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8월 28일
"느림과 비움"의 미학... 장자(莊子)
.
.
.
어렵고, 힘들어... 피곤하기도... 하지만...차분히...
.
.
모든 것의 근본은 하나이다. 하나가 합하여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그렇게 무극(無極) 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원래 하나인 것을 서로 나누고, 맞다... 아니다... 시비를
가리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잘났니... 못났니... 할 것이 아니라. 자연(自然)을
순수하게 받아 들일 필요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으로 바라
보자 !! "도(道)"는 근본이 하나이므로 부분이 없다...참 거짓
또한 없다. 말 역시 !! 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성인"들은 초월적인
자연과 현실에 대해 논리적인 응대를 하지 않고 침묵하였다고 한다.
"성인"은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말하기도 했으나
옳은 것과 그릇된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성인(聖人)은 "도"가 하나
임을 알기에 "도" 를 논하지 않았지만 범인(凡人)들은 "도" 를 알지
못하였기에 서로 잘난척 하면서 나서려 한다. 진정한 "도"에는
형채와 이름이 없음이다. 진정한 대답에는 말이 없는것이다. 인(仁)은
구별을 하지않고, 진정한 용기는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잘난척하지
말고,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 말며, 침묵의 미학을 알고, 그저 자연을 바라보았다.
.
.
.
"망량"이 "영" 에게 물었다. 당신이 조금 전에는 걸어
가더니 지금은 멈추었고, 조금 전에는 앉았더니... 지금은
일어섰으니... 왜 !! 그렇게 줏대가 없소 !! 그림자가 대답하였다.
내가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고, 나는 뱀의
비닐이나 매미의 날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겠소 !! 왜 !!
그런지 내 어찌 알 수 있겠소 !! 왜 !! 그런지 내 어찌 알 수 있겠소 !!
그림자는 조금 전에는 일어섰다가 앉았으며, 조금 전에는 걸었고,
이제는 멈췄다."망량(魍魎)" 이 줏대없이 일어섰다가 앉고, 걸었다가
멈췄냐고 물었지만 그림자는 대답하지를 못한다. 그림자는 "망량" 의
실책에 대해 자기가 왜 그런지...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림자는
솔직함으로써 "망량" 이나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이는 용기 있는 태도이다.
"앎" 이란... 근본에서 자기의 "모름"을 아는 것이다. "망량"은 자기의 이름도
모르고, 그림자는 "모름"을 알았다. 그런데도 "망량"은 "영(形)" 보다 빛을
갖고 있다고 교만해져서 그림자를 비판하였다. 마치 횃불이 태양보고 너는 왜 !!
빛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느냐고 꾸짖는 것 같다. "도(道)"가 빛의 세계라면
현실은 그림자 세계이다. 현실은 "도"가 그림자인 것이다. 우리는 그림자
이기보다 "망량"에 가깝다. 또한 의탁하여 살아가고 있다. "땅과 하늘"에 의탁
하지 않고, 삶을 이룰 수가 없다. 그런 인간은 우주안에 있는 그림자일 뿐이다.
.
.
.
내가 안다는 것이 "앎"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
사람은 유한성에 갇힌 존재이다.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우리 삶에는 끝이 있으나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으니 위태로울 뿐이다. → 양생주(養生主)
알아야 할 우주는 무한하고, 사람의 일은 복잡하게 얼크러져 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안들...우주의 편만한 혼돈의 무극(無極)을 다 알 수 없다. 작은
"앎" 으로 우쭐거리는 일은 교만의 소치이다. 적게 아는 자는 많이 떠들고,
아는자는 침묵한다. 많이 알면 알수록 겸손해지는 것은 "앎"이 더 큰 알지 못함의
세계를 밝혀주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앎" 의
하나인 사람은 "모름"이 열이요... "앎"이 일백인 사람은 모름이 일천이요...
"앎"이 일백인 사람은 "모름"이 일만이 되는 것이다. 적게 아는 자가 많이 아는
자를 훈계하는 것은 그림자가 그림자를 탓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이러한 일들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영"은 그림자이고 "망량"은 그림자 주변의 엷은
그림자를 말한다. 그러니까 "망량은 영"에 빌붙어 기생하는 존재이다. 땅의 음악을
듣는자는 하늘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를테면 "망량"은 땅의 음악만 듣는
자이다. 빌붙어 사는 주제에 그가 그림자에게 어찌 !! 그대는 "자주(自主)" 하는 지조가
없는가 !! 라고 따졌다. 우습지 않은가 !! 그림자에 빌붙어 사는 자가 그림자의 지조를 따지다니...
정신분석학에서 그림자를 열등한 인격의 부분이라고 말한다. 우리 안에
있지만 "자아(自我)" 밑에 눌려 아직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의식이다.
그림자에 대해 말할 때 그림자 앞에는... 억압된 감추어진... 열등함이라는...
형용사가 뒤따르고 있다. 그림자는 Persona(페르소나)의 이면에 숨겨진 내배엽적
의식세계이다. 다른 사람과 소통이 없는 내향적 사람의 의식안에 있는 이러한 그림자가
"자아"보다 더 많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질 때 분노를 작열시킬 수 있다. 평소에
숨을 죽이고 있던 이러한 그림자가 괴물로 둔갑하여 밖으로 밖으로 분출하는 것이다.
내안에 그림자가 "패악(悖惡)"을 부를 때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의 장본인이 된다.
우리의 "자아(自我)"는 지복과 기쁨, 통합의 빛으로 축복받은 자아와
어둠 속에 방치된 "자아"의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다. 분명한 것은 "자아"는
그림자도 "자아"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림자는 이해하지 못한 내안의 낯선자
이다. 그림자는 무의식에 거주하는 영혼의 일란성 쌍둥이 혹은 Doppelganger
(도플갱어)이다. 그것이 낯설다는 점에서 익숙한 "자아"에 견주자면 타자에 가까운
무엇이다. 눈도... 코도... 없는 그림자의 실체와 마주쳤을 때 우리는 놀란다.
우리가 인식한 "자아"는 밝은 빛 속에 드러난다. 어둠속에 은둔한다고 해서 그림자를
악의 근원자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내면의 빛과 어둠이라는 대극을 함께
갖고 사는 그림자이고, 때문에 빛과 그림자는 어느 한 쪽만을 갖고 살아갈 수
없다. 그림자도 함께 살아야 할 내 마음의 반려이다. Carl Gustav Jung(칼융)은 말한다.
"그림자는 인격의 살아 있는 한 부분이며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지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것을 내쫓을 수 없다면 그림자와 공존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그림자가 갖고 있는 창조적 충동과 열정을 예술 표현의 질료로 갖다 쓴다.
"빈센트 반-고호, 베토벤의 교향곡" 에서 그러한 그림자들의 Power(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Ludwig van Beethoven
Van Gogh-Starry Night Ballance
.
.
.
세상의 모든 종교가 악한 일 하지말고, "선업(先業)"을 지어서 "선과(善果)"를
받는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과보(果報)"는 틀림없는 일이다. "지옥과 천당"은
그림자와 같은 것이지만 자신이 스스로 극락과 지옥을 만들어 스스로 짓게 된다고
"인과(因果)" 를 분명하게 하였다. 하지만 "중생사(衆生事)" 라는 것이 때로는
욕심을 없애면 얻을 것이 많지 않은 곳으로서... 그래서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데 괴로움이
있을 망정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인데 불교(佛敎)에서는 구함이 없다면 즐거움이 있다고
가르치고, 명예 혹은 탐욕을 끊임없이 채워도 채울 수없는 "독" 과도 같은 허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
.
.
"너와 나"를 구분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내것도 없고, 네것도 있을 수
없으며, 함께 공존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
.
어렵고, 힘들어... 피곤하기도... 하지만...차분히...
우보천리(牛步千里) 줄탁동시(啐啄同時) → "소"의
걸음으로 천리를 가면 "때" 를 만나 모든 것이 원활하게 성취된다는 것 !!
.
.
모든 것의 근본은 하나이다. 하나가 합하여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그렇게 무극(無極) 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원래 하나인 것을 서로 나누고, 맞다... 아니다... 시비를
가리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잘났니... 못났니... 할 것이 아니라. 자연(自然)을
순수하게 받아 들일 필요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으로 바라
보자 !! "도(道)"는 근본이 하나이므로 부분이 없다...참 거짓
또한 없다. 말 역시 !! 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성인"들은 초월적인
자연과 현실에 대해 논리적인 응대를 하지 않고 침묵하였다고 한다.
"성인"은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말하기도 했으나
옳은 것과 그릇된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성인(聖人)은 "도"가 하나
임을 알기에 "도" 를 논하지 않았지만 범인(凡人)들은 "도" 를 알지
못하였기에 서로 잘난척 하면서 나서려 한다. 진정한 "도"에는
형채와 이름이 없음이다. 진정한 대답에는 말이 없는것이다. 인(仁)은
구별을 하지않고, 진정한 용기는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잘난척하지
말고,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 말며, 침묵의 미학을 알고, 그저 자연을 바라보았다.
.
.
.

가더니 지금은 멈추었고, 조금 전에는 앉았더니... 지금은
일어섰으니... 왜 !! 그렇게 줏대가 없소 !! 그림자가 대답하였다.
내가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고, 나는 뱀의
비닐이나 매미의 날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겠소 !! 왜 !!
그런지 내 어찌 알 수 있겠소 !! 왜 !! 그런지 내 어찌 알 수 있겠소 !!
그림자는 조금 전에는 일어섰다가 앉았으며, 조금 전에는 걸었고,
이제는 멈췄다."망량(魍魎)" 이 줏대없이 일어섰다가 앉고, 걸었다가
멈췄냐고 물었지만 그림자는 대답하지를 못한다. 그림자는 "망량" 의
실책에 대해 자기가 왜 그런지...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림자는
솔직함으로써 "망량" 이나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이는 용기 있는 태도이다.
"앎" 이란... 근본에서 자기의 "모름"을 아는 것이다. "망량"은 자기의 이름도
모르고, 그림자는 "모름"을 알았다. 그런데도 "망량"은 "영(形)" 보다 빛을
갖고 있다고 교만해져서 그림자를 비판하였다. 마치 횃불이 태양보고 너는 왜 !!
빛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느냐고 꾸짖는 것 같다. "도(道)"가 빛의 세계라면
현실은 그림자 세계이다. 현실은 "도"가 그림자인 것이다. 우리는 그림자
이기보다 "망량"에 가깝다. 또한 의탁하여 살아가고 있다. "땅과 하늘"에 의탁
하지 않고, 삶을 이룰 수가 없다. 그런 인간은 우주안에 있는 그림자일 뿐이다.
.
.
.
내가 안다는 것이 "앎"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
사람은 유한성에 갇힌 존재이다.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우리 삶에는 끝이 있으나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으니 위태로울 뿐이다. → 양생주(養生主)
알아야 할 우주는 무한하고, 사람의 일은 복잡하게 얼크러져 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안들...우주의 편만한 혼돈의 무극(無極)을 다 알 수 없다. 작은
"앎" 으로 우쭐거리는 일은 교만의 소치이다. 적게 아는 자는 많이 떠들고,
아는자는 침묵한다. 많이 알면 알수록 겸손해지는 것은 "앎"이 더 큰 알지 못함의
세계를 밝혀주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앎" 의
하나인 사람은 "모름"이 열이요... "앎"이 일백인 사람은 모름이 일천이요...
"앎"이 일백인 사람은 "모름"이 일만이 되는 것이다. 적게 아는 자가 많이 아는
자를 훈계하는 것은 그림자가 그림자를 탓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이러한 일들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영"은 그림자이고 "망량"은 그림자 주변의 엷은
그림자를 말한다. 그러니까 "망량은 영"에 빌붙어 기생하는 존재이다. 땅의 음악을
듣는자는 하늘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를테면 "망량"은 땅의 음악만 듣는
자이다. 빌붙어 사는 주제에 그가 그림자에게 어찌 !! 그대는 "자주(自主)" 하는 지조가
없는가 !! 라고 따졌다. 우습지 않은가 !! 그림자에 빌붙어 사는 자가 그림자의 지조를 따지다니...
정신분석학에서 그림자를 열등한 인격의 부분이라고 말한다. 우리 안에
있지만 "자아(自我)" 밑에 눌려 아직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의식이다.
그림자에 대해 말할 때 그림자 앞에는... 억압된 감추어진... 열등함이라는...
형용사가 뒤따르고 있다. 그림자는 Persona(페르소나)의 이면에 숨겨진 내배엽적
의식세계이다. 다른 사람과 소통이 없는 내향적 사람의 의식안에 있는 이러한 그림자가
"자아"보다 더 많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질 때 분노를 작열시킬 수 있다. 평소에
숨을 죽이고 있던 이러한 그림자가 괴물로 둔갑하여 밖으로 밖으로 분출하는 것이다.
내안에 그림자가 "패악(悖惡)"을 부를 때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의 장본인이 된다.
우리의 "자아(自我)"는 지복과 기쁨, 통합의 빛으로 축복받은 자아와
어둠 속에 방치된 "자아"의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다. 분명한 것은 "자아"는
그림자도 "자아"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림자는 이해하지 못한 내안의 낯선자
이다. 그림자는 무의식에 거주하는 영혼의 일란성 쌍둥이 혹은 Doppelganger
(도플갱어)이다. 그것이 낯설다는 점에서 익숙한 "자아"에 견주자면 타자에 가까운
무엇이다. 눈도... 코도... 없는 그림자의 실체와 마주쳤을 때 우리는 놀란다.
우리가 인식한 "자아"는 밝은 빛 속에 드러난다. 어둠속에 은둔한다고 해서 그림자를
악의 근원자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내면의 빛과 어둠이라는 대극을 함께
갖고 사는 그림자이고, 때문에 빛과 그림자는 어느 한 쪽만을 갖고 살아갈 수
없다. 그림자도 함께 살아야 할 내 마음의 반려이다. Carl Gustav Jung(칼융)은 말한다.
"그림자는 인격의 살아 있는 한 부분이며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지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것을 내쫓을 수 없다면 그림자와 공존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그림자가 갖고 있는 창조적 충동과 열정을 예술 표현의 질료로 갖다 쓴다.
"빈센트 반-고호, 베토벤의 교향곡" 에서 그러한 그림자들의 Power(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
.
.
세상의 모든 종교가 악한 일 하지말고, "선업(先業)"을 지어서 "선과(善果)"를
받는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과보(果報)"는 틀림없는 일이다. "지옥과 천당"은
그림자와 같은 것이지만 자신이 스스로 극락과 지옥을 만들어 스스로 짓게 된다고
"인과(因果)" 를 분명하게 하였다. 하지만 "중생사(衆生事)" 라는 것이 때로는
욕심을 없애면 얻을 것이 많지 않은 곳으로서... 그래서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데 괴로움이
있을 망정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인데 불교(佛敎)에서는 구함이 없다면 즐거움이 있다고
가르치고, 명예 혹은 탐욕을 끊임없이 채워도 채울 수없는 "독" 과도 같은 허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
.
.
"너와 나"를 구분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내것도 없고, 네것도 있을 수
없으며, 함께 공존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 by | 2010/08/28 06:03 | 82.3 % ...Deja Vu | 트랙백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