쳐져서 막아내게 된다. 그 한 가지 예로서...
Persia DariusScythian 정벌에 실패한 후 Aegean Sea의 여러 섬들을 굴복 시키고,
Greece Athens를 침공하였을 때가 그러했다. 반면에 Tiber River 근처에 있는
일곱 개의 언덕 위에 마을을 세운 Roman(Aryan People)은 점차로 도시국가 형태로
성장하여 하나의 도시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는 발전을 거듭하여 Italy Peninsula에
그 세력을 뻗히게 되면서 Sicilia Island 건너편 Messina(메시나)에 까지 세력을 확장시키기에 이른다.

이러한 시기 지중해에는 Roman의 식민 도시가 건설되고
세우려 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Greece 도시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구조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Roman 자체는
특수한 통치 구조를 갖고 있었다. 당시 Roman은 방대한 토지를 소유
하고 있던 소수의 귀족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으며 일종의 공화국
형태를 갖춘다. 정치는 Senate(원로원)에서 행해졌고,이러한 원로원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두 사람의 Consul(집정관)의 지명으로 원로원
위원들이 뽑혀졌다. 또한 이들의 자격은 오랜 시간 귀족으로만 제한되고 있었다.
Roman은 두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고, 하나는 많은 토지를 보유한 Patrici
즉 !! 부유한 귀족이며, 또 하나는 Plebs(플레부스) 일반 시민 계급이었다. 때문에
Roman(공화정)의 역사는 수 백 년 동안 이러한 두 계급의 투쟁사이기도 하다.
귀족들은 모든 권력을 거머쥐고 있었고, 당연하지만 권력이 있는 곳에 재물이 뒤따랐다.
Tiber River
Venezia Flooding
"평민"들은 패배자로서 권력도 재물도 없었다. 어찌되었든지
훗날 다소 간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낸 평민과 귀족들이 결과적으로
위대한 도시건설을 이루어냈으며, 어느 시기부터는 평민들도 고위 관료
혹은 원로원의 될 수 있었다. 또한 Roman에는 방대한 숫자의 노예
계급(Slave)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부여되지 않았다. 그들은
Citizen(시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거권도 없었고, "소나 개"처럼 그저
주인의 사유재산 목록에 포함되는 신세이었다. 주목 되는 것은 거래의 대상으로도
존재하였고 만일 !! 이들이 해방되면 Freedmen(자유민)의 지위를 얻게 되고
이러한 지위는 특별한 계급으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고대 서양 사회에서는 언제나
많은 노예들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노예 시장"이
설치되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원정대를 조직하여 생포 작전(인간사냥)에
나서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쉽게 팔아치우기도 했다. Egypt 역시 !! 마찬가지로...
Old Greece-Roman의 성장 배경에는 반드시 광범위한 노예 제도를 먼저 언급해야만 한다.

Roman(공화정)은 농업이 국가 경제의 기반이었고, 생산량에
있어서도 입에 풀칠할 정도이었다고 하는데 기술은 하나같이 원시적인
수준의 것들뿐이었다. 거의 밑바닥에서 부터 시작한 그들은 자신들 보다
좀 더 우수한 장비로 무장한 강한 적들과 맞붙어 싸워야 할 때가 많았고,
명예를 중시하고 미신을 신봉하며... 잔인하면서도 타협을 모르던 강인한 자들로
때로는 무모할 정도의 용맹성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가장
문명화 된 사회였던 것은 확실한 듯싶다. 설명되었던 것처럼 최고 통치자는 신권,
세습 권에 의해 계승되지 않았으며, "군인 출신의 공화정 지도자"들은 "시민의 동의"를
얻어 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을 취하고 기본적으로 권력은 법의 통제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가장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 까지 법의 보호를 받았으며,
권리를 대체로 존중 받았다. 현실적으로 Italy 반도와 지중해를 제패 할 당시 !!
군대를 지휘한 사람들은 Fabius(파비우스), Scipio(스키피오), Claudius(클라우디우스)
가문 같은 명문 귀족의 가문의 후손들이었고 그들은 전쟁이 발생하면 위험으로부터
항상 노출된 상태였다고 한다. 또한 병사와 항상 함께 있었고,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미 패색이 짙은 전투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웠으며,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강인함을 보였다고 한다. 즉 !! 칼에 맞아 숨통이 끊어진 다음에도 무릎을 꿇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밀어서 넘어뜨릴 정도이었다고 하는데 그 강인한 정신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반면에 Janus(야누스)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였는데 예컨대 Licinius Crassus(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같은 인물은 온화하고 다정한 남편인 동시에 "노예"를 수 천 명씩
십자가형에 처한 잔혹한 인물이었고 또한 청렴결백하기로
명성을 얻기도 하지만 외국인 혐오와 여성차별이 유독 심했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적으로 Roman Army의 최고의 정예
부대원 "평민계급"이었으며, 이들은 임전무퇴(臨戰無退) 절대 수동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평민이든지 귀족이든지 Roman People들은
나약함을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나약함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고, 자신의 나약함에 대해서도 엄격하였으며 커다란 수치감을 가졌다.

어찌 보면 이러한 오만한 민족이 매번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사전에 패배라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부심 강했던 이들은 "외 국 인"들을 배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Roman Empire가 번영 하게 된 것은 "산적, 노예, 용병"으로 대변되던 최하층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무리들이 바로 뿌리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공화정
말엽에는 피 정복 민과 "노예"들에게도 Roman People과 똑같은 시민권을
부여 하였지만 이러한 포용정책을 포기하는 순간 Roman은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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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Frazetta Egyptian Queen
Babylonian Marriage Market
Italy Peninsula에서 도시국가들이 성공을 구가하고 있는 동안
Carthago는 North-Africa에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들은
Phoenicia의 전통을 이어받아 상업과 항해에 능했고, Carthago
또한 공화국 체제이었으나 부유 계급만의 공화국이라는
색채가 실질적으로 Roman 보다는 강했다. 또한 공통적인 것으로
거대한 노예 인구를 거느린 도시공화국이기도 하였다. 과거에는
Roman-Carthago 중간에 Greece의 식민지들이 있었지만 양국이 힘을
합쳐 Greece People 들을 몰아낸 뒤부터 급격하게 대립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기본적으로 Carthago는 Sicilia Island를 차지...
하였고, Roman은 South Italy를 점유하게 되지만 이미 이들 사이에
Fire Whirl(화제 선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주도권은 Roman이
제해권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드디어 맞-짱을 뜨게 되었는데 제1 차 "포에니 전쟁"은
264-241 까지 지속되며, Roman이 승리하였고, 22년 뒤 제2차 "포에니 전쟁"
에서 Carthago는 위대한 Hannibal 장군에 의해 크고 작은 전쟁에서 승리하며 대세를
주름잡게 된다. 또한 Cannae(칸나에)에서 승리와 동시에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이 후  Hannibal 장군은 뱃길을 봉쇄한 Roman의 전략적 우위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는 보급로가 차단되어 본국의 원조 없이 홀로 고군분투(孤軍奮鬪)를 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 Hannibal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면 승부를 거부하고 오로지 보급로를 차단시키는데 집중하였던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작전을 진두지휘한 인물이 Fabius(파비우스)
로서 집요하게 10년 간 지속한 끈기를 보여줬다. 한마디로
만사를 무리하게 해결하려 하지 않았던 전술로 완만한 충돌을
통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19 C United Kingdom에서
"사회주의"를 신봉하되 돌발적인 변화를 배격하는 Fabius Club가
있었는데 그 명칭의 기원이 바로 Hannibal을 당황하게 만든 Fabius이다.
Hannibal은 North-Italy를 초토화 시켜 성공한 듯 보이지만 Roman의
완강한 저항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Hannibal은 Zama(202, 자마)
전투에서 패전하고 쫓기다가 독배를 마시고 사망하게 된다. 그로부터
반세기 동안 양국은 접전 없는 소강상태에 이르면서 점차로 Carthago는
국운이 다하게 되었고 Roman에 이제는 대적할 최소한의 힘마저 상실하였다.
그런데도 Roman은 마지막 강펀치를 날려 Carthago에 대한 철저한 파괴와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것이 "포에니 3차 전쟁"이며, "지중해의 여왕"이었던 Carthago
몰락하였다. 이제 지중해에서 Roman을 대적할 상대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미 !! Greece의 여러 도시국가들을 정복한 Roman은 Carthago가 보유하고 있던
영토들마저 병합하였다. 제 2차 포에니 전쟁 후 Spain도 Roman이 차지하였지만
Roman은 지중해 연안을 지배 하였을 뿐 북부와 중부 유럽에는 그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Roman의 승리는 국가에 "부와 사치"
불러왔다. 영토가 확대되면서 이들의 "부" 또한
증가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인류 최초의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가중되고 노예의 수 또한 증가
하다보니 사치와 빈곤이 공존하는 사회가 만들어졌다. 따라서
분쟁은 첨예화되어 인간의 인내가 역사의 시험대에 서게
되는 일도 무수히 목격하게 되었으며 빈민의 눈을 현혹시키는
다양한 놀이 문화가 탄생하고, 마침내 검투사들이 많은 관객
앞에서 목숨을 내걸고 미치광이처럼 칼을 휘둘렀고, 이렇게
죽어나간 "노예와 전쟁"의 수확물로서 인간은 비참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폭동, 학살, 투표권 매수 그  의 부정적 요소들이
당시 Roman의 부정적 요소들을 판단할 수 있게 한다.
가난하고 짓밟힌 노예 까지도 Spartacus(스파르타쿠스)라는
검투사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무참하게 진압 되어 Roman의 거리에서 십자가(6,000 명)에 매달려
죽어갔다고 전해진다. 한편 상인이나 군인들이 점차로 득세하게 되었고,
이제는권력에 있어  "원로원"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부터
군인들이 서로 권력 다툼을 시작하며, 내란이 발생되며, 국가는 황폐 화
되었는데 기원전 53년에 Parthia에서는 Roman Army가 크게 패전하고,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험수위에 근접되어 위기 상황으로 내달렸다. 바로 이때가
공화정에서 제정(帝政)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정치 형태로 "삼두 정치"
본격적으로 점화되며, 삼인의 경쟁이 심화되었고, 이제 남겨진 것은 오직
한명의 군주가 탄생하는 순간만 존재하게 된 셈이었다.→ Pompeius, Julius Caesar, Crassus
Firenze Piazza Signoria

Green Salad ...Caesar
Julius Caesar의 업적은 실로 대단하였다. 그는 Gallia &
Britain을 평정하였으며, Pompeius 또한 동방 원정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상황으로
모두 야심가이었고, 적을 용서 하지 않는 성품을 지녔다. 이러...저러 해서
Julius Caesar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지만 그 또한 Forum 광장에서
Brutus 일파의 기습 공격을 받고 피살(44)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이 참 묘하다. 모든 것이 잘 이뤄져 공화정을 지켜낸 듯싶었는데
그의 양자이며 조카인 Octavianus와 그의 친구 Antonius는 Julius Caesar의
처참한 죽음의 보상을 받아내며, 왕정을 세우려는 움직임에 탄력을 받게
하였다. 여기서 Octavianus가 국가의 원수이기도 한 Princeps(프린켑스) 즉 !!
Chief(제 1인자) 자리에 오르며 공화정은 이렇게 종말을 고했다. "원로원"은 형식적으로
유지되었고, Octavianus가 국가의 "일인지하 만인지상" 자리에 오르며, Augustus-
Caesar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그 뒤 후계자들은 모두 Caesar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Caesar는 곧 !! 황제를 의미하였고, Deutschland-
Kaiser(카이저), Russia-Czar(차르)라는 말도 Caesar에서
유래된 셈이다. Augustus는 스스로 왕이라고 하지 않았다. 자칭
Imperator(임페라토르) "총 지휘관"이라고 했으며, Imperator라는
의미는 이 시기부터 최고의 칭호가 되었다. 그리고 아예 세계의 Boss
(통령)이라는 의미에서 한 시대에는 한사람의 황제 밖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Roman = Romaka는 "세계의 여왕..."
Mistress of the World이라고 일컬어지며 서방(서양)에서는 전 세계가
Roman의 지배아래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렇지만 Roman-
Empire는 거의 지중해 지역 일대에서만 자리 잡은 Empire로서 동쪽으로
Mesopotamia를 넘본 적이 없다. 어느 시대에나 China-India에 좀 더
강대하고 문화 수준이 높은 왕국들이 있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서방
(서양)에서 Roman Empire는 절대적인 존재이었으며, 세계제국을 의미
하는 것이 되었다. 근본적으로 Augustus Caesar 시대에서 부터
유럽 사회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유하며, 원로원이 파기된 뒤 완전한
전제 군주제를 표방하였다. 또한 황제가 생존에 있을 시... "반신"으로 숭배
대상이었으며, 사후에는 글자 그대로 "신..."이 되었다. → Augustus = Pax Romana

영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던 Roman Empire
역시 !! 어느덧 최후의 날을 앞두게 되었는데 치명적으로
작용된 것이 거의 Roman Empire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던
"군부의 부패와 무능"에 있었다. 찬란한 Empire를 성립시키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 군부가 "양날의 검"이 되어 Empire의 목에
칼을 겨눈 꼴이었다. 더구나 커다란 문제가 되었던 사실은 잔인
하면서도 타협을... 모르던 강인한 자들로 때로는 무모할 정도의 용맹성을
보이기도 했던 Roman Army의 기강이 사라져 버린 일이다. 도무지
싸우려는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군대의 기피현상이 가속화
되면서 부족한 인력을 "야만인"으로 치부하던 사람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국경지대에 배치하였는데 "고양이에게 생선 물려준 격"이었다. 때문에
야만스런 적국과 내통이 이뤄지며, 국경지대에서는 끊임없이 압박당하는
형국으로 변했으며 이처럼 Roman Empire가 사실상 약화되는 상황에서
야만인 들은 좀 더 강해지고 대담해졌다. 동방으로부터 여전히 위협은
상존하였고, 국경은 멀리 있었기 때문에 무너지고 있던 현상에 무기력하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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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us Octavianus
Attila ...Huns
The Reichs College of Princes and Counts of The Holy Roman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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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avianus  Caesar 이 후 300년이 지난 뒤 Constantinus
황제는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정책을 내놓았는데 수도를 Roma에서
동방으로 옮기기로 했던 것이다. Black Sea와 지중해 사이의 Bosphorus
해협 연안 Byzantine 근처에 새 도시를 건설한다. 이곳은 이 후 Constantinople
이라고 명명되었고, 이곳을 Roman Empire(East-Roman)의 수도로 한
것이다. 현재도 Asia 지방에서는 Constantinople을 "Rum"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로써 Gaul = Gallia + Britain과 멀어지게 되었고, 완벽하게 Roman은
동-서로 분할되었다. 참고로 Roman Catholic & Greek Orthodox Church가
분열된 것은 우상 숭배 채택에 관한 것이었으며, Roman Catholic은 성자 상 특히
예수의 모친 "마리아 숭배"를 장려하였으나 정교회는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또한 Roman은 여러 세대에 걸쳐 북방의 여러 족속들에게 점차로 점령되어 갔지만...
그들은 모두 Constantinople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한편 Roma Bishop는
권력을 강화하여 마침내 그 위세가 격상되었다. 우상숭배에 관한 분쟁에서
교황은 Roman과 동방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시기
신흥종교 Islam이 창시되어 Maghreb & Spain(Castile)을 접수하고 유럽의 중심부를 뒤흔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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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el
Mongol Army
Hun-Turk-Mongolia의 영향으로 유럽에서 여러
민족의 이동한 것은 3-4 C 부터이다. 북유럽, 동유럽에서
넓게 분포 되어 살던 Goths(고트족), Burgundians(부르군트족),
Langobard(랑고바르드족), Angle(앵글로), Sachsens(작센족),
Franks(프랑크족) 등이 서서히 Roman의 국경 부근에 몰려들었고
혼란 이전의 평화가 구축되었다. 이처럼 Roman Empire와 이민족 간의
대립 상태가 유지되는 동안에 Roman은 지속적으로 변화를 겪었고
이 시기부터 박해를 받던 Christian 들은 황제의 결단에 따라 자유롭게
자신들의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고 새로운 Roman의 상징화 작업의 일환으로
Constantinus 황제 자신도 Christian로 개종(313)을 단행하게 된다. 또한
노예와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종교에서 점차로 대 가문과 귀족들도 황제의 종교를
갖게 되면서 드디어 Christianity는 Roman Empire의 국교가 되었다.
강조 하지만 Empire의 분리(395)는 서서히 진행되었고 그것은 지중해 동쪽에
위치하며 Greek Language를 사용하던 제국과 Latin Alphabet를 사용하던
서-로마 제국으로 분리됨을 뜻한다. Hun의 영향으로 Germanic People의 이동이
가시화 되었던 것이다. Hun은 유럽대륙 중앙을 차지하고 거대한 "유목민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결국은 이들에 의해 Roman-Germanic 왕국이 생겨났으며, 서쪽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Hun의 위협을 피하여 서로마 제국으로 이동해 간 여러
민족에 의해 새로운 이름의 왕국 즉 !! Roman-Germanic 왕국들이 건설되기 시작한 것이 이때쯤이다.

Hun과 대접전이 있은 후(대략 40년 후)Theodoric(테오도리크)
Roman의 왕이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Roman(West-Roman)은 종말을
고한 것이다. 훗날 East-Roman의 Justinianus 치세 Italy 반도를 합병하는데
성공하고 Sicilia Island마저 정복하지만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 이유는 당시 East-Roman 또한 Islam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해지면서
힘겨워 했던 것이다. Roman Empire의 종말은 허영과 사치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겉만 화려하고 속이 텅 빈 경박했던 문명(West-Roman)은 이처럼 허무하게 멸망되었다. 
어찌되었든지 6 C에 이르면서 Roman & Constantinople은 시대의 조류에
떠밀려 멀리멀리 간극이 벌어졌고, West-Roman은 앞서 설명된 것처럼 북방의
Germanic People 들에게 점령되었으며, Constantinople은 허울만 Roman이었을 뿐
Greece Empire의 중심지가 된다. 또한 한찬 번성하였을 시기 "야만인"이라고 경멸
하던 정복자와 다름없는 문화 수준으로 격감된다. Constantinople은 어떤 의미에서 과거의
전통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지만 문화 수준에서 보면 내리막길로 접어들던 시기이었다.
그리고 Christianity 종파들의 분열로 시작된 종교적 갈등을 치유하지 못한 채 "암흑기"
접어들고 만다. 이러한 와중에도 Christianity는 학문과 예술을 중시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불교의 사원"과 비슷한 수도원들이 다수 건립
되면서 그나마 시대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었다. 더불어
이러한 수도원 내부에서 조용하게 먼 훗날 갑자기 부상하는
새로운 예술이 싹트게 된다. 만약 !! 이러한 시기 수도사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 아마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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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sh Meat & Lime
Obika Mozzarella
이렇게 전혀 새로운 Roman-Germanic 왕국들은 지도자가 속한
부족에 따라 명칭이 정해졌고 국가의 명칭과 국경은 시시때때로 바뀌었다.
Germanic People에 의해 세워진 왕국으로서 최초로 세워졌으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왕국은 Burgund, Franks, West-Goth 등의 "삼 왕국"이며,
그 가운데 West-Goth 왕국은 Loire River → Spain 남부 지역에 이르기 까지 광대
하게 분포 되었고, Langobard은 North Italy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Anglo-
Saxon은 현재의 Britain Island에 정착되었으며, 이들에 밀려서 바다를 건너 Bretagne
(브르타뉴) 지방에 Celt People이 정착하기도 하였다. 또한 Hun처럼 Asia Steppe
지역에서 온 부족이 있었는데 자신들만의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던 Hungarian 들은 초원의
절대 세력 Mongol-Empire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고, 서유럽까지 밀려와 Donau River
유역에 정착하게 된다. Charlemagne가 죽고 난 후 결국 Franks 왕국은 왕위를 두고,
Carolingian Dynasty 그리고 Rhine River 건너편을 통치하였던 Robert 가문과 갈등 관계가 되었다.

여기서 Hugues Capet는 East-Franks 왕국의 왕이 되는데
그는 Charlemagne의 직계손이 아니었지만 주교의 지지로 Franks의
왕으로 축성(987) 받게 되면서 France 시조가 된 왕조로 위치를 잡게 된다.
분열된 Franks 왕국은 왕이라는 칭호이외에 여러 가지 호칭을 갖고 있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신성로마제국"의 왕이라는 호칭이다. 교황에 의해 황제가 된
Otto 1세(962-973)는 Charlemagne의 계승자로 인정받았다. 이로써 탄생한
제국이 바로 "The Holy Roman Empire(신성로마제국)" 이다. 신성로마제국은
Italy에 속하는 넓은 지역과 Provence, Bourgogne, Alsace, Lorrain(로렌),
현재의 Netherlands까지 지배하에 둔다. "신성로마제국 너머 동유럽 지역은 여전히
유목민들의 영토로 남아 있게 되었으며, 그곳에는 새로운 부족인 Slav People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북쪽에서 이동한 Slav 족은 서로 다른 무리를 이루고
살았는데 사용한 언어도 비슷하였다. 이들이 정착한 땅은 Czech, Slovenia, Croatia,
Poland, Russia, Ukraina 등으로 나눌 수 있고 그밖에 Central Asia 출신의
Bulgaria People 들은 "East-Roman Empire" 즉 !! Byzantium Empire의 북쪽에 정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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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ezia Woman
Gold Ring ...Cleopatra
Turning Point
Currency(주조 및 발행)
Germanic People의 대이동으로 많은 도시들이 파괴 되기도
하였지만 모든 도시들이 존속되었고, 주교들의 노력으로 도시의
기능은 점차로 회복되었다. 당시 도시는 종교 및 행정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상업적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중세의Champagne
같은 "정기 시"는 없었지만 소규모의 정기 시들은 존재하였고, 유통 세는
"화폐"로만 지불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유통 세, 염세"
국왕의 수입이 되었는데, 재정적로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국가의 재정 수입(징세)에 관해서는 징세 원을 두고 관리가 이루어졌고
Roman Empire의 "금화"가 여전히 사용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Empire의
경제 단위가 존속하였다는 사실이 이것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금 단본위제"에
의해 여전히 시행되고 있었지만 "은화 단본위제"는 "중세의 화폐제도"라고 할 수 있다.

Germanic People → Roman Empire의 화폐제도(금 단본위제)
Roman Empire → Carolingian Dynasty
Solidas(솔리두스, 금화) →Triens(트리엔스, 금화) → Denrias(데나리우스, 은화)

Roman Empire의 "화폐 제도"가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은
경제적 필요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점은
Marseille와 그 인접지역에서 다른 곳보다 오래 지속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Germanic People들이 지속적으로
금화를 발행하였고, 국왕 혹은 교회, 개인들의 재산 상황에 관한
사료에 "Gold"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서방에 상당량의 금이 축적
되어 있었음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금"이 금광에서만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없고 당시 활발한 교역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재화 유통)되는 것이다. 국왕들은 많은 양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고 효율적으로 정책을 펼 수 있었는데 그런 막대한 재원은 "정복
전쟁"
을 통한 전리품으로 확보되기도 하였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상업 활동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풍부한 재원과 지속적인 금화 유통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충분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세금은 화폐로 지불되고 있었고,
그리고 "대부 업"도 성행하였다고 한다. 시대적으로 "이자"는 합법적으로 용인되었던
것으로서 심지어는 교회, 성직자들 세속인들에게 고리를 받고 대부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업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대체로 Hebrew들이었다. → 대부 업 성행, 이자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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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douins ...Arab People
Seljuk Turk...
Islam → Jihad 개념이나 Christian → Crusade
개념은 비슷한 유사성을 보인다. 포교를 위한
전쟁에 적극적이었으며, 복종 강요하였다. 전쟁
만큼 야만적인 행위는 없지만 인류는 “신의 이름으로...”
무수한 전쟁을 해왔고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미화
시켜 왔던 것이다. 대략 Islam의 침략 전쟁의 흐름을 파악해 보자 !!

Syria-Palestine, Jerusalem 함락(638)→Byzantine
해군기지 Alexandria 공격(Egypt 병합, 639-640)
→Sasan Persia, Babylonia(641)→Cyprus(654)→Rhodes(652)
함락→Creta Island(672)→Italy South, Sicilia 공격→
North Africa, Cartago 장악(698)→Iberia Peninsula(711)
→South France 공격(720-732)→Persia를 통과 한 후 Turkistan
돌격하며, Indus River, China 서부 지방 도달(724)→Central Asia
사막지대→Black Sea 연안으로 진출→Black Sea-Caspie Sea사이의
Armenia 까지 병합 그리하여 Islam Empire는 Arabia Peninsula,
India, Iberia Peninsula, Black Sea-Caspie Sea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Crusade = Seljuk Turk(원인 제공) 참고로 Marmara Sea에
침입한 Islam 함대는 Byzantine을 해상 봉쇄하였다.
7년여에 걸친 해상 봉쇄로부터 Byzantine을 구한 것은
Greece Fire이었는데 이로써 Arab의 제해권은 일시에 붕괴된다.
Arab People들은 대체로 7-10 C 에 걸쳐 정치, 문화적으로
전무후무한 번영을 이룬다. Osman Turk의 지배를 벗어난 이후
정치, 문화적으로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한 19 C 이 후의 Arab
세계를 볼 때 Islam Empire의 비약적 성장의 배경은 그저 흥미로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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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mme De Constantinople
Temple of Jupiter
고대의 전통적인 가치가 단절되고, 결과적으로 동방 /
서방이 최종적으로 분리 되었던 것은 여러가지 이유들이
동시 패션으로...성립되어 급작스럽고 예기치 않게 발생되었는데... 
그러한 요인 중에 하나가 바로 !! Islam 세력의 확장과 경제적
폐쇄 정책에 따라 급속히 진행되었는데... lslam 공동체 일부로 형성
되었던 Africa, Iberia Peninsula의 경우 Baghdad의 궤도 속에
진입하였고, 지중해적 통일성 종말을 고하는 시점이 되었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전혀 다른 문화가 출현하게 된다. 이제 지중해는 Islam의
호수가 되었으며, 서-지중해는 유럽의 사상과 교역의 통로로써 위치를 상실
하였으며, "서방은 봉쇄" 되었다. 따라서 스스로 자생하는 도리밖에
없었는데 이로 인해 역사상 최초로 생활의 축이 북-유럽으로 옮겨졌으며
왕권을 상실한 왕조가 쇠퇴하며, Germanic People적인 새로운 왕조인
Carolingian Dynasty가 탄생되기에 이르렀다. 위기 의식을 느낀 교황은 East-
Roman 황제가 Islam과의 투쟁에서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할 수 없게 되자
그와 결별하고 새로운 왕조와 "짝짓기"를 시도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질서와
결연을 맺게 되는데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변화의 결과가 Charlemagne
이후에... 명확해 진다는 점이다. 또한 Roma Church의 봉건성에 지배된
유럽은 지역별로 새로운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Middle Ages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고대의 전통이 사라지고 새로운 요소들이 떠오른 것은
바로 이러한 혼란기에 성립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새로운
제국이 건설(800)되고 완성됨으로써, 서방에 새로운 Empire를
탄생시키고, 서방과 동방의 단절을 확정지었다. 이것은
Byzantium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최후의 증거이기도 하다.
7 C Asia Minor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부 지역은 확대되고 있던
Islam Empire로 흡수된다. North Africa를 횡단하여 전역으로
확대 되었는데 성장이 시작되던 첫 번째 세기만에 Morocco에 도달
하였고, Strait of Gibraltar을 건너 South Spain 까지 이르렀다.
동쪽으로는 Islam 공동체가가 Persia, Afghanistan, 그리고 India, China의
서부에 이르기까지 확대된다. 더불어 이렇게 형성된 새로운 경제는
좀 더 확장된 개념으로 그 역할을 하였으며, 훗날 유럽도 가세하게 되었으며,
Venezia, Genova, Milano, Firenze(남부 지중해 연안 국가)는 북서
유럽과 중동 체제와 연결시키는 고리로 존재하게 되었다. 8 C에 이르면
Charlemagne가 이미 발달된 체제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 재편을 시도한다.

그는 스스로 서방의 황제임을 자임(800)하였고, 교황은
이를 승인한다. 따라서 서유럽은 Roman Empire 붕괴(서로마)
이 후에 침체되어 있던 파편적이고 고립된 위치에서 벗어나기 시작
하였으며, 점차로 일정부분 발전을 이룬다. 그러나 Charlemagne
사후에 다시 제국은 분열되었고, 이민족의 침입을 겪게 되면서 9 C
말경에 북서 유럽에서만 초기 봉건제라고 할만한"방위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것은 Roman-Germanic적 선례를 융합시킨 것이다. 이 후 France와
저지대 지역에서 봉건제라고 불리는 사회 형태가 실질적으로 제도화 되게 되었다.
또한 "봉건제"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 견고한 기반을 수립하였고,
소규모 교역 중심지, 성곽이나 수도원의 보호 구역 내에서 성장하거나 부활하였다.

이곳에서는 지방 영주들에게 상업상 봉사하는 답례로
특별한 혜택과 보호를 받았던 상인에 의해 상품들이 교환
될 수 있었는데 10 C 말에 이르면 유럽은 약탈자들에 의해
혼란을 겪게 되며, West-Viking, East-Hungarian, South-
Islam
세력이 동시 패션으로 몰려들었고, 하류지역 Normandie
지역에 정착하게 되는데 Norman의 경우 Seine River 그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Normandie 공국이다. 또한 군사적 요충지 Italy
Sicilia Island를 점령하기도 하였으며 Britain의 경우... Guillaume
(기욤)에 의해 점령(1066-1087) 되고, 그는 스스로 왕이 되었다. → William 1세

국제 교역의 소규모 상품 교환 장소 → 육로, 해로가
교차되는 정주지 사실 그때만 해도 도시들은 두려움 속에서
있었지만 이제는 요새화(군사적) 규모의 고립된 영토를 넘어서
팽창할 수 있게 된다. 11 C 북서유럽은 자급자족적인 봉건 영지들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교환을 위해서 더 많은 잉여 생산품을 생산할
능력을 갖추었고, 더 큰 규모의 통합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도시의 수는
급증하였고, 몇몇 도시는 해안까지 내려와 자리 잡게 된다. → Dark Ages(암흑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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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nival of Venice
Francesco Hayez
Turning Point
Germanic People이주민들이 놀랄 만큼 빠르게 Romanizacao
되었던 시기가 현실화되었던 것은 Latin Alphabet를 사용하던
토착 여성(Roman)들과 결혼에 의해 남성들(Germanic)이
Latin Alphabet를 습득해 가면서 가능해졌다. 즉 !! 농업, 법류,
수렵, 전쟁 등에 관련한 Latin Alphabet 어휘들 이외에 일상에서 사용
되던 언어의 중심에는 Latin Alphabet가 있었다는 개념이다. 반면에
Islam 침공이 후 지중해 세계에서 초래된 혼란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언어의 변화를 들 수 있다. Latin Alphabet → Arab Language
대체되었고, Spain에서 Latin Alphabet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Islam
세력에 의해 박탈당하고 만다. 이제 Iberia Peninsula 에서는 더 이상
"학교, 수도원"등이 존재하지 않았고 교양 있는 성직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피 정복 민들은 "문어"가 아니라 Romance Languages의 "방언" 만을 사용하였고,
정복 이전에 성공적으로 사용되었던 Latin Alphabet는 사라져 버렸다. 예컨대
Gallia 지방의 혼란 상황은 심각할 정도이었는데 Merovinger Dynasty Latin
Alphabet는 조잡스러울 정도로 부정확하였고 당시만 해도 그것이 상용 Latin Alphabet이었다고 한다.

주교들과 원로원 의원들은 여전히 Classic Latin Alphabet
사용하였고 일반적 대중(속인)들은 문맹 화 되어갔다. Roman Empire
내에서 어디에 있거나 의사소통이 가능하였던 Latin Alphabet는
"문어"인 동시에 "구어"였던 것이다. Latin Alphabet는 특별히 교회에서
사용하였는데 세속인들도 Latin Alphabet를 학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8 C 에 이르면 이러한 Latin Alphabet는 혼란 와중에 소멸될 운명에 처하게 된다.
정치적 무정부 상태 도시와 상업 및 행정조직 그리고 학교의 소멸 등으로
Latin Alphabet 자체의 존속이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Latin Alphabet는 세속화 되어
각 지방에 따라 다양한 방언들로 변모되었으며, 성직자들을 제외하고
누구도 Latin Alphabet를 사용(800)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러한
시기 Latin Alphabet는 일상어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방언들이 난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방언에 의해 후일 여러 개의 언어체계가 갖추어졌고,
수세기를 거치며, Latin Alphabet는 그저 학문적인 언어로써 위치하게 되었다.
이것이 "중세"의 특징 중 하나이면서 이러한 현상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 시기
부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Britain Anglo-Saxon의 개종이다.

이것은 Gallia를 통하지 않고, 곧바로 지중해를 통해 전파된
Christianity에 의한 것이다. Ireland(Celt) 출신 수도사들에 의해
시작된 개종운동을 촉진시킨 것은 Pope Gregorius가 파견한
수도사(596)들에 의해 의해서 이었다. Latin 종교와 문화가 소개되었고,
Roma의 영향력 아래 개종되면서 그들은 매력적인 언어를 습득하게 되었다.
7 C 경 Anglo-Saxon은 그 학식이 전 유럽을 통해 놀라울 정도의 향상을
가져 왔는데 Charlemagne 치세에 일어났던 "학예 부흥"은 Anglo-Saxon의
수도사들의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의 목적은 Merovinger Dynasty Church가
하지 못했던 Christianity을 전파(Germania)하는 것이었으며 이전 목적은
Carolingian Dynasty 정책과도 일치한다. 그 자신 또한 문맹이었던 Charlemagne는
교회를 부흥시키고, 학예를 일으키는 일에 전력을 다한다. 이렇듯 그의 노력으로
북-서유럽은 학예 상의 중심지로 정치사상의 중심지로 남방을 대신하게 되었고,
지금부터 지중해에서 계승한 문화를 전파시켜 나간 사람들은 북방의 Anglo-Saxon이었다.
해협을 건너 대륙에서는 일상어이었던 Latin Alphabet가 세속 생활의 필요에 따라
변형된 Latin Alphabet가 아니라 지중해 연안의 학교 등에서 그 시기 통용되었던 Latin
Alphabet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Anglo-Saxon은 언어의 개혁자인 동시에 교회의 개척자가 되었다.

Carolingian Dynasty의 Renaissance는 고대
전통의 부활인 동시에 Islam 교도가 지중해 지방을
장악함으로써 초래된 Roman 전통의 단절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적인 움직임은 대체로 문맹화가 진행되어 가면서
발생되어 졌으며, 교육의 부재로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조차...
귀하게 여기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귀족들조차 Latin Alphabet로
대화가 불가능하였고 읽고, 쓸 줄 몰랐다. 따라서 지중해
연안에서 화려하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들은 북서 지역으로 이동
하였고, 이러한 시기(중세)의 세련된 것들은 모두 북-서지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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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t Kingdoms of the Christian Orient
Poland Wieliczka
Sicily Selinunte Temple Hera
Middle Ages "폐쇄 경제"가 나타나기 이전 상당량의 Grain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었다. Vandal이 지배하던 Africa는
Grain & Olive의 재배로 여전히 번성하였고 Gallia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경작이 유지되고 있었다. Roman시대 Grape 재배가
이루어졌던 곳에서 지속적으로 재배되고 있었던 상황으로
Roman Empire(동방 / 서방) 가운데 동방의 문명은 서방의 문명
보다 뛰어났으며, Byzantine Empire가 중심이 되어 해로를 통해
Venezia 및 서방과 교류가 이어졌다. 당시 Syria는 "대상"이
China & Arabia에서 도착하는 곳이었기에 지중해 연안 상업지역
중에서도 가장 활발하였던 곳이다. Syria 선박을 통해서 동방의 향료와
공산품(생필품)들이 수출되었고, 거의 모든 지중해 항구에서 Syria People
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내륙으로도 진출하였는데 그들이 활동하던
지역은 Damascus, Antioch, Alexandria, Spain(Castilla), France(Gallia),
Cartago, Britain, Roman Danube River 주변에서도 정착 하였다고 알려져 왔다. 

Syria, Jews, Greece, Phoenicia(Cartago) People
들은 주로 부유한 자(상인)들로서 엄청난 "부"를 이루고
있었다고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해로를 통해 이동되었고
정착하였다. 특별히 지중해 연안의 섬들과 인접하고 있던 곳에서
상당수의 Jews 들이 분포(Diaspora)되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을 파악할 수 있다.Jews들은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였지만 압도적
다수는 해양 산업과  "노예 상업"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상업 및
금융업에 기여하였고 유럽사회에서 상당한 Issue를 만들어낸 족속
들이라고 할 수 있다. Jews에 해당한 강제 개종, 추방정책과 Council of-
Clermont(클레르몽 공의회)에서는 Jews 들은 재판관이 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Merovingian Dynasty 시대에는 Hebrew & Christian의
결혼조차 금지시켰고, 연회에 참가할 수 없었던 부당한 규정도 있었다.
그리고 Jews들은 Christian 노예를 소유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항해는 일반적으로
Bordeaux, Nantes와 같은 작은 항구를 거쳐 Britain을 향하였고, Roman
치세에서 활발하였던 Belgium-Utrecht(위트레흐트), Quentovic(캉 토 빅)은
여전히 해운 운송지의 중심지로서 살아남게 되었다. 이곳은 주로Flandre "직물"이
유통되었던 곳으로 Syria, Jews 들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해당지역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졌다. 이러한 시기 상업이 사치품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고가의
사치품들은 주로 동방으로부터 유입되었던 것이며, 모든 것의 중심은 Constantinople에 의해 주도된다.

주목되는 것은 당시 교역 품 중에는
Syria Wine(Gaza)에 대한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상당량의 Wine이 유통되고 있었음을 인식시켜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교역이 "보석과 의류" 제품에 국한
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동방과 교역에서
가장 중요하였던 것은 "Spices"이었다. Roman 시대에는
India, China, Arabia로부터 많은 종류의 Spices가 전해졌고,
Germanic People 시대 때에도 여전히 Spices가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일반적으로 유통되었던 것들 →
Papyrus, Oil, Pepper, Cumin, Clove,
Cinnamon, Herb, Pig, Almond,
Date Palm 주목되는 것은 부유하지
않더라도 Pepper는 Salt 만큼이나 필수적인
것으로 여겼으며, 비교적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Papyrus의 경우 Pepper처럼 대량으로 소비
되던 상품으로 Egypt Empire 전체에 사용되었던
Papyrus를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던 시기이기도하며,
당시에는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참고적으로
Oil도 상당부분 소비되고 있었는데 Oil은 식용 자체적으로도
흔하게 사용되었지만 Gallia, Spain으로 많은 양이 유입되었다고 한다.
Oil은 생산량이 풍부하여 교회의 조명에도 사용되었는데 당시
Oil의 최대 생산지는 Africa이었다. 이러한 상품의 유통은 Islam
침공 때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당연하지만 Africa와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구나 Gallia, Spain에서는 "내륙 교역"에
"낙타"를 이용 하였다는 사실은 그저 흥미로울 따름이다. → Cartago를 통해 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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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ezia Camauro
Venezia Rialto
한편 내륙지방에서는 Syria, Jews 상인들이
동방으로부터 상품을 수입한 듯 보이지만 그들은
서방에서 동방으로 상품을 수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품 중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것은 "노예"이다.
5 C 이후에도 가내 "노예 제도"가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Germanic People 침략 이 후 노예 제도와 농업 제도는
상식화 되어갔다. 물론 전쟁도 노예의 수를 증가시키는데 일정
부분 역할을 해주었는데 이러한 관행에 교회는 성사를 허용하고 혼인할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노예의 주변 여건을 개선하였지만 원칙적으로
노예제도를 비난하지도 공격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노예는 모든 분야에서
부유한자들을 위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다. → Marseille, Praha = Slav, Moor

Import → Spices, Silk, Papyrus
Export → Salt, Slave, Woven Stuff, Dress, Wood, Dyes

지중해 지역의 "예술"은 Roman Empire
지배하에 Egypt, Persia, Syria의 영향아래
점차 뚜렷해지고 있던 동방 화 과정이 계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서방도 이러한 점진적인 동방 화에
벗어나 있지 않았는데 특히 Goth People은 Russia의
평원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Black Sea를 경유해 그들에게
도달한 동방적인 것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Brooch, Necklace, 금 세공품들은 Samaria & Persia 장식
예술품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Roman-
People들의 Ars Barbarica(만족의 예술) 이라고 일컫던 예술을
배우게 되었고, 이러한 예술은 Germanic People의 Roman
침공이전에도 Empire 내에 유포되었던 것이다. 서방은 Byzantium,
Syria, Egypt에서 대규모로 유입된 금 세공품이나 상아 제품들로
부터...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없으나 6 C-7 C, 8 C에
이르면 점차로 Syria, Byzantium 예술의 흔적들이 확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Persia 예술의 영향은 Persia Rug의 수입에
의해 지중해 연안에 도입된 것이다. Egypt Copt Art의
영향은 주로 직물과 Alexandria의 상아 제품을 통해
도입되었다. 예컨대 지중해를 경유하여 유입된 동방예술은
역시 "동방적인 만족의 예술과 접목 상호 침투"가 이루어졌던
것이며, 남쪽에서 들어와 예술이 고도로 발달된 기술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세한 영향을 끼쳤다고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동방의 예술은 France(Gallia), Italy, Africa,
Spain의 어디에서나 눈에 띌 정도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서방 예술 전체는 Byzantium의 자취가 남겨지게 되었다. 또한
결론적으로 서방의 예술은 Byzantium Art 쪽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지중해는 Constantinople의 "예"를 따르게 된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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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ypt Art...
Strait of Gibraltar-Aegean Sea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Egypt-Africa 해안, Italy, Gallia, Spain의 연안까지 Roman
Empire에 의해 건설된 문명 공동체가 종말을 고하는 징후는 최소한
7 C에는 없었다. Germanic People의 침입 이후에도 유럽 세계는
고대 지중해적 성격을 잃지 않고 있었으며, 모든 활동은 지중해 연안에
집중되어 있었고, 육성되기도 하였다. Muhammad가 출현하기 이전
시기 Roman Empire는 Arabia 반도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막의
유목민에게 대항하여 Syria를 보호하는 성벽을 쌓은 것으로 Syria 장성은
Rhine, Danube River에 이르는 장성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지역을 취약 지역으로 여기지도 않았으며, 많은 병력을 주둔시키지도 않았는데
반도의 Bedouin People는 부족 문명 수준에 있었고, 종교도 주상 숭배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서로 반목하였으며, Roman
Empire 입장에서 이들을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Muhammad가
새로운 종교를 창시 하였을 때 내부의 혼란 때문에 그의 종교적 활동에 주목하지 않았고,

그가 사망(632)하고 얼마 뒤 일어날 재앙의 조짐은
예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방위를 강화하는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Germanic People의 위협이
항상 Byzantine 황제의 주목을 받은 반면 Muslim의 침공은
황제로서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Islam의 침공의 성공 요인은
Byzantine, Persia Empire가 서로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양 제국 모두 약화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Europe &
Asia의 격변을 초래한 Muslim의 진출은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신속한 승리 획득은 Hun(Attila), Jinghis Khan, Timur Empire
거둔 승리에 필적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제국들은 Islam Empire에
비하면 단명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Islam의 급속한 확산은
Christianity의 완만한 전파에 비하면 진정한 기적이었다. Muslim들은
무너지고 있던 Byzantine Empire의 핵심 지역을 순식간에 점령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Islam 침공이 예기치 않았다는 점, Byzantine 군대의 혼란 상황,
Syria의 "단성론 자"들과 Nestorius(네스토리우스파) 및 Egypt Copt
Church의 Byzantine Church에 대한 종교적, 민족적 불만, Persia Empire의
허약성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Germanic People보다 수가 많던
Arab People들은 정복한 문명 선진국의 주민들에게 동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것은 Germanic People은 Christianity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지만 Arab People들은 새로운 종교에 의해
고무 되어 있었던 상태로 그들의 동화를 막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 이유는 종교 이외에 다른 분야에서 Arab People들은 피정복
문명에 대해 Germanic People과 마찬가지로 편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초기에는 광신적이지도 않았다. 피 정복 민들을
개종시키는 것도 기대하지 않아 보였고, 오직 "유일신 알라"와 선지자
Muhammad에게 복종할 것만을 요구하였다. 개종이 아니라 복종 정복 이후
그들은 피 정복 민들의 과학, 예술을 받아 들였으며, 자신들이 유용
하다고 생각되면 피 정복 민의 제도를 채택하였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지배하였다는 점에서 Germanic People과는 달랐다. 피 정복 민들은 그들의
종속 민이었으며, 이들에게만 세금이 부과되었다. 또한 이들은 신자 공동체에서
배제되었고 그 장벽은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피 정복 민과 Arab People들 사이에서는
융합이 가능하지 않았다. Muslim 정복지역에서는Islam→Roman Law, Arab Alphabet→Greek

결과적으로 Islam의 등장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가
지중해 유역에 세워졌다. 완벽한 단절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단절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후 상이하고 적대적인 문명이
지중해 유역에 존재하며, Christianity 중심의 지중해가 장벽이
되었다. 바로  !! 지중해 공동체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Islam 세력은 지중해 전역을 장악하려 하였고, Caliph의 함대가
Byzantine 해역을 침공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함대는 Cyprus를 점령하였다.
Asia Minor 연안에서 황제가 직접나선 해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들은
Rhodes Island를 점령하였고, Creta & Sicilia를 공격하게 된다. Cyprus
Island에 해군 기지를 설치하고 나서 Constantinople을 포위하였으며,
Constantinople은 해전 용 "액체 화약"을 이용해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Battle of Islam
Arles & Avignon 함락 이후 불세출의 인물에 의해
Avignon은 탈환되고, Narbonne에서도 승리하지만 도시를
탈환(739)하지는 못하였다 이어서 Provence 공격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Lombards의 도움으로 그들은 격퇴시킨다. 그 후 Provence
해안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간헐적으로 지속되었고, 결국 장악
하지만 Pippin 3세가 격퇴시킴으로써 Provence 원정이 종말을...
고했는데 적어도 서유럽부터 Islam의 팽창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Muslim은 수차례 Sicilia 원정을 감행하였고, 결국
Palermo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어서 Siracusa → Messina
함락함으로써 Sicilia는 완전히 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비잔티움이
Sicilia에서 Muslim과 싸우는 동안 Charlemagne는 Spain 국경에서 Muslim
Army과 격정을 벌였으며 그는 Zaragoza에서 패배하면서 그의 후위 부대
마저 궤멸된다. 이후 그는 방어에만 치중하였다. Charlemagne 사망 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일로로 치닫는데 Italy가 Islam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Brindisi, Taranto 등이 약탈(838)에 휩싸였고, Bari 정복(840) 그리고 Byzantine &
Venezia 함대는 패배한다, 이 후 Islam 세력의 정복활동이 지겹도록 계속되면서 이 후
서-지중해는 Islam의 호수가 되었다. 함대를 보유하지 않았던 Franks 제국은 무력하였으며,
Napoli와 같은 도시는 상업적 이익을 고려해 Byzantine과 협력하기보다 Islam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역설적이지만 Sicilia가 정복당한 것도 Napoli와 같은 도시의 배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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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thdox Church Temple Saint Sava
Temple Mou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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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ercook | 2009/06/02 12:06 | History ...Package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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