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stic Roman Leg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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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Seems to Be Based on Discoveries at La Tene Rather Than Lindow Moss

Gladius...Roman Legion
Mycenae People 들이 지중해 동쪽에서 전성기(기원전 1200년 이전...)를
구가하던 시절 Italian Peninsula 남단에서 북단 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서
작은 촌락들이 성립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Greece Mycenae & Italian Peninsula에
살아가던 족속들은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같은 종류의 토기를 만들어 사용
했다는 점에서 그들이 가까운 족속(이웃 사촌)들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강조하자면
Greece에서  "암흑의 시대" 가 도래할 무렵 Italian Peninsula의 "아펜니노 문화권"은
쭉 뻗은...산맥을 종단하는 산등성이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었던 수많은 촌락들이
핵심을 이루며 형성되었고,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로서 존재하면서
나름대로 꾸준한 발전을 이루고,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기 토기와 갑옷, 무기 체계에서 전체적으로 상당한 진보를 가져왔다고
확인되는데 본질적으로 Italian Peninsula의 역사는 고고학적으로 청동기에 해당되고 있으며,
이 후 "철" 로 만든 무기(대략...기원전 900)가 서서히 반도 전역에 확산 되면서 인구 증가와
함께 촌락들이 초기 형태를 벗어 버리고, 하나의 도시 형태를 확립시켜 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하나의 특징적 사실은 앞서 설명된 부분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 그들의 관습 만큼
다양한 "매장 문화"를 통해 살펴 볼 수도 있을 듯싶다. Appennino Range & Tiver River를
경계로 "포사-아풀리아- 아드리아" 문화권은  "매장"이 주로... 행해졌으며, "골라세카-빌라노바-
라티알-에스테"  문화권은 "화장" 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특이한 점으로 라티알 족속 들은
"재" 를 유골 단지가 아니라 작은 "오 두 막"에 넣었다는 이다. 또한 이들에게 "오 두 막"은 죽은
자의 거주를 위한 것으로서 살아있는 사람들의 가정을 복제한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만
해도 사용되던 문자는 비록 !! 없었으나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대략 40 여개의 서로 다른 언어와
방언으로 분류되었고, 공통적인 언어로 묶여졌으며, 점차로 Greece People 들의 영향를
받기 시작하는데 가장 먼저 "빌라노바 문화권"과 최초의 접촉이 이루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무덤에서 출토된 내용물들 중에 상당한 양의 Greece Type-
Amphora가 발견되었기 때문으로 당대 Greece 상인들의 접촉으로부터
문화적 교류(종교, 법률)가 활성화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기 "제우스-헤라" 여신의 신전의 규모도 확장되던 시점으로 좀 더 북쪽의
Delphoe(델포이)도 마찬가지로 확대되어 있었다. 더불어 "델로스 섬"에서는 아폴로,
전쟁의 여신 Artemis(아르테미스) 신전의 규모도 확장되었다. 따라서 신성한 모든 장소는
Hellas(헬라스) 적인 것으로서 말하자면 Geece Alphabet를 사용하는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 확산 되어 있었던 셈이다. 또한 도시들은 Amphiktyonia(암픽티오니아) 라고
해서 사원이나 영묘를 유지 보존하는 책임을 나누어 갖게 되었다. 괄목한 것은 이러한
시기에 Italian Peninsula에 상인이 파견되었던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인데 Greece-
People들의 식민시 건설(확산)은 사실상 도시국가들 사이에 내부적 알력에 의해 이뤄진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구가 팽창하면서 재화 수요가 증가하였고, 곡물, 금속,
석재 등이... 수요가 극심하게 요구되면서 잠시 !! 혼란 속에 놓여지기도 했고, 토지(땅) 문제는
절실한 것이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더구나 Greece는 지리적 요소(협곡, 바다)를 경계로
Polis 들이 형성되어 있었기에 Mesopotamia와 마찬가지로 Greece Peninsula 또한 제한 적인
규모의 경작지 이었던 셈이었다. 토지(땅)는 "가족" 이라는 틀 속에서 후손(아들)들 에게
똑같이 분배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이로 인해 "가족" 마다 토지의 감소 요인을 제공하였고,
점차로 아들들이 다수 출생하면서 토지 감소의 효과는 가속화되어 나누어 줄 토지가 더 이상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토지 분쟁이 증가되었으며, 이러한 시기부터 뇌물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 식민 개척자들이 나타나 숨통을 열어주게 되었고, 차차...안정을
찾아 간다고 확인되는데 당대 최초의 개척자들 중 주목되는 인물은 역시 !!Corinthos의 귀족
"아르키아스" 이며, 그는 Sicilia(시칠리아)에 파견되어 Siracusa(시라쿠사)를 구체적으로 건설하게 된다.
Arch of Titus Menorah-Siege of Jerusalem
Minotauros...
Hellenism, Forerunner of Western Culture Started with Alexander the Great
또한 다른 변화로서... 좀더 이전에 "키메르 인"이 소아시아로 밀려 들면서 "프리지아
-리디아" 인들이 자연스럽게 건너편 Bosporus-Hellespont 넘어...트라키아로
내쫗기게 되어 여러 족속들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밀려가는 연쇄적 반응이 발생되었고...
대체로 Italian Peninsula-Northern로 이주된 족속들은 Vila Nova(빌라노바) 지역으로
스며들어 현지 토착민들과 섞이고, 거래하며 "통혼" 하게 되었고, Asia Minor에서 다이렉트로
피난처를 찾아 이주한 족속들도 합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상호 간 세력들이
융합됨으로써 기존의 토착적인 전통과 동쪽으로부터 이주해 온 족속들의 전통적 가치들이 결합
되면서 하나의 "문 화 권"를 탄생시켰는데 이것을 Etruria 문화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Persia People(Cyrus = Gores)의 팽창시기 생존의 위협을 느낀 Phokaia or Phocaea People
들이 소아시아 지역에서 지중해 서쪽 지역 까지 상업적 이주가 진행되었던 것은 상당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는 대다수 Greece Polis 들의 식민 활동이 활성화 되기 전으로서 
Asia Minor 지역으로부터 이주한 Phocaea People 들의 목적은 지중해 연안에 Apoika(아포이키아)

즉 !! 식민시(植民市)를 건설하기에 앞서 일차적으로 교역을 위한 거점 도시를
확보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은 "Corsica Island" 에 새로운 거점 도시를
형성시켰고, 최종적으로 Gallia-Southern 지역에 일부 카르타고 상인세력을
밀어내고 "마살리아" 를 건설하게 된다. 바로 !! 이렇게 성립된 Apoika-Marseille
훗날 Phocaea People들의 상인 조직에 의해서 번영하게 되며, 이곳을 고리로서
역사속에서 Celt People 들과 연결되었다. 당대 Celt People이라고 하면 인도-유럽계로서
오래전에 Caspie Sea & North Sea 인근 지역으로부터 이주되었던 족속으로 이들은
그저 무늬만 같았을 뿐이지 일관된 정체성 없이 흩어져 살아가고 있던 족속들이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문 맹"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뿌리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며, 단지 그들의 
무덤과 부장품을 통해서만 접근 할 수 있다고 한다. 마살리아가 건설될 즈음 현재의 Austria 에서
남쪽 방향으로 "르와르 강" 까지 독특한 매장 문화가 확산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문화를
Hallstatt(할슈타트) 문화이라고 한다. 또한 지리적으로 다뉴브 강 남쪽으로 묘지와 "소금 광산"
있던 곳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마살리아가 급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교역에 따른 거점
도시로서 지리적 위치에 기인하였으며, Phocaea People들의 성장은 당시 !! 지중해 해상
교역 판도에서 Greece & Etruria People 들에게는 위협적인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반면...
Greece Polis 들의 식민시(植民市)들이 대략 이러한 시점부터 점차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더불어

Etruria People 들도 급격하게 변화되었던 상황에 따라 결속되어 느슨
(정치적으로 분리)하지만 강력했던 동맹체를 만들게 되었고, 이러한 시기
Greece People 들의 "인보동맹(隣保同盟)" 과 맞서기 위해 카르타고와 순간적
이었지만 짧고, 굵은 동맹체을 결성 하기에 이르렀다. 당대만 해도 카르타고는
North-Africa 지중해 남단에 위치하여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었으며, "국가의 틀"을
완성한 도시국가로서 이때가 도시가 건설된지 대략 300 년 정도 흐른 시점이었다.
일찍이 Phoenicia People 들에 의해 세워진 "시 민 시" 이었으나 Cyrus = Gores에 의해
"티레와 시돈"이 정복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Phoenicia Type의 도시로서... 독립적
이었다고 할 수 있다. Phocaea People들이 점유한 지중해 서쪽 지역의 판도는
기본적으로 다양한 세력들에 의해 복잡하게 꼬여 들어 갔었는데 카르타고의 개입으로
현실적 "힘의 균형" 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판도에서 Greece의
"인보 동맹"에 대항하여 Etruria & Carthago는 전쟁(기원전 535)을 시도하였고, 전투에서
승리한 후 Etruria People 들은 그 어떤 저항없이 무역 식민시를 건설하였으며, 바로 !! 이때가
Etruria People들의 절정기 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권력(정치적 쇠퇴기)을 유지하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Italian Peninsula → Tiver River 이북 지역까지 확고한 영역을 차지했던
주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반면...Phocaea People 들은 Italian Peninsula"레기움" 으로
한발 물러서게 되었고, 마살리아는 이 후 Corsica Island와 유대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더불어
 
Etruria & Carthago의 협정은 카르타고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부여 했는데
이때부터 Sardegna(사르데냐)의 지배권이 카르타고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찌되었든지 Greece People들의 식민시는 이후...끊임없이 팽창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훗날...Greece의 힘이 약해질 즈음...그러니까...Etruria & Carthago
People 들이 지중해를 누비는 동안 Urbs Roma 역시 !! 규모와 세력이 점차로 확장되었고,
비교적 이러한 시기 Gens(사비니, 라티알, 에트루리아) 그리고 "부의 성취도"에 따라
사회 계층이 형성되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초기 Roman Legion의 형성 과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 인" 들에게는 왕정(王政) 시대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도시를
방어할 의무가 생겼던 셈이다. 자고로...Urbs Roma의 형성은 "무기의 힘"에 의해 비롯 되어
졌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도시의 방어체계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예컨대...
적대적 세력이 도시 전체가 방벽(3 군데...)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심장부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첫 번째 다리로 불리던 Pons Sublicius(목조 다리)를 반드시 통과하여 티베르 강을
건너가야만 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전술적 선택을 최소화 시킨 것으로 여기에는 역사 속에서
고귀한 투혼으로 기록된 "호라티우스의 다리 사수"에 관한 신화적인 이야기가 지금도
간드러지게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Etruria People들은 끊임없이 Urbs Roma를
위협 했고, "로마 인" 들은 지칠줄 모르고 방어에 충실하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Roma Vs
Etruria People
 사이에  전투가 소강 상태에 접어든 시점이 찾아 왔으며, 양측은 평화 협정을 맺게
되었으나 결과론적인 이야기로서 "로마 인" 들은 지배 세력이었던 Etruria People 들을 물리
치고, 마침내 세력의 균형을 이루는... 성취를 달성하였다. 게다가 중요한 사실로서 "로마 인"들은...

카르타고 인들과도 조약(우호 관계)을 맺게 되면서 국제적으로도 티베르 강 남쪽...
연안이 Urbs Roma의 영토로 인정 받게 된 것이었다. 즉 !! "로마 인" 들은 카르타고가
정치적으로 팽창하는 것을 우려했고, 반대로 "카르타고 인" 들은 Urbs Roma가 지중해 교역망을
점유하는 것을 미리 막아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시기 "에트루리아 인" 들은
어느 곳에서도 모습을 드러 낼 수 없을 정도로 쇠퇴기에 접어 들게 되었는데 그들은 포 강 유역
에서 영향력을 상실했고, 전투 능력이 탁월했던 Celt People 들이 이러한 시기 부터 Italian Peninsula
북부지역으로 몰려 들어와 Etruria Peole들을 격파하고, "메디오라니움" 이라는 촌락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것이 Milano(밀라노) 이다. 또한 이러한 침입은 지속적으로 이뤄지면서 결과적으로
4 차례의 침입을 거치며, Alps Mountain → Po River 유역에 걸쳐 모든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Appennino Range 끝 자락에 거주하던 "에트루리아 인" 들을 몰아내고 그곳에 정착 하였던 것이다.

Etruria → 베이움, 다르퀴니, 볼시니 / 12 개 도시 연맹체
Greece → 모나코, 니스, 생트로페 / 무역 거점지로 출발한 도시, 인보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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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lstatt Salzbergwerk
Theseus-Minotaur Ramey Tuileries
Salt Lamps...
Turning Point
Celt People & Carthago People 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본격적
으로 등장하며, 두각을 나타내던 시기 Urbs Roma는 왕(Rex)을 몰아내었다.

Gillia People = Celt 들의 침입이 직접적으로 로마 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시기(기원전 390) 만약 마살리아의 Greece 상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과연 평화 조약이 성립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지만
일단은 "로마 인" 들은 파괴 된 Urbs Roma 재건에 나서게 되었고, 훗날
어지러운 흔적으로 기억되는 단세포적인 도시를 형성시키게 된다. 여기에는
이 후 권력이 있는자와 권력이 없는자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선행되었으며,
심각한 내부 사회의 분열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인지하더라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Celt 문화 권의 커다란 움직임의 배경에는 갈리아 지역의 인구 팽창과
함께 급격하게 세력의 교체가 성립되어 가던 시기로서 Hallstatt(할슈타트)
무덤에서는"마차가 아니라 바퀴가 두 개 달린 전차" 가 부장물로서 출토되었고,
묘지 일대는 철저하게 약탈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후대의 Celt 문화는
(매듭과 곡선, 미로와 같은 선을 장식으로 사용 !!) 남쪽 라인 강 서부 현대의 Swiss-
La Tene(라텐)에서 광범위하게 발견 되었다고 해서 "라텐 문화" 라고도 하는데 켈트 적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곧 !! "라텐 문화" 라고 봐도 무방하다. "라텐 문화" 의 특징은
Hallstatt 문명을 압도 했다는 것으로 내부적인 주도권 싸움이 결과적으로 Italian-
Peninsula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고, 현실적으로는 켈트 족속의 이주가 Alps Mountain을
넘어 서서히 진행되면서 Etruria People 들이 희생된 것이었다. 더구나 Celt People
들은 먼 과거 "거석 인류의 후손"들이 머물던 바다 건너 Britannia에 까지 진출하여 정착하게
되었는데 참고로 중부 유럽의 고고학적 시대 구분이 동쪽-서쪽이 다르듯이 일반적으로
신석기 시대(기원전 2400 이전...), 동기 시대(기원전 2300-기원전 1800), 초기 청동기 시대
(기원전 1800-기원전 1450), 중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450-기원전 1250),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250-기원전 750) 그리고 철기 시대(기원전 740-기원전 400)로 구분되며, 할슈타트
문명에 앞서는 초기 청동기 촌락들이 Alps Mountain 넘어 북쪽에서도 발견되었다. 고고학자
들은 이러한 청동기 시대 인도-유럽계통의 문화를 본질적으로 매장 문화를 통해 봉분 형과 화장 형
으로 나눴고, 이러한 문화적 특성들이 철기 문화로 발전되면서 할슈타트 문명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또한 시기적으로 에트루리아 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Greece Polis 들의 식민시 건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와 겹친다. → Deutschland-Southern- Heuneburg, Nurnberg / Hall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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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us Forum
Great Cameo of France
기원전 3 C 후반... "로마 군단" 은 세계 최강의 보병, 기병으로서 우수한
장비, 강한 규율과 더불어 정교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Epirus-Pyrrhos
(기원전 280-기원전 275), First Punic(기원전 264-기원전 241), Gallia-Germania
(기원전 222) War를 통해 Roman Legion은 다소 느슨했던 적대 적 세력들과의 전투에서
상황에 따라 선별적인 대응 능력을 보였는데 무엇보다도 우월했던 기동성과 유연한
전투 방식 그리고 지형, 지물을 이용한 탁월했던 전술로서 상대를 압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주력 병력 4,000-6,000 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Roman Legion은 기원전 3 C-기원전 2 C에
이르면 사실상 Italian Peninsula를 통일하고, 지중해 일대에서 피에 젖은 역사를 써내려 가는
Urbs Roma의 살인 병기이면서 국가를 수호하며, 이익을 대변했던 혁신적 조직체이기도
하였다. Res Publica = Roman Republic 시대 국가의 구성원들은 기본적으로 보호해야 할 재산이
있었고, 법률의 제정에도 어느 정도 참여가 가능했기에 법체계를 수호하는 것도 그들의 의무
이자... 이익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 계급만이 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Roman Legion의 구성은 이와 같은 시민 계층의 능동적인 참여에 의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Roman Legion을 이해하는데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은 Italian Peninsula의 통일에 기여한 혁신적인 시민군이었다는
사실과 지중해 세계의 최강 대국 Urbs Roma의 버팀목이 되어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정교한 조직체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Dynamic-Roman Legion은 진정한
Small-Urbs Roma라고 해도 무방하다. 신체가 건강하거나 재산을 보유한 17-47 세의
시민들이라면 국가에 대한 의무의 한 부분으로서 징집 대상으로 분류되었고, 어떠한 이유
에서든지 시민이라면 반드시 "군단 병"이 되어야 했다. 언급되었듯이 국가 형성 초기
병사들은 일시적으로 모병된 Citizen Militia(시민 군)적인 성격을 포함하였으며, 급여도 받지
않고, "돈" 이 귀했던 시대 무기와 장비를 스스로 마련하면서 병역 의무를 준수하였다고
한다. 또한 기원전 2 C 에 이르기 까지 상비군(常備軍)이라고 할 수 있는 정예군단은 아예 없었고,
순전히 전승에 따라 이해하자면 Urbs Roma의 군사적 편제는 Romulus → 왕정(王政) 체제가
자리 잡아가던 시기부터 First Punic War 발발 시기(기원전 264)을 전, 후로 하나의 조직체
로서 형태를 갖춰 갔다고 할 수 있는데 대략 이러한 시기는 Urbs Roma의 초기 역사가
성립되는  시점으로 규정할 수도 있을 듯싶다. 더불어 국가의 건국 역사에서 Punic War 까지
대략 500년의 시대가 중요성을 갖는 것은 바로 역사 속에서 한 가닥 실체로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는 중요한 순간들의 고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 형성의 뼈대로써 Roman Legion의

존재의 이유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일단 !! 간단하게 살펴보면
이미 쪼개진 시민 계층 중에 부유하다고 판단되는 계층은 허울 좋은 기병되었고,
그 다음 계층은 진정한 Roman Legion의 힘으로 분류될 수 있는 중무장 보병, 그리고
가난한 시민 혹은 농민 계층은 경무장 보병으로 편성되었던 것으로 점차로 보편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기본적인 편제는 기원전 6 C 의 Rex Servius 치세에 확립된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제도들이 확립됨과 동시에 전반적으로 지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이며, 일견 !! 기원전 5 C 중엽에 거의 온전한 형태가 갖추어졌을 것으로 판단 되지만 국가의
대내외적인 상황에 따라 때로는 급격하게 혹은 완만한 형태로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우선 병사의 충원은 다소 원시적일 수 있으나 시원스럽게 이루어지는데 나이와 체력, 군사적
재능 같은 근본적인 자질이 중요하게 다뤄졌고, 일반 병사들은 남쪽 지역보다는 북쪽 지역 출신들
도시보다는 시골 출신과 같은 신병 후보자들과 가급적 군사적 소질을 갖춘 인물들을 선호
하였으며, 지휘 계통은 사회적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았던 Gens 계통의 인재들이 발탁되었다. 그리하여
 
Short-Trumpet = Tuba(튜바) 소리가 울려 퍼지면 가부장들이 앞장서서
당대 !! 징집 연령에 해당하는 자신의 아들 혹은 젊은이들과 나란히 광장으로
향하게 되었고, 호구 조사를 바탕으로 기록된 "시민 명부"를 바탕으로 총사령관
이라고 할 수 있었던 Consul(콘술, 집정관)이 인적사항을 대조하는 과정을
거친다. 즉 !! 시민명부에 기록된 시민권을 가진 건장한 남성이라면 군복무를 기피
할 수 없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데 만약 그러한 자가 발견 될 경우 사유 재산이 몰수
되면서 법에 따라 영구 구금되는 강력한 처벌에 내려졌다고 한다. 또한 고대 전쟁이라고
하면 엄청난 힘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징집 대상에 해당되는 조건으로 17-47 세의 남성이
중심을 이뤘으나 아무래도 선호하였던 연령층은 신체적으로 왕성한 절정기(17-23 세)
구가하던 혈기 왕성한 젊은이 들이 적합한 후보자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경험
많은 선임 병이 순차적으로 모집 되다 보니 때때로 부자지간(父子之間)이 함께 징집
되었다는 사례가 보고되기도 하였다. 병사 1 명의 개인 장비는  보통 30.4 kg을 유지했고,
이러한 무게를 감당하며, 전투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전투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했기에
무엇보다도 체력 조건이 뛰어나야 했던 것이다. 또한 당대 !! 훌륭한 병사라고하면 살아있는
눈과, 넓은 가슴, 강한 어깨와 근육, 억센 다리와 발, 긴 손가락과 강한 팔, 가는 허리를 가져야
했으며, 조금 뒷날의 일이지만 이들에게 무상 지급되는 무기와 식량은 "방패, 투구, 검, 투창,
갑옷, 벨트, 징이 박힌 군화, 그리고 Bread, Pork, Olive Oil, Acid-Wine(물에 타서 마시는...)이었다.
Bacchus...
Falerno Wine
방위적인 전쟁이든지 혹은 공격을 통한 정복이 우선시 되었든지
Italian Peninsula 내에서 이뤄진 전쟁이 끝나면 병사들은 자신의 땅
(토지)와 집으로 쉽게 돌아 올 수 있었으나 영토가 팽창되면서 전쟁터 자체가
확장되었고, 정복지(속주)로 파견되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장-기간이 지나야
집에 돌아 올 수 있었는데 한번 떠나면 6-7 년은 지나야 돌아 올 수 있었고, 훗날
Caesar Augustus에 의해 제국의 상비군이 확립된 이 후에는 25년의 복무 기간 중
과연 몇 번이나 집에 돌아 올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이러한 시기
병사들은 복무 후 그대로 주둔지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구
분산(이주)마저 이루어지게 되는 부수적인 효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Roman Legion의 부적절한 편제들은 Etruria People의 도시 Veium = Veio을 포위
공격(9년 간 진행)하게 되면서 개혁(Marcus Furius Camillus)을 필요로 할 정도로 접근
되었으며, 우선 병사에 대한 급료를 해결하기 위해 원로원의 결정으로 Tributum(트리부툼)
이라는"목 적 세" 를 징수하는 결정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따라서 이후부터는 국가가
무기와 장비를 제공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시도는 직업적이며 상비군적인 성격을 가진
군대를 향한 위대한 첫 발자국을 남긴 것으로 Roman Legion의 주요 단위는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었고, 아마도 기원전 4 C-기원전 3 C 시기 집정관이 각각 2 개의 군단을 지휘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Roman Legion의 기초적인 전투대형은 Primces Pilus(백부장)
지휘아래 사각형 모양이 대형의 핵심을 이루었으며, 사회적 연령을 기반으로 제 1 열은
젊은 보병 Hastati(하스타티), 제 2 열에는 경험 있는 Principes(프린키페스) 그리고
3 열의 경우 고참 보병, Triarii(트레아리)를 배치하였는데 1열과 제 2열과는 달리 제 3 열
Triarii(트레아리)는 긴 창으로 무장되었다. 그들은 전투 초기에는 참여 하지 않다가 가장
절박한 순간 즉 !! 1 열과 제 2 열이 무너졌을 경우 창을 던지며 무너진 대열을 규합하였다. 또한
경무장 보병은 Res Publica = Roman Republic 후기 "무산자 계층" 이 맡게 되었지만 초기와
First Punic War 이전 까지는 농민 = 소작농 혹은 아욱실리아(보조 군, 용병)의 몫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귀족들로...편성된 기병으로서 명예로울 수는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기병대는 효과적인
병력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당대만 해도 아직 등자(Stirrup, 鐙子)가 개발되어 있지
않아서 기병은 허벅지로 중심을 잡아야 했고, 결과적으로 창과 칼을 사용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Urbs Roma의 귀족은 "초원의 전사"가 아니었던 셈이다.
더욱이 아무리 용맹스럽다고 해도 기병이 보병의 방진(Phalanx, 方陣)을
돌파하기는 불가능 했다. 그것은 우선 말들이 창 앞에서 본능적으로 방향을
돌렸기 때문으로 보여 지는데 그나마 기병이 효과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경우는
조직이 느슨하거나 경무장한 군대와 맞설 때이었으며, 독립 적이라기보다는
보병대의 측면을 보호하는 것이 임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편제는 대체로
평지에서의 전투에 적합하였으며 Samnium의 산악지방 같은 장소에서는 효율적인
대응이 어려웠다. 더불어 장기간 전쟁을 수행하면서 좀 더 융통성 있는 전술의 필요성이
요구되었고, 이에 따라 Roman Legion은 독립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중대
단위이기도 한 Manipulus(마니풀루스)로 나뉘어졌다. 또한 Socii(소키, 동맹 시)들도
"보조 군단" 으로서 전투에 참가하는 물론이었고, 필요한 자원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고
보여 지는데 특별히 그러한 부대는 앞서 설명한 Auxilia(아욱실리아, 경무장 용병부대)
로서 기병처럼 "로마 인" 들이 강하지 못했던 군대가 포함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4 C Italian-
Peninsula를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Roman Legion은 막강하였고, 군단의 운영에 있어서
상황에 따른 뛰어난 대처 능력으로 Gallia에서 침입한 호전적인 Celt People, 전문화 된
산악전술을 갖추었던 Samnite People, Hellenism 시대의 강성한 군대를 맞이하여 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당대의 Roman Legion는 집정관 2 명이 지휘하고, 있었기에
전술적으로 일체성이 결여 되여 있어 커다란 장점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여
지는데 이러한 점은 Roman Legion의 최대 약점으로 노출되었고, 그래서 내부적으로 접근해

군사적인 부분에서 일정한 경험을 쌓은 인재 양성은 중요한 문제로 부각
되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기도 하였던 것으로 병사 들은 일정한 징병제의
틀 속에서 지속적으로 수급이 가능하였다고 하더라도 지휘관이라는 자리는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Urbs Roma Senate(원로원) 입장에서는 고민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이 미해결 된 상태에서 Second Punic War =
Hannibal War(Bellum Hannibalcum)
까지 인재의 수급 문제가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지만 가혹한 전쟁을 치루면서 Roma People 들은 커다란 교훈을 얻었고, 또 하나의
시행착오(施行錯誤)를 거치며, 결과적으로 강력한 Roman Legion의 탄생을 목도하게 되었다.
즉 !! "한니발과의 전쟁" 이전과 이 후의 Roman Legion의 차이는 전략, 전술적으로
엄청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Epirus-Pyrrhos와의 결전을 치루고, 절대적인
위치에 올라서기 전까지 대, 소전투를 수행하면서 완성시켜 갔는데 이것은 Celt People의
침입으로 Urbs Roma가 밑 바닥을 보인지 4 세대(120년)에 걸쳐서 이룩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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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 Republic-Palatine
American Football
Roma Terme Di Caracalla Panoramica
기본적으로 돌진하고, 창을 던지고, 칼을 휘두르는 전체
과정이 되풀이 되면서 진행되었는데 침착한 전진, 정확한 투창,
익숙한 작전, Manipulus(마니풀루스) 전술의 신중하였던 일제 공격
으로 요약 된다. 고대세계의 기본적 전술은 예측 불가능한 열정으로 공포를
예측 가능한 결과로 나타내는데 있었다. 근육의 힘과 손에 쥔 무기로써
가능한 많은 인간을 죽이는 냉철한 인식이 고대 세계 전쟁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그들의 전투는 무혈의 전투이며, 그들의 전투는 유혈의
훈련" 이라고 본 Josephus(요제푸스)의 기록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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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s Roma 건국 초기부터 맞닥뜨린 적이라고 하면 청동으로 된
갑옷으로 몸을 가리고 창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거나 "기마 술" 이 탁원한
족속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오직 Hasta
(장 창,)과 전술적 방진기술 뿐이었다. Roman Legion은 당시 기준으로 무장이
잘된 편이었으나 그들만의 비밀 병기 같은 것은 없었고, 대부분 주변국들의
것을 모방한 수준에 불과 하였다. 예컨대... Roman Legion 특유의 장방형 Scutum
(방패)만 해도 Celt 족속에게서 차용한 것으로 Roman Legion이 그들과 다른
점은 장비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 뿐이었던 것이다.
군단 병들은 검을 함부로 휘두르는 것은 천박한 것이라고 교육 받았으며, 적이
검을 휘두르면 방패를 교묘히 사용하여 피하며 검을 휘두를 때에는 드러나는 몸통의
측면을 Gladius(단검)으로 재빨리 찌르도록 훈련을 받았다. 군단병들은 방어용
갑주를 착용했는데 그것은 무기를 다루는 기술과 함께 백병전에서 커다란 이점으로
작용되었던 것이다. Short-Trumpet = Tuba(튜바) 소리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넓은
보폭과 짧은 보폭의 반복, 마치 실전처럼 훈련되던 검술 훈련 이것은 고대 전투
자체가"백 병 전"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적과의 대결에서 치명상을 입히는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으로 반드시 필요하였다. 과거 "검 투 사"들이 했던 것처럼 나무 기둥을
앞에 두고 목검으로 급소를 가격하는 훈련이 익숙해지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 후에는 실제로
군단 내 동기와 결투를 하며(2인 1조, 3인 1조, 4인 1조) 대인별 전투력을 향상시켰다.
마지막으로는 검의 날을 가죽으로 가리고서 실전 훈련에 임하였는데 일반적인 전투 방식과는
달리 단단한 방진을 형성했으며, 강력한 방패로 적군의 화살과 투창 공격을 막아낸
뒤에 보병은 적의 정면으로 돌격하고, 기병(귀족 기병이 아니라 용병)이 배후와 측면을
동시에 습격하는 전술을 활용하였다. 따라서 병사는 검과 투창 그리고 방패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이다. 또한 적의 방진을 와해시키기 위해
투창 공격을 시도 했으며, 돌(Ballist, 공격용 투석기)을 던지거나 화살(기병의 발이나 말 조준)을

쏘아서 적의 대열을 흔들어 놓기도 하였다. 특이한 점은 보병도 말을 타는
훈련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온전히 병사의 체력(신체)를 강인하게 하는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모든 훈련은 중요하였으며, 실전과 바로 연결되는 현상을 낳았다.
"알면서도 당하게 되는 단순한 전술" 과 전략이었으나 전투에서는 강력하게 작용되어 완벽한
전투 능력을 펼쳐 보였는데 애당초 국가 형성 초기부터 여러 도시들 가운데 살아
남기 위한 행위로 귀결되었고, 그 다음에는 중-남부 지역의 패권을 잡기 위한 투쟁을 목적
으로 했으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Urbs Roma의 모습이라고 보여 진다. 또한 훗날에는
위험물질을 이용한 공성 전투를 효과적으로 구사하며, 전문적인 살인 기계에 탁월한 토목
기술 접목 전격적인 군사적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Roman Legion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전략과
작전, 전술적 차원에서 중요 했던 것은 전투대형을 이뤄 적을 상대하는 것으로서 전체 대형이
전진하고 병사, 자신의 자리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것은 백병전이 벌어질 경우 최상의 효과를
보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전투 초기 상황이 마무리될 즈음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뒤의 부대는
앞의 부대의 길을 열어주게 되며, 앞으로 전진 하게 되었고, 이제 힘을 비축한 뒤의 부대는 적을 섬멸해
간다는 공식이다. 이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수행되어야 하는 것으로 훈련을 통해서
극대화 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었다. 참고로 적을 단숨에 제압하는 Testudo(귀갑 대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공격 전술은 완벽한 작전을 통해서 전략 적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고안된 것인데 Scutum(스큐툼, 지사각형 방패)를 가진 보병들이 사각형으로 에워싼 후 방패를 자신들
앞에 세우게 된다. 전투 대형 중앙에 들어간 보병들이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눕히면 거의
완성된 형태로 전체 대형을 방패로 보호되게 된다. 이러한 대형의 장점은 적의 화살이나 투창 공격을
방어하면서 순차적으로 전진-공격을 하는데 유리하였으며 일사분란하게 이뤄져야 했고,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성립시킨 전술적 대형이었다. 또한 당대 모든 작전은 지휘관으로부터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에게 소리를 통해서 전달되는 방식을 채택하였는데 그것은 악기 !! Short-Trumpet = Tuba(튜바)

소리에 의해서이다. 언제나 훈련은 실전처럼 이어졌으며, 전투 대형에 대한
훈련을 모든 병사가 한 몸으로 움직일 때 까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지속되었다.
훈련은 곧 자신의 목숨과도 직결되어 있었던 셈이고, 실전에서 낙오자는 자신도 위험에
빠질 수 있었지만 자신의 동료에게도 결코 유익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젊은 병사들이 이러한 훈련을 거치고 나면 최상의 전투 능력을 지닌 병사(살인기계)로 거듭
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독하게 혹사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냉혹한 인물이 되어
동기끼리의 정서적 유대도 철저히 배제한 채 소속 부대에 대한 자부심만 하늘을 찌르는 군단
병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전설적인 Roman Legion의 독수리 깃발에 종교적 맹약을 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는데 즉 !! 군단 병들은 훈련을 마치고 나면 목숨과 명예를 걸고, 독수리기를
지키겠다는 것과 죽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유기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된다.
따라서 부대의 명예와 병사들끼리의 결속은 Roman Legion 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
적군에게는 찾아 볼 수 없는 불굴의 투혼과 상관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원동력으로 작동
하게 되었다. 또한 심리적, 육체적 단련에 더하여 Roman Legion 병사들은 최상의 전투 기술도
연마 하였던 것이다. → Urbs Roma(Hasta, 장창) → 2 m, 2 kg /Macedonia(Sarissa) → 5-6 m, 5kg
Custom Tactical Gladius
Uncrossed Gladius
전통적으로 전쟁 수행 방식은 일정한 형식을 따랐는데 창에 돼지 피를
발라서 던져...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 군사령관은 모든 권한을 넘겨받으며
승패를 점치는 일련의 행위(종교의식)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신의 가호"
함께 하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이 작용되었기 때문이었으나
전쟁이 빈번해 지면서 이러한 의식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본적으로 개선식을
제외하고, Urbs Roma의 경계선 내에서 무기를 휴대할 수 없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로 작용하여 군단의 병사가 징집되었을 경우에는 항상 경계선 밖에서 이루어졌다.
그곳은 전쟁의 신 마르스에게 봉헌 된 장소로서 광장에 집결하여 전쟁터로 향하게
되었으며, 이 후 전쟁을 수행하였던 과정은 모두 군사령관의 권한에 속하게 된다. 일단
전쟁터 막사에서 군사령관은 군단장, 천부 장, 백부장에게 명령과 암호를 전달해 주게 되고,
전투에 앞서 과거 패배한 전쟁에 대한 복기를 하면서 주위를 환기 시킨다. 또한
대형의 전개 방식과 전술, 작전에 따른 공격과 후퇴의 시점을 결정하게 되는데 전투에
필요한 모든 제반 사항이 숙지된 후 각급 지휘관들은 본연의 위치로 돌아와 전투 대형을
갖추고, 전투 준비를 완료하게 된다. 그리고 전투에 앞서 총체적으로 군의 사기를 고양시키는
엄숙한 군사령관의 연설을 듣고, 이제 전투에 임하는 과정만 남겨진다. 이러한 방식은
Camillus, Scipio, Caesar도 마찬가지이었으며, Short-Trumpet = Tuba(튜바) 소리와 함께
군기가 나부끼며 전투가 시작된다."악기" 를 활용한 Roman Legion의 작전 전개는 고저
장단에 의해 전진, 후퇴 대형의 변경이 이뤄졌으므로 훈련을 통해 완벽하게 실행되었던 것으로,
Roman Legion의 전통적 방식 그대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렁찬 고함과 함성을
질러대며, 단순 무식하게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사실 건국 초기 Roman Legion의 실체는 일정한
대형도 갖추지 않고 전쟁을 수행한 오합지졸(烏合之卒)들이었다. 그러나 Veium = Veio
전투를 계기로 Etruria People 들로부터 "밀집 대형전술" 학습 받기에 이른다. 이러한 군사적
전술은 Southern-Mesopotamia 도시국가들이 최초로 시도 했던 것으로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기원전 10 C Assyria-Egypt-Asia Minor 로 전파되었고 기원전 8 C Greece에
전달되었는데 이것을 기원전 7 C Etruria가 받아들여 마침내 Italian Peninsula에 정착되었던 것이다.

예컨대...쫓겨난 왕의 아들이 발악적으로 도전 해왔을 때는 초대 집정관 Brutus의
지휘로 방어가 이뤄졌으며, 이러한 시기 "밀집 대형"의 진정한 힘이 작동되었던 셈이다.
적과 비교해 취약했던 상황에서... 또한 패전을 거듭하고 있던 상황에서 적의 우월한
전술과 무기 체계를 습득하고자 노력한 것이 당대 Urbs Roma의 성공 속에 잠재 하였고,
차용을 넘어 더 발전시켜 훈련을 통해 전투 기술을 향상시켰던 것이다. 이후 호전적이었으며,
기동성을 갖춘 적대 적 세력 Brennus(브레누스)가 지휘했던 Gallia People(= Celt) 들을
Urbs Roma에서 18 km 떨어져 있던"알리아 강"에서 조우하게 된다. 바로 이들과의 전투는
Urbs Roma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첫 번째 전투로 기록되어 "굴욕"을 겪게
되었는데 전투의 패배의 아픔도 컸지만 식량부족 사태, 전염병 창궐로 인하여... 내부적인
혼란을 대략 7 개월 동안 맞이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Roma People
들은 의연하게 일어선다. 여기서 살펴 볼 것은 Gallia People 들과 전투에서 Roman Legion의
약점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우선 전투 장비를 비교할 때 Roman Legion의 청동제 무기와

철제 무기는 Gallia People 들의 선진적인 기술로 제작된 철제 무기에
취약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우수한 원자재(철광석)가 풍부하게 있었고,
더구나 전투 상황에서 전술적으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기습적으로 치고 빠지거나 매복
하여 공격하는 소규모 부대로 구성된 전술적 효과는 Roman Legion의 "밀집 대형" 전술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밀집 대형의 장단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 먼저 
밀집 대형 전술은 한마디로... "밀집 대형"을 하나의 집단으로 보았을 때 하나의 대형 속에서
방패가 서로 조밀하게 묶여 있을 때는 무적의 힘을 갖지만 대형이 쪼개져 버리면 병사들은 힘을
상실하였다. 그러한 이유는... 그들이 "방패와 창"으로 무장하는 방식 때문이고, 그들의 힘은
개별적인 병사들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각 개별 병사들은 전체 대형의...
일부로서 서로 의지하게 되었는데 적절한 순간에 전체 군대를 밀어 붙이면 엄청난 파괴력을 갖지만
유연성과 기동성이 부족하여 "지형과 창술" 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게 된다는 허점을 보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Roman Legion는 약점이 드러난 밀집 대형을 더 이상 고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존의 밀집 대형을 버리고 "중대 단위로..." 전투 단위로 편성한 인물이 있었고, 그가 바로 !! Marcus-
Furius Camillus 이었으며, 또한 매년 병사로 활용할 수 있는 시민의 숫자와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징집 대상이 군단의 편제 상...다양화 되었는데 항상 기준에 다른 것은 아니었고, 전쟁 진행의 예측된...

상태에 따라...4000 명에서 많게는 6000명 까지 하나의 군단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Marcus Furius Camillus 시기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대형 제일 뒤를 따랐으나 중대
편제가 강화되면서 경보 병들은 대형 맨 앞에서 창이나 "돌" 을 던지는 전초전을 주로 담당
하였다. 중대 편제와 밀집 대형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은 장 창을 사용하던 밀집 대형과 달리...
병사와 병사 사이에 대형과 대형 사이 간격이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지속적인 반복 훈련의
필요성이 증대되었으며, "간격(체스 판 모양 형성)" 이라고 함은 장창부대, 주력부대, 제 3 열 부대 간의
간격을 의미하였고, 전초전 이 후 백병전과 기병을 활용하는 것이 보편적인 공격 방식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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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nnaTraiana
Roman Legion-Centurio
반면에 중대 단위 편제는...일부 대형이 파괴되어도 전체
대형으로 파급되지 않았던 견고함이 있었고, 공격과 수비에서의
융통성이 탁월하였다. 또한 중대 전술는 전투 지역의 지형의 조건에
자유로웠다. Battle of Cannae의... 경우를 보면 Urbs Roma → 밀집 대형
전술을 고집하였고, Carthago → 중대 전술이 핵심적인 전략적 가치로 부각되었던 셈이었다.

주둔지에서 노역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목숨을 건 전쟁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전투는 지금까지 했던 "대형 훈련과 무기 훈련" 등이 빛을 발휘되는 곳이다. 창으로...
검으로... 방패 돌기로... 적을 공격하면서 모두 승리를 향해 목숨을 던졌다. 승리한 전투
이든지 실패한 전투이든지 전투가 끝나면 항상 전과에 대한 평가가 이어졌고,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 잘 싸운 자... 못 싸운 자...의 운명이 갈라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싸워도 전쟁터에서 죽으면 말짱 꽝...이었다. 그들은 승리하고 살아남아야 했던 것이다. 훈장,
부상, 승진의 혜택 등의 상(賞)을 받은 자는 시민의 보호자로 대접 받았고, 사열식이나 축제 마다
달고 다녔다. 제대 후에는 고향집의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두고 칭송을 받기에 이른다.
심지어 "묘 비 명"에까지 그의 공적은 기록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자손손(子子孫孫)
자랑거리가 되었던 아주 귀중한 것들이었기에 상을 받지 못한 자들은 다음 전투를 기대했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전투 의지를 고취하였던 셈이다. 따라서 상(賞)이라는 것은 경쟁을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되었고, 충실한 복무와 용감한 행동을 위한 자극제이었다. 반면에 처벌도 뒤따랐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심한 모욕감을 주는 것이었다. 즉 !! 가장 가벼운 처벌로 돈을 주지 않는 것이었는데 급여를
삭감시키거나 무장 해제 시켜 모든 병사가 볼 수 있는 곳에 서 있게 하는 체벌이었다. 군기를... 잃어버린

군대, 적에게 굴복한 군대, 비겁한 행동을 한 병사 들이 이러한 조항에
해당되었다. 이러한 체벌 대상은 또한  "밀 대신 보리" 만을 지급 받게 되고
백부장은 검을 차지 않고 Tunic 위에 끈을 매지 않은 채 주둔지 내에서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했다. 보리 만을 먹는 모욕감,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서 있어야만 했던 모욕감과 두려움을 느끼다 보면 다음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울
것이라는 생각에서 주는 벌이었다. 계급 갈등이나 강제 전출, 불명예 제대를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참고로 체벌과 처형은 제비뽑기를 하여 10명에 1명씩 태형하는 것으로
기원전 471 년 Volsci People 들과의 전쟁에서 일벌백계(一罰百戒)차원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살아남은 자는 시칠리아로 보내져 7 년 동안 보리만 지급받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이처럼 Roman Legion에서의 단 한 번의 패배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만큼 상과 벌이
엄격하게 적용 되었던 셈인데 바로 이러한 점에서 Greece Polybius, Josephus, Pyrrhos는
놀라움을 표시하였고, 이것은 Roman Legion의 군기가 엄격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Africa 속주를 제외하고 한 개의 Roman Legion이 주둔(기원전 27)하는
속주에서는 총독이 군단장이었고, 두 개 이상의 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속주는
총독 휘하의 각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이 있었다. 이러한 속주 총독 혹은 군단장이
군사령관이며, 임기는 3-4 년이다. 군사령관이 되려면  행정관이 되어야 했기에 집정관과
법무관 직을 역임한 사람이 속주 총독으로 파견되는 것이 관례이었으며, Roman Legion
생활의 전반적인 상황을 총 감독하는 자리가 군사령관이다. 여기서 Amateur & Professional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경험이 쌓인 경우와 경험이 없는 군사령관의
차이를 말하지만 최종적인 판단은 최고 사령관의 몫이었다. 따라서 명령 불복종(하극상)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군 영 장"은 보통 50-60 대로서 오랜 복무로 기술과 경험이
뛰어난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수석 백부장, 천부 장, 보조군 보병 대장, 보조군 기병 대장을
역임한 만큼 화려한 경력을 자랑 했다. 병사에게서 출발하여 "승 진"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었다.

예컨대 천부 장은 각 군단에 6 명이 있었는데 이 중 1 명은 원로원 신분
이었고, 나머지 5 명은 기사 신분이었다. 특히 원로원 신분의 천부 장은 빠르면
10 대 후반인 경우도 있었지만 지휘관으로서 존재의 이유는 충분하였다. 공화정의
예를 들면 군단의 지휘 계통에서 군사령관과 천부 장 이외에는 정해진 계급이 없었으므로
군사령관 입장에서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 천부 장(백부장은 천부장이 임명 !!)이었던 셈이다.
또한 연령에 따라 지휘 계통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이가 어리다고 항명하는
일은 없어야야 했다. Roman Legion에서 지휘 체계는 엄격하였고, 지휘관들은 솔선수범(率先垂範)
하는 자세로 필연코 병사들의 선두에서 몸을 아끼지 않은 지휘 력을 보여 승리를 쟁취해야 했다.
본질 적으로 일반 병사들의 희망은 군사령관도 천부 장, 군영장도 아니었다. 일정한 단계를 거치게
되면 좋겠으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병사들의 가장 현실적 대안은
"백 부 장"이었다. 우선 "백 부 장"들은 일반 병사보다 15 배 더 받았던 봉급으로서 생활이 넉넉하였고,

바쁘게 움직이는 했으나 노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았던 생활을 하였다. 더구나 이들은 병사들에게 금지된 결혼 까지 할 수 있었던
특권을 누리기도 하였는데 백부장이 되기 위해서는 군인 집안의 출신, 기사 신분, 근위대,
호위대, 수도 경비대 출신, 자치 시의 하위 관리자, 황제 혹은 속주 총독 같은 강력한 후원자를
Back-Ground...를 곁에 둔 자는 조금 더 일찍 백부장이 되었고, 그... 이상의 진급도 노려
볼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분 차원의 인적 자원이 없는 병사들은 성실하게 복무하면서...
전투에서는 용맹성을 발휘하여 지휘관의 총애를 받아야만 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15-20, 혹은
20 년이라는 복무 기간을 채우고, 재-소집 병 신분으로 백부장이 될 수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30 대 중, 후반부터 백부장 직에 도전이 가능하였던 셈이었다. 그러나 현실적 상황은 결코 만만한
것도 아니었다. 제 1 보병대... 백부장의 숫자가 줄어서 Roman Legion의 백부장은 총 60 명이었으며,
기원 후 1 C에 이르면 이것도 5 명으로 줄어서 59 명이 되었다. 5,000 명 정도를 하나의 Roman-
Legion으로 잡으면 그 자체 병사들만으로 백부장 자리를 채운다고 가정하면 경쟁률이 83 대 1 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근위대와 같은 상급부대에서 온 사람, 소위 낙하산 까지 포함하면 경쟁률은 더
높아진다는 개념이 성립되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더구나 백부장이 되어도 경쟁은 더욱 심화
되었는데 그것은 군사령관의 직할 대라고 할 수 있었던 제 1 보병대의 일급 백부장 직을 따내기
위해 또 경쟁해야 했다. 즉 !! 6 명을 제외한 나머지 54 명의 백부장들은 서열이 모두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 병사들에게 악명이 높거나"부패한 백부장" 들도 있었으나
Urbs Roma에서의 백부장들은 대부분은 용맹스럽고, 가정에서 가부장적
위치에서  혹은 집단적 행위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대체로 "로마군단"의
지휘체계 내에서 백부장들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백부장들은 병사들 곁에서
함께 호흡하는... 지휘관으로 군인 명부에서 어떤 총독 휘하의 어떤 백부장 소속
이라는 사실이 명기 될 정도로 군단의 핵심 병력이기도 했다. 어찌되었든지 백부장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농후했던 것은 일반 "사 병" 들이었다. 이들은 백부장 바로 아래
계급으로 육체노동에서 완전히 면제 되었고, 급여도 노역을 하였던 병사들보다 1.5-2 배
정도 많았다. 따라서 백부장은 아니더라도 주요 사병만 되어도 육체적, 경제적 여유는
뒤따르는 보상으로 여겼다. 주요 사병은 Cornicularius(코르니쿨라리우스), 수혜 사병, 군단
기수 혹은 조상 기수, 중대 기수, 부관, 전령을 말한다. Cornicularius는 "작은 뿔"을 의미
하는 Corniculium을 투구 양편에 장식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이들은 군사령관, 군영 장에 의해
임명되었고, 군인 명부와 작업 목록을 관리하는 일을 주로 했던 일종의 군 체계에 있어서
두뇌(지식집단)라고 할 수 있었다. 주요 사병 중 최상위 계급인 만큼 백부장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가장 많았다. 수혜 사병 → 상관의 개인적 비서, 기수 → 로마군단의 상징물을 들고, 다니는
병사, 조상 기수 →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상징 하는 작은 상을 들고 다니던 병사, 군단기수와 조상
기수는 제 1 보병대 소속으로 "수석 백부장" 직속으로편입되며, 이들보다 낮은 계급은 중대 기수가 된다.
Roman Legion-Centurio
Gaius Marius 병제 개혁으로 군단 기가 "독 수 리 기"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이 후 중대 기도 "독 수 리" 만을 깃발로 채택하였다. 참고로 군단 깃발은 2 개의
백인 대가 하나로 구성되어 군사령관 막사 옆의 작은 사당에 보관되었다, 부관과 전령은
백인 대 마다 1명 씩 배치되어 있었고, 부관은 백부장이 명령을 이행 감독하는 병사들
이었으며, 전령은 암호, 명령을 막사에 전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백부장의 조력자로서
백부장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 백부장, 부관, 전령 = 백인 대 삼인방
또한 "로마 군단" 에서 무엇보다도 병사로서 선호되었던 것이 "기 술 병" 이었는데... 모든 것을
주둔지에서 자급자족해야 할 Roman Legion 입장에서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노역을
면제 받은 군사를 뜻하기도 했다. → 서기, 의사, 취악 대, 각종 제조 기술자 핵심적으로 악기를 부는
병사는 각 군단에 38명이 있었는데 제 1 보병대에 5 명, 제 2-10 보병대에 27 명, 기병대에 3 명이
지휘관 휘하에서 3 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악기만 부는 것이 아니었다. 병사들의
움직임을 규제하는 소리는 다양했고, 병사들은 선임 병들을 따라 충분히 연습해야만 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중요한 직책이라고 할 수 있을 듯싶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군단에서 가장 힘겨웠던
병사들은 노역 병이었던 셈이다. 이들에게는 노역을 면제 받을 수 있었던 시간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여러 직책을 거치면서 백부장 까지 승진하는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백부장 까지 승진하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였다. 그것은 임명권자이기도 한
지휘관에게 잘 보이면 그저 만사형통(萬事亨通)이었는데 문제는 어떻게 잘 보이냐는
것이었고 그러한 능력 중에는 단연 으뜸이 전투력이었다. 즉 !! 적의 숫자를 빠른
시간 안에 감소시킬 수 있다는 능력만 펼쳐 보이면 일단 성공(포상과 승진)한 셈이었다.
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열심히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노역에 충실하면서
몸으로 때우면, 기회는 찾아오기도 했던모양이다. 물론 !! 당시 사회에서도 승진을 위해
뇌물이 필요한 경우가 있었을 것이고, 스스로 직접 자신의 전공을 알리려 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작용되었다. 그만큼 당시 Roman Legion에서 승진은 어려운 일이었고, 사회적,
출세 적 의미도 함축하고 있었던 셈이다. 군사령관 1 명, 군단장 1 명, 군영 장 1 명,
천부 장 6명, 백부장 60 명 주요 사병 까지 합해야 200 명도 안 되었다. 이러한 사실만 정리해
보더라도 Roman Legion자체부터 철저한 경쟁 사회이었던 것으로 요약되는데 승진은
육체적 안락과 "부" 가 따라 오는 것이었으므로 모든 병사들이 기를 쓰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모든 것은 백부장과 직결되었던 체계로 Roman Legion의 병사의 승진은 일정한 복무 기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본인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였고, 그러한
노력이 훌륭한 하나의 병사를 양성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전투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훈련 또한 실전과 같이 열심히 받았다. 또한 노역에 충실하다 보니 육체적으로
단련되었고,"문자와 언어, 숫자의 조합"을 학습하기 위해 항상 전투적인 자세를 견지
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적인 움직임이 전투에서 적의 허점을 생각하게 하는
사고력으로 이어졌고, 승진을 위해 그만큼 힘을 쏟아 붓는 군대가 어찌 강성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군단의 악기로는"트럼펫, 호른, 작은 트럼펫" 이 있었다. 호른은 군기를 세우거나
거둘 대 사용 했고, 작은 트럼펫은 군사령관의 권위의 상징물이기도했다. Urbs Roma의
트럼펫 악보가 남겨져 있지 않아 훈련 중 트럼펫 신호가 어떠했는가 알 수 없으나 현재 알려진
United Kingdom의 경보 병 부대를 훈련시켰던 "존 무어 경" 의 작성한 악보(1798) 가 남겨져
있다. 대열을 넓혀라, 행군하라, 전초전을 하라, 발사, 공격 중지, 후퇴, 오른쪽으로 회전, 왼쪽으로
회전, 경보, 멈춤, 적 발견 시, 적이 보병일 때, 적이 기병일 때, 적의 보병과 기병이 연합군 일 때
장교들을 집합 등을 표시한 악보이기도 했다. → 노역은 주둔지 건설부터 시작 = 가장 유용했던 노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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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mpeii...
Turning Point
과거의 도시국가들에서는 가끔씩 시민권을 부여 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그것은 흔치 않는 일이었다. Greece Polis의통상 권은
대체로 거류 외국인들의 수중에 있었는데 실제로 Greece People
보다 상당한 "부" 를 행사 했으나 투표권은 확보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Greece People 들이 자신들의 "자율과 자유" 를 상실시키지 않으려
하였던 점에서 찾을 수 있는데 도시는 물론이고, 변두리 지역까지 배타적
권리를 가지고 싶어 했으므로 이주민(거류 외국인)들에게 폭넓은 권리를 내어
주려 하지 않았다. 즉 !!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경작(= Mos Maiorum
조상으로부터 받은...)하는 Greece 농민들과 동등한 시민권을 허용하지 않았던
셈이었다. 더구나 Greece 사상가들과 그들의 특성이기도 한 To Hellenikon
(헬레니콘)을 인정하고, 이념으로 간주하며 필수적인 사항으로 Polis의 문화와 정치적
전제를 공유하려는 거류 외국인이라면 개방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 판단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Macedonia에서 "군 주 제" 성장은 합의적이면서 독립적인 도시
국가의 발전을 단절시켰다. 또한 그러한 시대 "군 사 력"은 항상 Old Greece Type 군대의
"Achilles tendon (아킬리스 건)"이기도 했다. 따라서 모든 병사는 곧 !! 시민이어야
했으나 편협하였던 조건으로 말미암아 항상 고대 세계 전투의 핵심인 보병이 부족하게 되었다.

심지어 Battle of Salamis에서 자유를 위해 싸웠던 빈민들도
정치적 발언권을 갖지 못한 노예 혹은 거류 외국인과 수적으로 비슷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권을 좁게 한정한 것이 결국 독립적인 Old
Greece Type 도시국가들의 암울한 운명을 가르는 요인으로 작동되었는데
반대로 Bellum Hannibalcum = Hannibal War가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Urbs Roma의 혁명적인 변화의 움직임은 주목되는 것이었다. 즉 !! 변방의
Outsider 들이 포섭됨으로써 사회적, 군사적 토대가 한층 견고해 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바로 !! 국민국가 개념이었다. 또한 이러한
Nation-State는 군사적 부문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서 지중해 전역을 뒤흔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권리와 책임으로 충만하였던 시민권에 의한 혁명적 이념은
Roman Legion에 우수한 인력을 대거 공급하는 역할을 하였고, 병사들의 복무 조건을
살펴봐도 계약적인 의미에서 스스로 자신의 근무 조건을 비준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그에 따라 얼마가지 않아서 민족, 피부색, 언어보다 “문화에 의해...” 자체적으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러한 이념적 해석만으로도 Roman Legion은 전쟁터에서 상당한 이점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 제정 시대Gallia-Spain-Britannia 등지에서 주둔한 국경
수비대와 Battle of Cannae에서 사망한 병사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 문화적 편견이 존재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장비와 조직을 유지하였으며, 시민으로서 자신의 군복무는 계약에 다른 합의로 여겼다.
참고로 기원후 2 C 쯤에 이르면 Urbs Roma에서 태어난 황제를 찾기도 쉽지 않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방식은 작은 도시국가가 엘리트 지배계층을 뛰어넘어 인적 자원을
총동원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했던 것이다.→ Greece Type / 관용, 공정, 번영 ↔ Urbs Roma / 시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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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 Legion Scutum
Aqueduct Alicia J Rose
Italian Peninsula In Socii Italici(동맹 시) 자격을 갖춘 족속들 중 Sabini-
People 만이 Civitas(시민권)를 완전하게 쟁취하고 있었다. 그 이 외에 Samnite,
Etruria, Umbria People 등은 반-시민권(Civitas Sine Suffragio)을 받았고,
그들은 정치에는 참여 할 수 없었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실질적으로 분리된 상태에
놓여 져 있었다. 이것은 설혹 !! Urbs- Roma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시민권을 얻을 수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Southern-Italy 지역, 그러니까 Magna-
Graecia 불리던 동맹시들 역시 Civitates Foederatae(분리 통치)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Urbs Roma와 연결된 이러한 도시국가 조직체들은 집합적으로는 Latin People 보다 특권이
낮은 일종의 외곽 층을 형성하였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여
지는데 그들은 내부적으로 정무관 임명과 법률을 제정 했으며, 그들만의 신(神) 들을 숭배 했다.

즉 !! 그들은 Urbs Roma에 군사적 보급품과 곡물을 지원해야만 하는
의무는 있었으나 공납을 바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체제가 점차로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 되었고, 국가의 팽창 속도와 함께 Roman Law,
Latin Alphabet, Education System의 확대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근본적으로 실질적인 사회, 문화적 융합을 이끌었고, 경제적으로 통합되면서 기원전
1 C 경에 이르면 Roma People 들을 거치지 않고서는 상업적 이익을 구현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Roma People에게 커다란 Dilemma를 제공했던 Gallia
지역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었는데 기본적으로 오랜 시간 Urbs Roma의 "언어와 법' 을 흡수
하게 되면서 사실상 Urbs Roma 시민이나 마찬가지의 생활공간을 갖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시기 제국 전역에 걸쳐서 사원과 경기장, 극장과 공중 목욕탕과 Forum
까지 완벽하게 갖춰 축소된 Chess(체스 판) 같은 도시들이 등장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도시들 가운데 Deutschland In Koln처럼 온전하게 새롭게 태어난 도시들로서 새롭게
탄생한 도시가 있는가 하면... France In Nimes(행정과 무역의 중심지)의 경우 수도교와
같은 Roman Empire의 유적을 통해 더욱확장된 경우도 있었는데 지중해 전 지역에서 이와 유사한

과정이 재현되면서 인근 지역으로 부터 인구의 집중을 초래하였고, 대체로
이들은 Roman Type의 생활양식에 매력을 느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며,
대략 이러한 시기부터 기원전 3 C 이 후부터 조짐을 보이던 "Pax Romana(로마의 평화)"가
비로써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기본적으로 Pax Romana는 군대의 병력 보강을 위한
"시민권의 정치" 로부터 시작된 것이었고, 시민권을 개방함으로써 Roman Legion은 강성해졌다.
다만 한 가지 염두 해 둘 것은 "로마 군" 의 수적 우위라는 것은 각 전투에서 적의 수보다
많은 병력을 의미 했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의미는 가용할 수 있는 잠재 병력이 많았던
것을 뜻하며, 바로 이러한 점이 항상 비교 우위에 있었기에 Bellum Hannibalcum = Hannibal War
에서 "한 니 발"이 승리한 후 자체적인 고질적인 병참 문제도 있었으나 Urbs Roma로 바로 !!
공격하여 들어오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또한 Roman Legion이 쉽게 격파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방어 능력이 뛰어 났기 때문이었고, 그 배경에는 그 유명한 "진지 구축"을 기반으로 한
또 하나의 Urbs Roma를 건설을 목표로하였던 사실이 작동되어 졌다. 참고로 Syria-Palmyra
(팔미라), Tunisia-El Jem(엘젬), Dougga(두가) 등도"로마 화"가 진행된 도시로서 여기서 말하는
"로마 화" 는 Hellenism 문화가 토착화 되었던 것을 뜻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상업적인 팽창을
가져왔으므로 대다수의 도시들이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중세 암흑시대" 에서 조차도 그 통합력이 완전히 소멸된 적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제국의 팽창 뒤의 평화의 정착과 번영의 증대는 Italian Peninsula에 안정과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여건을 형성하였으며, 수많은 긍정적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Ager-
Publicus(공유지)는 정복 전쟁을 거치면서 전체 Italian Peninsula의 상당한 부분에
해당하는 비옥하고 다양한 형태의 토지가 되어 있었으며...개발의 여지가 많았던 것은 물론이고,
공유지의 많은 부분은 Urbs Roma의 농업의 전통적 유형이기도 한 소-토지로 구획되어
시민에게 할당되기도 하였다. 또한 Samnium-Apulia의 대 목초지 지대의 경우 여름과 겨울
"양과 소"를 방목하기 위한 지역과 이동 통로가 개선되면서 Roma People 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사실을 인지할 이유가 있으며, 국가로부터 거대한방목지를 매입하거나 임대
할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가진 소수의 부자들에 의해 목초지에 막대한 자본이 뿌려지는 투기현상
마저 가져 왔다. 그리고 발길이 닿지 않는 삼림지역에서 벌목된 목재로 Punic War에서 승리의
발판이 된 해군력을 상징하던 선박들이 건조되었고, 당시 산악지역의 거칠고 소외 된 목동들의 반란의

가능성(Bruttium)이 농후했던 점은 "옥의 티" 처럼 여겨진다. 기원전 3 C-
기원전 1 C Roman Legion의 병력은 대략 100 만 대군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러한 놀랄만한 병력이 구성되게 된 것은 온전히 시민권자가 되려는 "비-로마 인"
들의 열망이 반영된 것으로서 “시민권”을 받은 후에는 그 자식에 까지 세습... 되었기에
목숨을 걸고서라도 얻고자한 이유가 성립 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제
부터는 충성을 바쳐야 하는 조국이 새롭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Urbs Roma 입장에서도 그들을
충분히 활용가치가 높아서 효율적인 관계 설정이 자연스럽게 발생된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을 기반으로 Roman Legion은 좀 더 강성해졌으며, 최강대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직접세"를 면제할 수 있을 정도로 "부의 팽창"이 가시화 되고
때때로 일시적 현상에 따라 상황이 반전하기도 하였으나 속주들로부터 유입되는 "부"의 알맹이
로서 Grain Bred, Wine, Olive Oil 마저 국가적인 차원에서 무상으로 배급이 이루어진 시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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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ria Baalbek
지위와 존업 성은 성실성에서 발생하며, 관직(행정직)에
오르는 명예는 존엄성에서... 최고의 권위는 관직(행정직)에
오르는 데서... 자유는 최고의 권위로부터 나온다. → Aemilius Scipio


그럼 !! 변화무쌍(變化無雙)한 Roman Legion에 대해 좀 더 접근해 보도록 하자 !!
기본적으로 인재 양성의 하나의 방법으로서 장래 군대를 지휘하게 될... 귀족들의 자제
들은 전쟁 사 혹은 전략 서를 통한 이론적 학습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군사 훈련에 몰두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Troia(트로이아)" 라고 불리던 모의 전투로서 이것은 원로원
의원의 자제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 실전 처럼 전투 훈련을 하는 일종의 학습이자 놀이기도 했다.
Gaius Julius Caesar의 영원한 앙숙이자 공화주의자이기도 했던 Marcus Porcius Cato Uticensis
(기원전 95-기원전 46) 또한 어린 시절 이러한 훈련에 참가 하였으며, "술라의 아들"과 Magnus-
Pompeius의 조카도 함께 했었고, 이러한 훈련은 제정기(원수정) 까지 지속되었다. 또한
공식적인 직책을 맡은 것은 아니었지만 군사령관의 막사를 따라서 전투 경험을 쌓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 소규모의 전쟁이 지겹도록 지속되었던 Urbs Roma에서 군사적 능력은
정치적 성공을 보장해주는 핵심적 가치이기도 하였다. 군사적 업적을 세운 사람은
Res Publica = Roman Republic시대 "선 거" 혹은 Imperial(제정) 시대 황제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데 유효하였는데 더욱이 지휘관의 자질로서 능력과 불굴의 용기는
필수적으로 작동되어야 했던 것이었으며, 이것은 정치적 성공에 좀더 근접하는 지름길이기도
하였다. 예컨대 군사령관이 적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모 아니면 도" 이라는 식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지휘하였던 것은 자신의 목숨
보다 승리를 원하고, 승리해야 자신의 앞날도 보장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Urbs Roma의 상층부 그러니까 Roman Legion의
지휘부에 대한 인재 수급은 대체로 완만하게 진행되었고, 비교적 성공적이었다고
말해도 될 듯싶다. 보편적으로 당대 Res Publica → Republic의 정치 구조
속에는 Gens의 피가 흘렀으며, 이러한 씨족 공동체의 힘에 의해 "양자 입양" 등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결과적으로 긍정 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Urbs Roma라는 곳이 사회적으로도 씨족에 크게 의존된 사회이었고, 강조하지만
상층부의 모든 부분에서 요구되던 인재는 실제로 Gens를 통해서 집중적으로 배출 되었기에
Gens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재가 나서지 못하던 순환구조이었던 것도 절대적인 사실이기도 했다.

특히 !! 주도적인 위치에서 위대한 족적을 남긴 3 개의Gens는 주목된다.
나열해 보면 Aemilius Paullus(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Tiberius Sempronius-
Gracchus(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Pu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Gens 라고 할 수 있으며, 모두 Punic War 전, 후로
직접적인 전공을 세운 가문들이기도 하였다. 또한 3 개의 위대한 가문은 묘하게도,
Third Punic War 당시 총 사령관이었던 Aemilius Scipio의 막사에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Dignitas & Auctoritas를 갖추고 고분 분투하던 한 젊은이에게 모두 연결되어 있었는데 바로 !!

이러한 인물이 Tiberius Sempronius Gracchus이며, 그와 사촌이면서
매형이었던 Aemilius Scipio의 막사에서 Cursus Honorum(쿠르수스 오노룸,
정치적인 사다리)
이용한 성장의 진통을 겪고 있었던 셈이었다. 당시 Tiberius-
Sempronius Gracchus가 전쟁터의 막사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분명하다. 당대만
해도 정치적 경력과 군사적 경력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사회이었고, 공직에 입후보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크고, 작은 전투에 임하면서 전공을 세워야 했던 사회이기에 가문의
인재 양성에 정확히 초점이 맞춰진 꿈의 길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 군단장이나 천부 장
같은 군사적 직책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단순하게전쟁에 참여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이상주의 적인 목표를 현실화 하는 과정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자 유"는 Urbs Roma
귀족들이 가장 귀중하게 여겼던 가치이었다. 그것이 바로 Res Publica = Roman Republic의
정수이면서 핵심적 가치이었던 것으로 그러한 결실은 개선장군이 되어 행진하는 것이 포함되었으며,

이것이 Urbs Roma 상류 사회 내부에서 성장하는 인재라면 반드시 추구
해야 하는 목표이기도 했다. 또한 하나의 공동체적인 구성 요소로서 "엘리트 집단" 이
베푸는 만찬과 사교적 모임을 통해서 자신의 경력 관리가 쉽게 이루어졌으며, 명성,
영광, 특권, 엄청난 "부"의 실현은 부수적인 것으로 군사적 성공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사다리를 타고 꼭대기에 이를수록 자신의 손에 넣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정복지와 속주" 등에서
유입되었던 엄청난 국가 재산들 속에서 Urbs Roma는 번영하고 있었고, 산업과 소비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Urbs Roma가 새로운 번영의 중심에 놓여 져 있었어도 모든 시민이
그러한 혜택에 노출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 !!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어 있었고, 군사적 문제로 직결
되어 확대되어 가는 경제, 군사, 사회적인 분야에서 간극이 심화되었다. 기원전 2 C 공화정 후기
Urbs Roma의 모습은 Marble(대리석)을 건축 소재로 지어진 공공장소와 주랑들이 줄줄이 들어선
도시 만은 아니었다. 즉 !! 도시의 정치, 경제적 중심지를 조금 만 벗어나면 어지럽게 형성된 또 하나의

도시 모습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혼란스럽고, 말끔한 모습을 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던 측면도 있었다는 것이다. 주택 환경은 더욱 열악해져 있었고,
도시가 기형화 되면서 가난했던 시민들이 살아가는 주택의 임대료는 시간이 흐를수록
높이 치솟았다. 극빈층에 속한 사람들은 공공건물의 구석이나 건물 사이의 빈틈 사이, 혹은
계단 밑을 자신의 집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들은 무덤에 이르기 까지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값싼 주택의 경우에도 취사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빈민들과 노예들은 생활공간을 거리에 까지 연장하였고, 술집과 식당들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반면 "엘리트 귀족" 의 삶은 전혀 달랐다.  비좁고 어지러운 아래쪽 길거리의 풍경과 다르게
높은 지역에 거주하며 살아가던 그들은 사치스러운 저택과 주랑이 늘어선 정원을 갖춘 주택에서
시원스럽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곳은 결코 아무나 들어
설 수 있던 곳도 아니었고, 그저 높기만 했던 언덕이기도 했다. 더욱이 부자와 빈민을 갈수록 분열시킨

인화성 강한 Issue 중 하나는 "토 지" 문제의 시작이자 끝이기도 했고
성장을 둔화시킨 잠재적 요인으로서 “권력과 부”의 균형이 불합리하게 작동
되었던 이면에는 이와 같은 모순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시민
들은 탈출구를 찾아 도시를배회하게 되었는데 여전히 이들에게는 그러한 기회
마저 상실된 상태에 놓여졌다. 그러나 쥐구멍에도 햇볕 들어오는 법이 있는지 이러한
도시의 빈민 층들에게 기회가 제공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Roman Legion의
병사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으며, 이전에는 최소한 "재산 요건"을 갖추어야 했으나
이제는 극빈층에 속하는 무산자들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군단 병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즉 !! 자유민이라고 하면 군대에 복무함으로써 스스로의 재산을 보호할 의무를 이행하는
경우로 이해되었지만 무산자들에게는 오직 !!희망으로 보였을 뿐이다. 반면에 당대 일부 부패한

귀족들의 부패와 무능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인 사건으로서 기원전 105 년
Germania People에 의해 병사 50,000 명이 학살당하는 믿기지 않은 사건이 South-
France= (Orange)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사실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잘 훈련된 정규군도
아니었고, 그저 이동 중인 무리들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으로 기원전 390년 Celt People
들에게 당했던 굴욕에 버금가는 파괴력을 주었던 치욕이었으며, 상대가 당대 최강대국이었던
Urbs Roma 라는 사실에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원로원은 비상 대권을
가동 강력한 권고와 함께 Gaius Marius를 총사령관으로 해서 Roman Republic의 공황장애
(恐慌障碍)를 가져다 준 사건을 해결하고자 했다. 다행스럽게도 Gaius Marius는 군사적으로 그 가진
능력이 탁월했는지 좌충우돌(左衝右突) 하며 "튜턴 족속" 기원전 102년에 안정시켰고,
기원전 103년에는 "킴브리 족속" 마저 격파한다. 사실 그가 기원전 107년 Numidia-Numantia의
반란을 잠재우고, 집정관이 되었을 시기만 해도 그는 그저 정치적 Novus Homo이었으나 이러한 활약을

근거로 1 임기의 집정관에 5 회에 걸쳐 연속해서 오르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훗날 사망하기 전에도 한번 더 가져간 관직(행정관)으로서 현실적인 법률
체계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로 확인되는데 그가 누구이던가 !! 대중적 지지도 역시 !!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원로원의 묵인 혹은 비호 아래 Roman Legion의 최고
수장으로서 당대 최고 권력을 누리게 되었던 셈이었다. 또한 그가 추진했던 병제 개혁은
다소 정치적 모순을 잉태시켰으나, 당시 사회적 안정 장치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한 것이었다. 그럼 여기서 Gaius Marius의 병제개혁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Second Punic War 시기부터 실질적으로 군단 병 들은 쉴 틈이 없었다. Greece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 하고자 했던 Philippos 5세를 저지하기 위해 벌인 제 2 차
Macedonian War, 이러한 지역의 군사적 공백기를 틈타서 Anatolia를 넘어 Greece 까지
넘보고 있던 Syria-Antioch 3 세 와의 전쟁(기원전 192-기원전 189), 그리고 이어진
제 3 차 acedonia War(149-146), Second Punic War, Numantia War(151-133) 참으로
지겹고, 끝도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군단병들의 고충은 이루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전쟁에서 이겼다고 해도 모든 것이 종결된 것도 아니었는데 Macedonian-Spain-
Gallia Narbonensis를 속주로 편입 시킨 후에는 그곳을 지키기 위한 병력으로 파견되어야
했던 상황이었으므로 병사가 필요한 지역이 증가되면서 복무 기간을 넘기는 일은
이제 일도 아니었다. 또한 끊임없이 신병이 요구되었다. 반면에 징집 대상은 부족하기만 했다.      

Aemilius-Ponte Rotto(179)
Italian Peninsula Map
Segovia's Aqueduct-Spain
즉 !! 농민(소작농)이 주요 대상이었던 상황에서 농민 계층이 붕괴되었으니
병사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기본적으로 Urbs Roma는 자비로
무장을 했던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일반 평민들은 빚더미에
몰려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더구나 곡물의 절대 수확량의 부족
으로 자급자족이 어려워졌고, 전문적인 기술력 부재로 Grape & Olive Tree의
수익성 부재를 불러 왔으며, 정복 전쟁으로 말미암아 노예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인구 체증으로 실업률 가중, 도시 주택난 증가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전쟁을 통해서
국가는 제국이 되었지만 전쟁의 주역은 망해 버려 기반이 붕괴된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재산 자격 미달로 병역 면제 대상자도 증가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해야 했고,
신병은 없어 결과적으로 재산 자격을 낮추는 일이 가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기원전 6 C Servius 왕정(王廷)시대 재산이 1만 1천 as 미만이 병역 면제
대상이었는데 기원전 215-4000 as, 기원전 129-1500 as로 낮아졌다. 지켜야 할 땅은 넓어졌고,

전쟁은 지속되었으며, 유능한 선임 병은 제대를 원하고, 제대 군인을
대체할 신병은 갈수록 부족해져 드디어 한계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참고로
병제 개혁 이 후 Roman Legion의 군단 병 숫자는 대략 Punic War(23-25 군단),
Magnus-Pompeius & Gaius Julius Caesar(45 군단), Octavia & Antonius(60 군단)로
고정되었는데 이 후 황제가 된 Caesar Augustus에 의해 또 한번의 역사적인
병제 개혁이 추진되기에 이른다. 본질적으로 Gaius Marius의 병제 개혁을 거치고,
내전기라는 홍역을 치루면서 군단 병의 숫자는 위에 언급된 것처럼 엄청난 증가세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Roman Legion의 군사적 훈련의 효율성을 확보 했다는 사실
인데 과거 병사들은 전쟁이 끝나면 자신의 땅(토지)으로 얼릉... 돌아갔지만 병제
개혁 이 후 입대한 "무 산 자" 들은 전쟁이 끝나도 돌아갈 땅이 없었다. 또한 이러한 시기
부터 전쟁 후 얻어진 전리품과 군사령관들의 논공행상(論功行賞)를 기대하던 병사들은 오랜
복무 기간에도 불평이 없었던 직업적 병사 되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들은 체계적이고,
강도 높은 훈련을 견디면서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을 함양하였으며, 실제 전투에서
놀랄만한 전투력을 발휘하였다. 다시 말해 Roman Legion이 훗날 심각하게 변질되었다고
하더라도 전반적으로 강군이 되었다는 사실로서 받아 들일 수 있겠다. 또한 마리우스는
"중대 편제" 에서 "대대 편제" 로 군 편제를 단행하였다.  대대 편제에서 하나의 군단은 10 개의

보병대로 나뉘었고, 각 보병대는 6 개 백인대로 세분화되었다.
한 개의 백인 대는 13 명이 6 열로 나뉘고, 78 명의 병사와 1명의 백부장,
부관 1 명 총 80 명으로 구성되었고, 한 개의 보병대 인원은 480 명(80 × 6)
이었다. 각 백인 대는 다시 8 명으로 구성된 10 개의 분대로 나누어졌다. 대대로
편성 된 후 중대에 대한 흔적은 사라졌으나 중대에 대한 소속감은 사라졌고,
병사들은 이때부터 묘비명에 각자가 소속된 보병대와 백인 대를 기록하였지만 소속
중대는 누락시켰다. 대대 편제로 개편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입대에
필요한 재산 자격이 철폐(이전에는 재산과 연령에 따라 전투 장비와 서열이 달랐다)
되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Roman Legion의 기동성 때문(기병 중심의
병력과 대치한 경험) 이었다. → 연령과 재산 중심에서 무기 중심으로 편성(무산자)

Gaius Marius의 병제 개혁의 이점은 무엇보다도 병사들의 유대감을 강화
시켰다는 사실에 있다. 파편화되었던 중대 구조개선(단결력 함양) 되어
8 명의 대원들의 동질감이 알콩달콩... 쌓이게 되었으며, 이것은 확실히 중대 편제
시기보다 장점으로 작용되었던 것 같다. 또한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적의 공격으로부터 동료를 구하려는 의지가 반영되면서 전체적으로도 "대대 편제"는
Plus 효과가 있었으며, 독수리 군기 아래 똘똘 뭉쳐 전투력 향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더불어 그 어떤 가혹한 상황에서도 훈련을 병행할 수 있어서 자연스럽게
군기 확립을 이루었고, 지휘관으로서도 "대대 편제"로 바뀐 후 지휘하기 용이 해졌다는
사실이다. 즉 !! 30 개 중대로 구성되었을 때 보다 10 개 대대로 편성되어 명령의
전달 방식이 단순해졌고, 통제(백부장 60 명으로 고정)가 쉬어졌다는 의미이다. 또한
군사령관이 다양한 전술에 따른 작전 전개 능력이 가능했고, 전체적으로는 기병
보다 보병이 강화(군사적 효율성 재고)된 형태를 가진다. 참고로 Gaius Marius 시대의
적대 적 세력은 Roman Legion의 장점이기도 한 대형적 전술에 대응, 작전상 시간 차를
두지 않고 빠르게 전개되는 빠른 기동력을 갖추고 있었다. → Numantia, Numidia, Galiiia, Ger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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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 People 들은 한사람... 한사람...
설득하기 어렵지만 무리로 있을 때에 지도자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한다."→ Marcus Cato(기원전 3 C)
Meditations
Turning Point
Roman Empire의 힘이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군단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면 병사(평민)들의 놀라운 투혼은 고된 훈련 과정에서 비롯되어진다.
일단 신병들이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 그들에게는 정식으로 입대가 허용
되었으며, 군 생활로 인한 필요한 소정의 급여가 지급되었고, 그들은 엄격하고
혹독한 훈련을 거치게 된다. 훈련이 잘된 병사는 무적의 군단 병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데 대체로 전투가 벌어지던 무더운 여름에도 지치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기상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당대의 병사들의 군사적 훈련은
인권 문제도 개입될 여지가 없었기에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병사들에게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둘렀고, 심한 경우 죽도록 매질을 했다. 예컨대 병사 하나가 명령을 어기면
10명에 한명 꼴로 제비뽑기를 하여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매질을 하여 거의 초죽음 상태를
만드는 체벌을 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군기는 공포심만으로 잡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단결심을 고취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로서 어떤 경우든지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병들은 8 명이 한조가 된 분대 즉 !! Contubernium 별로 훈련을 받고,

싸우고 함께 휴식을 취하였다. 말하자면 하나의 분대 단위가 "막사 동기"
이었던 셈으로 건장한 남성 끼리 생활하다보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도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 "성 " 이 되었다.  외형적으로는
Roman Legion에서 성 관계는 허용되지 않았으나 성욕을 쉽게 해소 할 수 있었던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지휘관(귀족)들은 아내를 병영 근처에 두고,
쉽게 그러한 욕구를 해결하였으며, 병사들은 주둔지 바깥으로 나가 "매 음 굴"을
찾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규칙은 Caesar Augustus 시대에 제정되어 기원 후
200 년이 되어서야 폐지되기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일부 병사들은 사실 인근의 여성들과
동거하며, 자녀를 두기도 하였고, 이러한 관계가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Urbs Roma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독특한 성욕 해결책이 존재
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동성애(同性愛)이었으며, 고대인들에게는
실질적으로 동성 혹은 이성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물며 "장군과 미소년"
Scandal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최고 지휘관들도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즐겼으므로
아마도 당시에는 쌍방 간에 합의만 있으면 크게 문제 시... 되는 것이 아니었던 같다. 때로는

군사 외적인 이유로 치명적인 사태가 전개되기는 했으나 "로마 군"의
동성애(同性愛)는 병사들 간의 우애와 단결력을 북돋아 주는 감정이나 문화
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동성애(同性愛)는 곧 동료애(同僚愛)와 같았고, 이것은
전쟁터에서 하나의 Synergy(시너지) 효과와 같은 약방의 감초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강조하지만 군대는 단결이 중요 했다 !! 출신 지역도 다양하고 진지 생활에
대한 적응 여부도 다르게 나타났으며, 성욕을 풀지 못해 끙끙 앓는 젊은 사람들을
모아 단합된 조직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지휘관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말썽을 부리는 병사도 있었고, 군 생활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는
병사도 있을 수 있었다. 때로는 불법적인 가족을 둔 병사들은 극도로 제한이 심한 군-
생활에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을 법 하며, 군단 병들은 나이가 들어 진급을 하여도 여전히
심한 질책과 가혹한 구타에 시달려야 했던 병사들은 과연 전역한 후 두둑한 연금으로
행복한 여생을 즐길 수 있을지 의심하기에 이르렀고, 드문 경우이지만 이러한 병사들이 중심이
되어 군단 내에서 과격한 폭동으로 표출되기도 했을 것이고, 탈영이라는 형태의 행위도
서슴 치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Caesar Augustus(기원 후 14) 사후 "다뉴브 강, 라인 강" 을
따라 주둔하던 Germania 군단들에게서 대규모 폭동이 자행되었는데 이러한 폭동은 "티베리우스"
에게 압력을 가해 지나치게 긴 복무 기간(20 → 16년)을 단축하는 것과 추가로 5 년이 더해진
"예비군 제도" 를 폐지하려는 움직임(대폭적인 급여 인상, 전역 연금의 현금화) 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 Caesar Augustus 사후 이런 일이 발생되었을까 !! 참으로 묘한 이야기라고 볼 수밖에 없을 듯싶다.

주요 훈련이외에 특별한 과정으로 나무 베기, 구덩이 넘기, 헤엄쳐서
강 건너기 등이 포함되었다. Roman Legion의 기강은 신병이나 선임 병에게
똑같이 적용되었으며 엄격하고 가혹 했다. 이러한 점에서 Caesar Augustus 시대에
군단 병(병사)들의 환경은 진지에서 물건을 훔치거나 위증을 제시한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2 C 전의 상황과 거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잠든 병사가 발각되면
동료 병사들은 돌을 던지거나 몽둥이로 구타를 가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이러한 형벌은
죽음에 이르기 까지 할 정도로 매우 치명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엄격하고 가혹
했을지라도 군대의 규율은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되었으며, 그들이 승리를 거두는 비결은 우수한
장비와 엄격한 훈련과 군사적 기강에 비롯된 것이다. 또한 진지, 전쟁터, 도로에서 항상 질서
정연하고, 일사 분란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질서와 군기가 무너지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는데도

불구하고, 낯선 적국에서 좀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발견할 경우에 병사들의
엄격한 군기를 유지하기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기원전 1 C 기준 25 개 군단에...
Auxilia까지 합치면 상비군 까지 해서 300,000명이었는데 여기에 추가로 동원할 수 있는
인원까지 계산 하면 100만 명은 쉽게만들어 졌을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언제나
수적인 우세가 "로마 병사" 의 강점으로 작용되었던 만큼 병사의 숫자가 많다보니 갖가지
문제가 발생되었던 경우의 수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모르나 Roman Legion의 병사
(신병, 선임 병)들이 혹독한 훈련을 할 또 다른 이유(기강을 확립)가 생겼고, 그 시작은
가장 기초적인 "보폭 훈련" 에 몰입되면서 시작되었다. 1 개월에 3 회씩 실시하는 행군은 거의
36 km에 달하는 거리를 대략 5 시간 내에 완주해야 했다. 더구나 원정에 나서는 모든 병사들은
중무장 상태(30.4 kg)에서 주둔지 기후와의 싸움에서도 우위를 점해야 했다. 그들은 쉴 틈이 없었다.

훈련을 마치면 노역이 기다리고 있었고, 노역이 끝나면 또 다시
반복되는 훈련을 극복해 내야 했다. 또한 식량 그리고, 노역에 필요한
장비(톱, 곡괭이, 낫, 바구니, 식량) 같은 필수품까지 휴대해야 했는데 이동시...
에는 이러한 장비들은"T" 자 형의 막대기에 가로로 줄지어 매달아 막대기 끝을 잡고,
어깨에 걸치고 끌고 가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Urbs Roma 병사가 체력이
중요했던 점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참고적으로 부대가 공유하던 짐은 "막사와 멧돌"
인데 이것은 각 부대에 배정된 "노새" 가 싣고 이동하게 되었다고 해서 후일 "로마 인"
들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Mulus Mariani(마리우스의 노새)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하나의
Roman Legion이 주둔지를 변경 이동할 시 규칙 혹은 규정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나 반드시
실천했던 형태가 있었다. 그것은 정찰병, 보조 군병, 궁수(매복 방지)가 먼저 앞서고,
그 뒤로 보병과 기병, 측량 도구를 운반하는 부대가 이어졌고, 일부 기술자들(공병)이 뒤따르게
된다. 그들은 거칠고, 험한 길이 나타나면 평탄하게 만들고, 행군을 방해하는 나무를 자르며,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군 사령관과 그의 경호 부대, 기병대, 무기 행렬, 군단의 기수,
Trumpet = Tuba(튜바) 취주 자들이 뒤 따랐다. 그 다음으로 군단 병들이 대대 별로 따랐고, 뒤이어
군수품, 외국인 용병부대, 후미 방어를 위한 보병과 기병이 후미에 위치했었다고 한다. 이동 중에
백부장들은 백인 대 주위를 오고 가면서 병사들의 행렬을 유지시켰고 낙오자들을 격려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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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utschland In Koln
Trajanus...
당대 !! Urbs Roma가 전쟁을 할 강력한 힘이 없었다면 다른 주변
강대국에게 크지도 않았던 영토를 상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약소 국으로
전락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강인한 병사 있어야 했다.
따라서 Urbs Roma의 병사는 그러한 강인한 병사이었던 셈이다. 그들은
시민군이었으며, 애국심과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그러한 병사이면서 힘든 군 생활을
잘 견뎌내었던 인내심 많은 병사이기도 했다. 100 년에 한번 인상되는 급여,
1 년에 세 번 지급되는 최저 생계비, 1만 1천 as(= 토지 3040 평)은 당시 병사에게
지급되었던 Stipendium(급여)이었다. 또한 이러한 경비마저도 복무의 대가가
아니라 복무에 필요한 경비로서 지급되었다는 것이다. 투박한 손을 가졌고, 사치라고는
전혀 모르던 검소한 생활을 하던 병사들에게 승진은 곧 !! 돈으로 연결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아마도 이때쯤에 뇌물이 등장한 원인이 되었지 않나 싶다. 자고로... Urbs Roma의
원칙은 병사들을 풍요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Urbs Roma → Roman Empire으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원칙은 확고부동(確固不動)한 공화국 혹은 제국의 진리
이기도 했을 법하다. 적은 Stipendium(급여)로 의식주(衣食住)에 해당하는 비용 지출과
전투 장비 구입을 해결해야 했으므로 병사(평민)들은 검소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Why !!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국가 재정이 어려워도 군인들의 Stipendium
(급여)는 최우선적으로 Urbs Roma의 지휘체제가 지출하는 항목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여기서
Urbs Roma가 강대국으로 발전한 이면에는 항상 궁핍한 병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병사들은 항상 부족한 생활을 영위해야 했으므로 전리품과 상여금을
"승리의 조건" 으로 내걸을 때 Urbs Roma 병사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싸웠으며, 그것이 그들이 유일
하게 가졌던 순박한 권력이기도 했다. 주목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병사들의 생활이 풍요로워졌을
때는 Urbs Roma의 혼란기이었다는 점이었고, 결과적으로 Res Publica = Roman Republic
말기 내전기가 그랬고, 말도 안 되는 Roman Empire 패망을 앞둔 3 C  군인 황제 시대가 그러 했다.

내전기 → 기대감 충족, 안정기 → 기대감 상실 돈의 경쟁 전쟁
약탈의 허용, 예기치 않았던 상여금 지급, 정치적 안정과 상여금의 반 비례...

즉 !! 안정기보다 내전 기에 군사령관으로부터 충성심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지급 받음 !!
권력에 사로잡힌 Legati(레가티, 야심가)들에게는 병사들의 지지가 필요했을
것이고, 반대로 병사들은 물질적인 축복이라고 할 수 있었던 "돈" 이 필요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부족한 생활을 하는 병사들에게 야심가 들이
내걸은 "돈" 의 유혹은 강력하게 작동되었던 셈이다. 그들 중 일부는 그저 돈만 많이
받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미 !! 돈 맛을 본 병사들에게 과거의 검소한
생활로 돌아가라고 요구할 수도 없었다. 예컨대 권태로운 평화의 시대처럼 황제 권이 강할
때는 병사들의 "돈" 욕심을 누르게 할 수 있었지만 혼란의 시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 양날의 검

앞서 설명되었지만 기본적으로 Urbs Roma는 정복된 지역을
Ager Publicus(공유지)로 삼았고, 그 지역에 식민시를 건설하여
제대 병들을 정착시키는 정책을 폈다. 국가에서 제대 할 군인의 수와
필요한 규모의 땅을 정확하게 계산하여 "말뚝으로 구획을..." 정리하면
제대 군인들은 추첨을 해서 자신들의 땅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정착하였다고
한다. 반면에 국가는 식민시를 건설하여 제대병을 정착시키면 많은 이점이
있었다. 우선 제대병들이 식민시 주변의 질서 유지를 담당해 주므로 부차적으로
Urbs Roma에 대항 하는 잠재적 세력을 견제할 수 있었고, 제대병들이
땅(토지)을 할당 받아 새롭게 징집 대상이 될 정도의 재산을 형성하면 재-입대가
가능해지게 되었다는 셈이다. 어찌되었든지 국가로서는 인구를 분산시킬 수
있어서 본토의 인구 팽창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고 Urbs Roma의 문화 확산에
긍정적으로 작용 되었다는 점에서 여러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실질적으로도 제대 병
들이 자영농으로 성장하면서 재-입대 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게 되었던 것으로 
이러한 사실은 Urbs Roma의 군사력 증강으로 이어졌으나 모든 제대병들이 재산의
증식을 가져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쯤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듯싶다. 또한 그들은 
대토지 농장과의 경쟁에서 밀리게 되는 경우 상속자 없이 사망하는 경우가 있었고, 
제대병에게 할당된 토지(땅)가 다시 Ager Publicus(공유지)로 귀속되는 사례도 있었다.

기원전 2 C → 1-2 Iugerum 정도면 온 가족이 먹고 사는 대다수의
농민과 비교하면 당시 제대 병들이 지급 받았던50 Iugerum 정도의 땅은
유지 하는 것만으로 징집 대상이 되었으므로 군사력 증강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병사가 많았다는 점도 문제가 되었다.
이것은 일시에 제대한 병사들의 증가로 이어져 공유지가 부족한 사태를 초래
했기에 때문으로서 이러한 문제 해결은 정치적인 반대파의 재산을 몰수하여 그곳에
정착시키는 방식이 선호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Sulla, Caesar, Augustus
등은 한결같이 이러한 방식을 채용하게 되었고, 상당한 부를 쌓아 대부호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근본적으로 병사는 결혼하여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하였기에 한곳에 제대병의 이주가 집중되면 통합된 공동체 형성에 어려움 점도
작동되었다. 이제 내전이 끝났다. Marius & Sulla → 1 차전, Pompeius, Crassus &
Caesar
→ 2 차전,Antonius & Augustus → 3 차전 까지 대략 80 년 간 내전이
끝나고 평화와 안정기를 확립한 Caesar Augustus에게는 많은 일들을 처리하게 되는데
그에게 있어서 순차적으로 당면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목표는 Roman Legion에 대한 지배권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것과 동시에
Legati(레가티, 군사령관)들의 자의적인 징집을 막아 병사가 사병 화 되는 것을 차단
시키는 것이 중요했으며, 그래서 첫 번째로 취하게 되는 조치가 Roman Legion이 주둔하고
있는 속주들을 황제의 관할 하에 두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속주 분할을 통해 행정을
좀 더 체계화(기원전 27) 시키게 된다. 즉 !! 비교적 평화롭고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난 속주를
원로원의 관할 하에 두었고, 그 자신은 적들이 존재하거나 심각한 반란의 가능성이 있던
불완전한 속주를 보유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Roman Legion은 전쟁의 위험이 있던 변경
지역에 주둔시키고,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그가 군사력이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Pro-Consul(프로 콘술, 구-집정관), Praetor
(법무관)에 의해 통치되던 비교적 안정된... 원로원의 속주 통치

Augusti Propraetor(아우구스티 프로프라이토르)
황제가 파견한 Propraetor(프로프라이토르, 속주 총독)에게 위임된... 황제의 속주

그렇지만 이러한 개혁에서도 Egypt는 예외 이었다고 한다. 그곳은 하나의
속주로 간주된 것이 아니라 Roman Empire의 한 부분으로 인정 되었기 때문으로 
Praefectus(프라이펙투스, 총독)에 의해 다스려 졌다. 또한 이러한 모든 지배
영토에 대해 머릿수 별로 Tributum Capitis (트리부툼 카피티스, 인두세) 혹은 토지별로
Tributum Solli(트리부툼 솔리, 토지세)로 각각 세금을 거두었다. 또한 징수를 합리화
하기 위해 Caesar Augustus는 속주마다 조사를 실시하여 정확한 "토지 대장"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그러한 세금체계에 속주에 무거운 부담을 가중시키는 제국의
국경 / 속주의 국경에서 관세가 더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세금 징수가 아무런 사고
없이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토지 대장에 따른 세금의 부과는 때때로
인구 이동을 가능하게 하였고 여러 속주들의 반란(기원후 1 C)의 이유가 되었다. Gallia
→ 21, 68 Judaea → 40, 52, 66 그럴 때 마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제는 징병제에
모집된 병사가 아니라 직업 군인들이 대세를 이루던 Roman Legion의 힘에 의존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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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Cameo of Augustus
두 번째는 군사령관들이 임의대로 병사들을 모집하던 관행을 막기 위해
상비군 체제를 만든 것이다. 군단의 유지비와 국가의 영토를 감안하여 60 개에
이르던 Roman Legion을 28개로 축소시키고, 나머지 군단 병들은 모두
돈이나 땅을 주어서 제대 시켰다. 기원전 13 년 부터 군단 병은 16 년을 기본으로
복무하고, 예비군으로 4 년을 더 복무하도록 했으며, 기원전 6 년 부터는 2 년을 복부
하고 5 년을 예비군으로서 총 25년으로 복무 기간을 확정했다. 세 번째는 재정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기부금, 상속세를 재원으로 "군사 금고" 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 후 이러한
금고에서 병사들의 급여와 상여금 등이 지불됨으로써 돈을 매개로 한 군사령관과
병사의 연결 고리를 일단 끊었다. 또한 Roman Legion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했던 기병
약화와 근위대, 함대처럼 특수한 임무를 띠고 있는 부대를 필요할 때마다 편성하는
임시 변통 식 체제를 개선한 것이다. 그리고 군단을 재 비하면서 기병대를 군단에 복속시켰다.
 
Romulus에 의해 군단의 형태가 최초 형성되었을 때부터 Roman Legion에는
300 명의 기병이 있었다. 그러나 "마리우스" 이 후 기병은 약화되었는데 기병을
용병에 의존할 시... "카이사르"의 경우처럼 믿을만한 기병을 찾기 어려웠고, 필요한
수만큼 기병을 모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기병이 강한 적을 만났을 때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었으나 이러한 약점들을 해소하기 위하여 황제는 군단에 120 명의
기병을 고정적으로 배치했던 것이다. 군단 병 중 일부가 기병 역할을 하였고, 이들은
Roman Legion 내에도 특별하게 대우 받았다. 그러나 120 명의 기병으로는 근본적으로
보병 위주의 전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기대할 수 없었다. 예컨대 산발적인 공격을 가하는
Germania 혹은 중장기병과 궁수 기병을 보유한 Parthia Empire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은 점차로 개선되어 "갈리에누스" 황제 시기에는 기병의 수가 700 명으로
증가되었고, 황제 직속의 기병도 편제 되었다. 더불어 "우구스투스 황제" 하나 더 신경
쓴 것은 군단뿐만 아니라 Res Publica = Roman Republic 시기 동맹군으로 Urbs Roma를
도왔던 군대 역시 보조 군으로 재편성하였다는 것이다. Auxilia(아욱실리아)은 군단 병과는
달리 대대가 최고 단위(480-500) 이었다. 훗날 800-1000 명으로 증대되었다. 보조군 기병대는
각각 500, 1000 으로 구성되었으며, 백인 대가 32-42 명으로 된 기병소대로 세분화 된다.
Auxilia(아욱실리아)의 복무 기간은 25년으로 제대할 때 로마 시민권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군단병과 비슷한 숫자의 보조 군이 존재함으로써 영토에 비해 부족한 군사력만으로 Roman Empire의
방어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를 통해 Urbs Roma의 문화와 관습 등이 자연스럽게
병사들을 통하여 확대되는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일종의 특수 부대로 편성된 부대는 근위대(9 개),
소방대, 함대 등이었다. 이중에서 가장 좋은 대우 속에 있었던 것은 정예 근위대 이었고, 이들은
Italian Peninsula  출신들로 구성되었으며, 복무 기간도 16 년으로 짧았다. 복무 지역도
Urbs Roma인근이었고, 대우도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래서 당연하지만 근위병들은

우월 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Constantinus 황제에 의해 해체 될 때까지
근위대의 정치 개입은 지속적으로 진행(기원후 312년 해체)되었다. 또한 경비대
역시 제국의 수도가 동방으로 옮겨지면서 근위대와 같은 형태로 몰락하였다.
소방대는 14개 지구로 나뉜 로마시를 2 개씩 담당 밤과 낮으로 순찰하여 화재예방과
진화를 목적으로 했으나 때로는 도둑과 도망친 노예를 체포하는 일 까지 맡은
치안 병력(야간 치안 문제 해결)이기도 했다. Urbs Roma는 함대 건조에 따른 고-
비용과 지속적 훈련을 필요로 하는 수병 양성의 비효율성을 고려하여 기원전 2 C 중반
이 후 독자적인 함대 구성을 포기한다. 그 대신 동맹국 함대와 동부 지중해 함대에 의존 했다.
그러나 "악티움 해전" 으로 바다를 장악할 필요성을 절감한 Caesar Augustus에 의해
새로운 함대가 창설되었고, 나폴리 만의 미세눔과 아드리아 해 북쪽의 라벤나를 기지로 삼게
된다. 따라서 함대가 상비군으로 편성되어 있어서 지중해 지역에서 제정기에는 커다란 해전이
없게 된다. 이러한 함대는 작고 빠른 선으로 대체되며, 전투 보다는 병력의 수송, 곡물 공급, 교역 품
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 했다. 내전으로 인해 나타난 Roman Legion 전체의 문제점을 점검한
황제에 의한 개혁은 철저히"사병 화 방지" 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국가 전체로는 상당히 유익
하였고, 군 체제는 3 C 말까지 Roman Empire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의 개혁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의 군 체제는 고인물이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약점으로 노출될 수 있었다.
따라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세가 결과적으로 Urbs Roma를 세계 제국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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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ladius Sword
Turning Poing
청, 장년기를 보내면서 군대 생활의 가장 걸림돌 중하나가 결혼이었다. 원래
Res Publica = Roman Republic에서는 병사도 결혼이 가능하였고 가정 생활이
보장되었다. 그런데 Caesar Augustus 황제가 상비군 체제로 전환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황제는 결혼 자체를 장기 군 생활의 걸림돌로 인식 했던 것이다.
즉 !! 처자식이 없어야 전투력이 살아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인데 그래서 병사들에게
결혼을 허가하지 않는 대신에 특권을 부여 하였다. 그것은 군인은 합법적인 유언장이
없이도 유언에 따라 재산을 상속 할 수 있는 권리를 승인한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Urbs-
Roma는 가부장(家父長)만이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군인들은 가부장(家父長)
아님에도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어떤 제한도 없었다. 반면 결혼
하고 입대하면 특전만 누릴 수 있지 않을 까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았다. 결혼 이 후
입대한 병사들은 입대와 동시에 결혼이 무효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 결혼 자체를
제대로 인정 받으려면 군인 신분에서 벗어나는 길 밖에 없었는데 만일 아내가 "로마 인" 이라면
그 결혼 자체를 인정받고, 아이들에게 재산을 상속할 수 있을 때는 제대한 이 후가 되었다.
만약 전사한 경우 아이 들은 "모 계"에 따라 시민권을 갖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때
타인에게 상속 받는 것으로 간주하여 5 %의 "상속세"를 내야 했다. 친부이기는 했으나
결혼이 금지된 친부이었으므로 부자 관계가 법률적으로는 성립되지 않았다. 고질적인 "지참금"
문제도 등장하였고, 주둔지에서 불법적인 결혼이 성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은
자식을 낳아야 하고 자식이 군단에 존재해야 국가의 안정을 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나 그것은 불법적인 것이 되었고,
시민권, 재산권도 상속의 권리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즉 !! 자식을
낳는 것 자체를 꺼려한다면 이는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이었던 셈이었다.
따라서 장점이 많은 결혼을 금지시키면서 비공식적으로 군인의 결혼을 묵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군단 병의 "결혼 금지" 는 시간이 지나면서 완화
되기에 이르렀는데 Hadrianus 황제 시기 군인의 결혼이 불법이었지만 자식들이
군인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 받을 권리가 인정되었고, 결혼 금지 규정자체를
폐지한 것은 Severus 황제 때이다. 따라서 이제 병사들의 아내가 주둔지 밖에서
사는 문제가 해결(결혼 관행 합법화)된 것이다. 또한 군인의 자식들은 군대에서 승진
할 가능성이 다른 병사들보다 더 많았다. 아버지는 시민권자가 아니어서 보조 군에
입대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아버지 덕택에 자식이 시민권자가 되는 경우의 수로서 보조
군단병과 그 자식들에게는 제대 할 때 "로마 시민권" 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아버지로부터 얻은 군사적 지식과 인맥은 승진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주둔하고
있는 지역에서 군인들이 모집 했을 경우 아버지가 복무 했던 군단에 복무하게 되는
경우도 흔하게 발생되었다. 이러한 경우 군인의 자식이라는 점은 엄청난 장점으로 작용
하였고, 어머니가 현지 여성이어서 시민권을 얻지 못한 자식은 시민권을 얻기 위해 보조 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이 역시 군단에 있던 아버지 도움으로 승진의 혜택을 받을 수 있기도
했다. 따라서 빠른 시기 "백 부 장" 이 되는 경우 대다수 군인 집안 출신자가 많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Hallsta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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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ad Out Stay / Jackson Browne

by Beercook | 2009/11/28 06:14 | History ...Package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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