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4일
Roman Republic → Empire ...02


강대국의 사전적 의미는 "병력이 강하고, 영토가 넓은 국가이다." 고대 세계에서
바로 그러한 의미에 부합되는 적합한 국가가 Urbs Roma이기도 했는데 그들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자 군대의 역사(평민)이기도 했다. 왕정기(王政期)를 제외하고 공화정
(共和政)이 설립된 기원전 509 년에서 West Roman Empire의 마지막 황제가 잘려나간 407년
까지 10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내전 혹은 외부와의 전쟁을 수행하였던 기간은 대충 어림
잡아도 600년이 넘는다. 간헐적인 전투, 사소한 분쟁을 제외시키더라도 이러한 수치는
대단한 것이으며, 그야말로 줄기차게 전쟁에 임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으로서...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원전 6 C Urbs Roma는 당시 문명의 중심을 이루던 Greece-
People 들에게 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던 보잘것 없는 세력이었다. 그러던 것이 기원전 3 C 무렵
Italian Peninsula를 평정하고, 점차로 서-지중해에서 동방으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그 순간부터 역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어지는
200년 사이 Urbs Roma는 제정(원수정)이라는 독자적인 정치 지배체계를 확립하고
Hellenism 세계 뿐만 아니라 서-유럽 대부분 지역을 포함한 Roman Empire를 수립하였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Alexandros의 후계국이라고 할 수 있는 지위의 거대 국가의
탄생이 이루어진 것으로 Hellenism 세계의 영토적 범위를 넘어서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며,
그 족적을 커다랗게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온전한
"국가 형성의 틀" 내에서 생성된 Christianity가 훗날 정치적인 지배 구조에 녹아 들어 유럽 문명의
기본적인 성격을 결정하는 하나의 사회적 System으로 작동되었다는 사실로서
"중세→근대"를 거치며, 생성된 대부분의 도시 탄생의 기원이 역사 속에서 Urbs Roma에
기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근거로 자리잡게 되었다. 더불어 Christianity는 광대한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는 문명의 숙주로서 문화와 제도는 물론이고, Roman Empire이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그 역할에 충실하였다. 그렇다면 당대 !! 보잘 것 없던 Italian Peninsula의 한
귀퉁이 틈새에서 성장한 Urbs Roma가 어떻게 해서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고,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일단 기원전 2 C 쯤 되면 Italian Peninsula의 통일이라는...
하나의 마침표를 찍게 되는데 Urbs Roma는 대략 기원전 3 C부터 반도 최강국 입장에서 동맹국
들의 안전을 확보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 했을 것이며, 그것은 아마도 영토의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고 유지하려는 행위에 앞서 선행된 것으로 방위적 형태의 동맹체를 위한 "국가의 틀"을
완고하게 가져가려 했던 정책의 일환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시기 무엇보다도 Urbs Roma의 경제적
상황은 위기에 직면해 있었으며,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우선
Hannibal Barcr와의 전쟁의 결과이면서 저주이기도 한 자본, 토지, 노예, 시장의
유동성 문제로서 소위 노예들의 노동력에 의한 Latifundium(라티푼티움) 경영으로
인하여 새롭게 부각된 문제들 그러니까 토지와 관련된 채무관계 그리고 빈곤과
조세 및 장기간의 군복무(전쟁)에 시달려 온 평민들의 인구감소 추세가 근본적으로
사회의 불안감을 형성하면서 일차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정치적 두통거리가 되었고, 몰락한
소작농들의 도시로의 이주 현상으로 경제적으로 과부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기원전 146년만 해도 꿈 같은 일로서 당시에는 제법 규모 있는 토목 공사가
진행되던 시기로 호-경기는 아니라도 최소한 경제적으로 대규모로 유입된 인구를 국가
차원에서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는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기원전 130년 대에
이르러 대, 소규모의 전쟁을 치루면서 손실이 누적되자 심각한 경제적 위기가 찾아왔다. 더구나
정복활동이 답보상태에 놓이며, 정치, 사회 불안, 과잉 인구로 인하여
곡물 부족 사태로 가격 폭등이라는 최악의 예기치 않았던 사태가 발생하였다.
또한 자연 재해가 찾아들어 흉작이 지속되면서 국가의 비상 대권이 필요할 정도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바로 이러한 시점이 기원전 390년 호전적이었던 Gallia People
들의 침입 이 후 찾아온 또 하나의 위기 상황으로 전쟁을 수행하면서 발생한 일이었기에
Urbs Roma의 혼란 상황은 그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전쟁에도 승리해야 했지만 경제적 난국을 돌파해야 할 중차대 한 문제는 점차로 해소되어
가는데 먼저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오기 시작하였고, 곡물 수급 불균형으로 인한 문제도
전쟁에서 승기를 잡아가면서 회복되기 시작하게 되며, Carthago의 몰락으로 속주들이 건설
되고, 주요 곡창지대 까지 확보되면서 위기를 타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이
왜 !! 찾아온 것일까 !! 그 이유는 Urbs Roma 곡물 수급 정책에 있었다. 당대...Urbs Roma의
주요 곡물 공급지는 3 곳(Sicilia, Sardegna, North-Africa)이었는데
만약 하나라도 곡물 수급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이처럼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었던 구조적 문제가 성립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태는 Hannibal Barcr의
반도 침공으로 "캄파니아 지역(Neapolis-Capua)" 의 일부 동맹시 들의 배신과
Sicilia에서의 노예들의 반란이 결정적으로 작동되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기가
개혁 세력이 전면에 등장하던 때(기원전 134)이고, "농지 정책과 곡물 정책" 등이
이 후 Roman Republic의 핵심적인 정책으로 떠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혁 세력은
농지 분배 = 농지 개혁을 추진하며, 항구적으로 Urbs Roma의 곡물 부족 문제를 해결
하고자 했고, Tiberius-Gaius Gracchus 형제는 출세가 보장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포기하고, 개혁에 올-인 하게 되었는데 Tiberius의 경우 원거리 분배에 이용할
토지가 많았음에도 굳이 시민들을 Land Nearer Rome에 정착 시키고자 했다. 그렇지만 그곳에
시민(평민-소작농)들을 정착 시키는 것은 토지 귀족들의
Latifundium의 몰수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의
죽음이 앞당겨진 것이라고 확인된다. 반면 Gaius의 Lex Frumentaris-
Sempronis(곡물법)는 Roma People들에 대한 곡물 공급을 규정하고 있었는데
Urbs Roma에서는 물론 !! 서양사회에서 최초의 곡물 배급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또한 이것은 귀족, 평민을 망라한 모든 시민들에게 혜택을 주기위한
뜻도 포함하고 있었으며, 어찌되었든지 상당 기간 지속되었던 혼란은
기원전 121-기원전 120년이면 종말을 고하게 된다. →유증된 동방의 왕의 재산의 일부 활용 !!



애당초 초기 건국 당시 부터 Urbs Roma의 역사는 합법적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전쟁이 지속적으로 발생되었고, 그것은 Roman Empire의 성립 시기까지
커다란 변화없이 벌어지던 국가운영의 목적이면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 Urbs Roma는 끝없이 싸우고 투쟁해야 했을까 ? 만약 "로마 인"이 정당한
전쟁 만을 수행하였다면 어쩌면 이렇게 끊임없이 싸우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선 그들의 가치관 속에서 "군사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정도 이상이었고, 특정
지배 세력 집단에서 보다 중요하게 인식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예컨대 Laudatio
(라우다티오, 칭찬), 혹은 Dignitas(디그니타스, 영예)라는 언어는 온전히 군사적 영역에
속한 것이었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가족이라는 단어가 많은 것에서 보듯이
"부계와 모계"를 확실히 구분 하는 것 만큼 군사적 측면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된다는
사실은 그 자질이 뛰어난 인물을 의미 했다. 또한 이러한 자질은 그들의 사회적 출세에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었으나, 지배 계층은 나름대로 치열한 경쟁 사회에 놓여져 어느 시점부터
명문가에 태아난 것만으로는 사회적 출세가 약속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Urbs Roma의 지도자 계층이라고 함은 재무관에 취임하는 것을 첫 단계로 호민관 →
감찰관 → 법무관 → 집정관으로 이어지는 승진 단계를 거친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출세 길이었고, 꿈의 길이라고 불려지던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Urbs Roma의 대외적
팽창 시기 집정관은 2 명이었으므로 누구나 이러한 꿈의 길을 성공적으로 밟게되는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로서 이러한 관직(행정관)에 오르려 한다면
"선거"에서 반드시 승리 해야만 했다. 또한 가장 핵심적이었던 것은 자신에게 뛰어난
자질이 있음을 Urbs Roma의 시민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던 것이며, 군사적 역량을 뜻했다.
또한 집정관의 가장 중요한 직무 증 하나가 무엇보다도 군단의 사령관을 의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고, 그러한 기회의 장이 되었던 곳은 피튀기는 전쟁터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전쟁이 없다는 점은 자신의 능력을 내보일 수 없었다는 사실과 같은 선상에 있었다.
더구나 Urbs Roma의 제도는 그들에게 절실한 문제를 노출시켰는데
먼저 그들의 임기가 1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며, 중임은 불가능 하였기에
관직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10 년이라는 공백 기(空白期)를 주사위 놀이를 하며 보내야
했다. 그러므로 군사적 활약에 의해 명성을 쌓을 시간에는 한계가 있었고, 특별히
집정관 같은 군사 작전권과 명령권을 가진 관직(행정관)의 경우 "개선식 거행의 권리"가
있는 만큼 심리적 압박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따라서 인정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전쟁을 수행했으며, 애초부터 이들은 평화적 계약관계가 아니라면
오히려 국익과 자신의 경력 관리를 위해서 망설임없이 군사적 행위 !! 전쟁을 감행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례들이 가감없이 증명된 것이 기원전 5 C 까지
주변의 족속들과 치룬 전쟁의 승리로 이어진 빈번했던 개선 식 행진이었다.
또한 Republic...으로 이행되며, 평민과 귀족의 신분 투쟁에서도 그 점을
엿볼 수 있는데 대외 전쟁에서 평민은 군사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계층(군사력
유지 목적 / 보병 단위)이었다. 즉 !! 귀족이 평민들에게 양보할 수 있었던
것이 있었다는 사실은 Urbs Roma의 군제를 통해서도 명확하게 확인 된다. 그러한
사정에 의해 토지귀족들은 평민들은 철저히 탄압하는 것이 어렵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혜택 받은 계층으로 불리는 돈 많은 평민의 탄생을 양산시키게 된다.
반면 평민들도 극단적으로 저항하여 귀족들의 "권위" 를 무시하면 공격의 빌미로서 제공
될 수 있었던 여건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사회적 붕괴로 연결될 수도 이었던 위험
요소가 있어 사회 구조를 혁신하려는 다소 과격한 투쟁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자제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평민의 입장에서도 군사적 요소가 지도자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던 것이고, 이렇게 해서 지배 계층의 강군 일변도의 정치적 가치를
성립시킨 사회적 환경이 매우 중요하게 확인되는 되는 셈이다. 물론 !! 여기에 더해서
전쟁의 승자가 가져오는 "부"에 대한 기대와 영토적 개념의 "토지 획득"이 성립되었기에...
무엇보다도 귀족이나 평민이나 할 것없이 귀중하게 여겼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설명되었듯이 전쟁은 전리품을 비롯해서
막대한 "부"를 Urbs Roma에 가져 왔다. 그렇지만 전쟁의 승리 = 패전국
이라는 공식에서 경제적 착취가 선행되었던 시기는 지중해의 패권이
성립된 이 후의 일이었다. 또한 경제적 이익에 따라 대외적인 문제에도 개입
되어진 시점이 바로 이때이기도 하다. 그것은 초기 Roman Republic
사회의 형성기의 경험과 해외 진출 이 후 많은 노예가 Italian Peninsula에 유입
되면서 형성된 경제 구조의 변화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신분 투쟁의 원인으로서 평민
들의 경제적 비참함이 있었던 것은 그 해소 방식과 전쟁이 크게 연관되어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Urbs Roma는 기원전 4 C 초기 Etruria People의 도시 Veium =
Veio를 점유하면서 최초의 공유지가 확보된 후 귀족들은 평민들의 문제(토지) 해결 방식에
있어서 자신들의 영지를 나누기 보다 정복을 통해 얻어진 영토를 기반으로 공유지를 몰수하여
그곳에 Urbs Roma 시민이나 Latin League의 반-시민권을 확보한 시민들을 정착시켰던 셈이다.
즉 !! 전쟁에 참여한 병사(평민)가 퇴역병이 되면 아예 그곳에 정착시키는
방식으로 유도(이주)되었다고 이해 해도 무방하다. 예컨대 "마리우스의 노새"
들을 → Gallia Cisalpina 지역에 한정해서 정복과 함께 확보된 공유지를 퇴역
병에게 분배하며, 이주를 장려 했던 정책이 갖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만 않다. 그리고
전쟁 포로들을 노예화 하면서 어느 정도 까지의 사회적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인데, "채무 시민을 노예 신분"으로 낮추어 매각되는 사례를 방지할 수 있었던 것 효과도
거둘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전쟁에 의한 승리는 궁극적으로
경제적 이익과 함께 Urbs Roma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불평등 요소까지 해소시키는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된다. 다시 말해 귀족과 평민이 Win-Win 하고자 했던 정책적 수단의 꼭지점에서
최우선 고려 대상이 되었던 것은 당연하지만 전쟁이었고,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Urbs Roma가
팽창하며, "제국주의화" 되어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준 셈이었다. → 멈출 수 없었는 전쟁과 시민권 배급


한편 이미 경제 구조에서 중요한 윤활유적인 요소가 되어버린 "노예"의 확보에도
절대적으로 작용된 것이 전쟁이었다. 따라서 이쯤되면 도저히 질 수 없었던 전쟁을 수행
해야 했던 것이 귀족(지배 계층)이었고,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위대한 Gens를 통해
인재들이 배출되며, 사람과 사람 간의 경쟁에서 구조적으로 집합과 집합과의 대결이 전개
되었서 이 후 모든 것을 묶어 권력 투쟁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눈에 띄는
사실은 훗날 노예와 노예의 전쟁도 성립되는 시기로 접어든다. 이제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노예는 거의 필수적인 존재로서 위치를 다져 나가며, 어찌되었든지 이러한 문제는 Urbs Roma
사회의 특성이라는 점에서 인식하고 있었어야할 중요한 사안이라고 보여지며, 마지막으로
Urbs Roma가 전쟁을 필요로 했던 상황은 그들의 동맹관계, 대외적 지배의 전개 과정에도 있었다.
일단 그들은 패배시킨 상대에 대해 지배적인 정책을 취하는 일이 없었다.
즉 !! 군사적 동맹국으로 대우하는 것으로서 영토의 일부가 공유지로 접수되고,
공납을 의무화 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의무적으로 이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Urbs Roma가 전쟁을 수행할 때 "보조적인 군단"을 지원해 주는 일이었다. 따라서
당시 군사적 Network의 핵심을 이해할 때 경제적 착취보다는 지휘관을 "로마 인"으로
하였던 관계를 말하며, 이러한 사실은 온전히 전쟁터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던
지배적이며 우월적인 원리로서 정교하게 발전시켜 갔다. 다시말해 만약 !! 전쟁이
없다면 어쩌면 서로의 관계가 불확실해져 누가 주도적인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가를 구분
할 수 없을 정도의 혼란 상황을 상정할 수도 있을 듯 싶은데 전쟁은 권력의 중심에서
필수적인 도구로서 작동되었던 것이다. 반면 정복 지의 지도자들도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Urbs Roma 권력 내부에 설정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인식시켜 주었던 방식도
전쟁이었다. 따라서 반란은 있을 수 있었지만 이미 정복한 지역이 직접적으로 Urbs Roma에
압력으로 작용 되어진 것은 아니다. 참고로 Urbs Roma는 선전포고 시...적국과의
경계에서 Fetiales(페티알리스)라고 하는 사제가 선전 포고를 하는 규정을 준수하고,
Jupiter 신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말해야 할 때만 "Bellum Justum(정당한 전쟁) "
으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로마 인" 들이 전쟁을 맹종하는 성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구실(명분)이 필요했을 것이며, 기본적으로 Urbs Roma는 전쟁을 시작함에 있어서
종교적인 절차를 거쳐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리고 개전의 이유가 정당하지 안다면 그것이
Urbs Roma의 이익에 해당되는 전쟁이라고 해도 신의 가호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Urbs Roma 입장에서 살펴보면 그들이 수행한
전쟁은 모두 정당한 전쟁의 범주 안에 포함되어진다는 점도 기억해두자 !!
무엇보다도 전쟁의 기회가 많이 주어졌던 것은 이미 정복되었거나 로마의 영향력
하에 있던 수많은 약소국들의 정치적 요구에 의해서인데 당시 !! 세계는 Urbs-
Roma에게는 언제나 기회의 땅이 되었던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최강 대국이 되어버린
Urbs Roma의 국제 관계는 근대 이 후의 국제 관계와 엄격하게 구분해 다른
것이었다. 유럽에서 각국이 제각기 국가의 주권을 존중해 국제 관계를 전개하게 된
시기는 30 년 전쟁 이 후 17 C Peace of Westfalen(베스트 팔렌 조약) 이 후 부터이다.
그러므로 그 이전 상대국 주권을 존중하여 외교가 전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대
상황을 이해하는데 위험적 요소를 갖고 있다. "로마 인"들의 자치와 자유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점이 우선 시 되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Dignitas(위엄) 있는자에게
주어진 Auctoritas(권위)로서 명령하는 것은 상대가 누구이든지 문제 있는 행위로 전혀 생각
되지 않고, 상식적으로 평등, 대등과 같은 감각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로마 인"들은
자신들에게 권위가 있다면 그곳이 세력 범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필요하다면 개입하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제 3국의 자치를 침해(주권)하고 있다고는 전해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바로 이러한 관점이 상대적으로 주요 세력들에게는 하나의 알력으로 작동되었고,
곧 !! 개전에 이르는 이유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 반란에 대한 응징(로마의 권위) 위상 회복과 연결
결과적으로서 Urbs Roma에는 애초 국가 성립 초기부터 전쟁을 원하는
고도로 군사적인 사회 구조와 전쟁을 불가피하게 연결시켰던 경제 구조가 작동
되었고,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전쟁을
아무리 수행한다고 해도 승리 하지 못한다면 말짱 꽝...아닌가 !! 이러한 점에서
패전의 기록보다 승리의 기록이 우월했던 Urbs Roma의 역사 속에는 언제나 전략과
전술이 뛰어난 군대가 있었고, 거대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었다. 인재 수급... 이것은
이미 Latium 동맹이 이뤄지고, 하나의 조약이 청동 서판에 새겨졌다는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기원전 3 C-기원전 2 C의 영토와 영향력은 모두 제국의 형성
길목에서 확실한 위치를 점유한 국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이면에는
(평민 = 소작농)이 주축이된 군사력이 위치 한다는 점이다. 강조 하지만 이것은 귀족과
평민 간의 권력 투쟁의 정점에 이르러서도 변함없이 추구되었던 그들의 가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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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집정관에 오른
인물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이외는 요람에서부터 이미
집정관으로 만들어진 사회이기도 했다. → Marcus Tullius Cicero
귀족은 혈통이 아니라 업적에 따라 불후의 존재가 된다. 귀족의
생활은 격렬하게 힘든 시련의 연속이었고, 고위 행정직에 오르지 못하거나
원로원의 의원직 마저 상실한다면 귀족의 후광은 덧없는 것이 된다. → Arrivis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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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54년 의 영웅 !! Tiberius Sempronius Gracchus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사체는...Triumphator(트리움파토르) 개선 장군의 의복에
싸여 Forum Romanorum(포룸 로마눔)에 운구 되었고, "은빛 별"이 새겨진 Royal-
Color Toga가 입혀진 채로... 옆에는 그의 경력에 어울리는 관직의 상징인
막대기와 도끼가 놓여 있었다. 뒤를 따르는 귀족들은 존경의 표시로 수염을 깎지
않았으며, 검은 옷을 입고, 머리에는 "베일" 을 둘렀다. 여성들은 슬픔에 잠겨
가슴을 두드리며...헝클어진 머리를 쥐어 뜯고,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었는데 직업적으로
곡을 하는 사람 들과 무희, 과장된 몸짓으로 죽은 이를 흉내내는 연기자도 있었다.
또한... 행렬에서 걸어가는 많은 남성들의 차림에서 가장 무섭게 보였던 것은 그들이 쓴
"장례 가면"이었다. 그것은 Large-Gracchus와 선조 들의 모습을 섬뜩할 정도로
닮게 만든 밀랍 가면이었으며, 이렇게 해서 Roman Republic의 부자와 평민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가면을 쓴 남성 들은 Forum의 연단 위에 모셔져 있는 사자(死者)와 놀랄 만큼
닮은 일종의 "가족 유사성을 표현" 하게된다. 가문의 조상을 대표하는 이들이 연단 위의
"상아 의자"에 앉자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사자(死者)가 생전에 이룩한 업적을 기리는 연설이
시작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영광으로 뒤덮은 온갖 업적에도 불구하고, Large-Gracchus는
개인적인 성공을 추구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의 장례식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 가지 덕성을 공적으로 찬양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Roma People 들은 그를 개인적인
야심보다 Roman Republic에 대한 봉사를 앞세웠던 사람으로 여기고 싶어 했다. 따라서 장례
연설은 "밀랍 가면"과 동일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상기시켰다.
"용감한 사람의 영광스런 기억은 계속
새로워진다. 고귀한 행위를 한 사람의 명성은 결코
죽지 않는다. 국가에 훌륭한 봉사를 행한 사람의 명성은
누구에게나 알려지고, 후손들에 남겨지는 유산의 일부가 된다."
당연하지만 장례식에는 그의 후손들이기도 한 아들이 있었고,
그와 혈연으로 묶인 가족이 있었다."아버지"가 Roman Republic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이룬 성공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한 동기부여
(動機附與)의 자리이기도 했다. 공식적인 장례 절차가 끝나며 사자(死者)는
화장되었다. 이것으로서 당시 아홉 살 난 사자(死者)의 아들은 "아버지" 와
같은 비슷한 조사(弔死)를 얻기 위해 고난과 죽음까지도 감내하리라는 욕구가 서서히
차 올랐을 것이다. 이제 그는 "아버지"의 이름과 영광을 지켜나갈 책임을 지게
되었다. 또한 그 책임의 무게를 능가하는 것은 오직 또 하나의 가문, 즉 !!
그의 "어머니"이기도 한 "코르넬리아"의 가문의 특권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책임 외에는 없었으며, 그들이 항상 그랬듯이 장례식이 끝나게 되면서 Large-Gracchus의
"분골"과 그의 선조들의 밀랍 가면은 가문의 저택에 안치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양쪽을 통해 Small-Gracchus는 가장 위대한 3 개의
Gens !! 귀족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150년이 못미치는 기간 동안 이러한
3 개의 가문은 서로 힘을 합쳐 Roman Republic의 위치가 Italian Peninsula →
Mare Nosrtum(우리의 바다) 전역의 패자로 바귀는 과정을 주도 했으며, Large-
Gracchus의 장례식이 진행될 무렵 "로마 인"들은 지중해는 물론이고,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내륙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례식에서의 소년은 그의 부친과
같은 성대한 장례식을 갖지 못한다. 그 후로부터 22년 뒤 그의 시체는 토막난 채
Tiber River에 던져졌다. 그를 살해한 자들은 "적"이 아니라 장례식에서 보았던 원로원
의원들이었다. Gracchus의 짧고 논란이 많은 생애가 Roman Republic의 역사에
결정적 전환점 즉 !! "위기와 교차" 했던것은 결과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달성한 혜택을
누릴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 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부의 분배 결정의 시기"에
직면하여 부유층(귀족) 혹은 빈민층(평민) 들이 신분 투쟁을 넘어 권력 투쟁에 근접하였고, 당대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좀더 많은 "부와 권력" 획득에 집중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Roman Republic 패권을 장악하는 순간, 초-강대국으로 만들어준 가치들을 포기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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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도시"는 인간이 최대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을 의미하였고,
Civitas(시비타스)를 가진다는 것은 문명화되었다는 사실을 뜻하였으나 지중해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한 통일을 구축한 Roma People 들은 "적"들에게 그러 했듯이...
시민 들에게도 냉혹하였다. 정복 전쟁을 통해서 평민들이 피를 흘리며 가꾼 황금
열매는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소수 귀족(= New Nobiles, 노빌레스)들에게 집중되었는데
"정복과 속주"의 경영에서 획득한 경제적 기회(이윤추구)를 최대한 활용한 System이
사회적 불균형을 낳았다. 신비스런 존재감으로 생명력을 얻은 신전처럼 도시의 바탕은...
공동체 적 삶에 의존되어야 했으나 현실 속에서의 상황은 냉정하기만 했다. 점차로
상류층의 군중에 대한 비웃움은 노골화 되어 갔으며, 대체로 그 대상은 궁핍으로 인해
낙오한 시민 = 씻기지 않은 대중이라는 뜻의 Plebs Sordida(플레브스 소르디다)들에게 집중
되었다. 더구나 "노예 노동"을 통한 Latifundium(라티푼디움)으로 귀족들은 정복의 결실로
얻어진 "토지"를 독점하게 된 효과를 누리게 되면서 사회 전체는 불평등한 "부와 권력"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며, 취약해져 갔는데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게 된 곳이 있다면 Italian Peninsula
통일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Legion(로마 군단)"이었다. Urbs Roma의 계급과
신분의 구분은 사실 도시의 건설과 기원에서도 뿌리 박혀 있었다. Urbs Roma "일곱언덕"은
외부에서 들어온 자 들의 결국 자리잡게 되는 상륙 항구이었고, 서로 간에
본능적으로 이끌려 혼란을 공유하는 구역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Urbs Roma
에서는"중산계층"과 같은 존재는 찾아 볼 수 없었는데 일곱 언덕 중 하나는
가장 배타적인 곳이며, 부유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Insulae(인술라)라고 불리는 무허가 밀집 건물 들이 들어서
삶에 도전적인 사람들이 살아 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Palatinus
언덕의 경우 승자를 위한 곳으로서 존재 가치가 뚜렸했으며, Aventinus 언덕은 패배자를
위한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Roman Republic ↔ New Nobiles들과 대외
팽창에서 이익을 나누어 가졌고, 일부 혜택받은 평민들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귀족
들과는 달리"토지 소유"보다는 정복의 부산물로써 귀족들이 신분 상 손댈 수 없었던
해상무역, 군납, 군대의 수송, 토목공사, 속주에서의 징세 청부 등을 독차지하여 재력가로
성장하게 된다. 또한 훗날 "서구 자본주의의 원형으로서 징세 청부업(금융업)"은
그들에게 가장 커다란 수익원이 되어주었으며, 이들을 통칭하여 Equites(에퀴테스)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돈이 가장 많이 드는 "기병 부대"에 복무 할 수 있는 자격 즉 !! 금전적 능력
(신흥 부호)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 값비싼 장비를 자비로 마련할 수 있었던 그들은
일반적으로 귀족(중세 = 영주 + 기사)과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고위 관료
혹은 원로원으로 진출할 수도 있었으나 인적 구성이나 경제적 이해관계를 고려할 때
지배 계급과는 확연하게 다른 이종 집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평민들은
정복으로 국가의 영토가 증가 될수록 경제 구조가 "소비중심 사회로 형성" 되면서 오히려
가난해졌으며, 당대 Urbs Roma 사회는 "사치와 방종"이 지배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로 변모되어 있었다. 따라서 빈부의 차이는 과거보다 확대되었고, 공화정 특유의
전통적인 봉사와 헌신은 사라지고, 풍요로운 향락적 가치를 맹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Marcus Porcius Cato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원로원의 "공화주의적 토지 귀족"
들을 중심으로 "선(善)"을 회복함과 동시에 과거의 모습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잠시나마
포착된다. 그렇지만 이들은 실제로 신흥부유층을 통렬하게 비난하며, 자신의 농장에서
중-노동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생활을 제시 하였으나 애당초 "노예제도"를 옹호하고, Stoa
학파의 금욕적인 철학을 비난하는 내재적인 모순 때문에 어떠한 성과도 가져오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Punic War 말기 대략 기원전 146부터기원전 30년 까지의 기간은
Italian Peninsula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기원전 133을 기준으로 귀족과 평민 간의 계급 투쟁, 권력다툼, 암살, 반란 그리고
전쟁 등은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이러한 시대 그러니까 보편적인 상황
인식을 가능하도록 돕고 있던 시기 사회적 위기를 절감한 귀족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Greece Type의 "자유와 평화"를 표명하면서 나타난 평민의 지도자(호민관)이기도
했고, 이들은 평민은 물론이고, 진보적 성향의 일부 영향력 있는 원로원 의원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있었다. 또한 사회의 병폐는 "중소 자영농민층"의 몰락 때문이라고 확신하며, 개혁
성향의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시기적으로 동방의 "뜨거운 감자"이면서
부유한 속주들을 거느린 도시 Pergamon(페르가몬)이 기원전 133에 Roman에 유증(遺贈)
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된다. 또한 Roma People 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를 손에 쥐게
되었고, 동시에 비운의 Gracchus(그라쿠스) 형제들에 의해 때이른 개혁이 진행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국가적 재산의 처리 여부를 앞두며, 행복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한 번에 입안에 넣어 나눠 먹기에는 떡이 컸던 셈이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민중의 지도자로
호민관에 선출된 Tiberius Sempronius Gracchus가 그 많은 국가재산을 개혁
비용으로 사용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며, 아마도 이러한 시기부터 그나마 유지되었던
귀족과 평민의 느슨했던 결속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유 농민"이 몰락한다는 사실은 단순히 농업 생산량이 줄어든다는 개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군사력이었다. 다시 말해 !! 아무리 유능한 "장군과
기사 (기병)"들이 있다고 해도 평민들로 이뤄진 병사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더구나
"Roman Legion(로마 군단)"의 기본전술은 병력에 의존하는 군단 단위의 System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Roman Republic을 위대하게 이끌었으며, 토지(땅)로 부터...
뿌리를 찾았던 투박한 손을 가진 사람(평민)들을 살리지 않느다면 미래는 없다고, 단정하게
된 것이고, 기원전 133년에 호민관에 선출된 Tiberius Grachus(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이러한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개혁의 선례를 찾아 본 듯하다. 따라서 Tiberius는 Pericles(페리클래스)의



민주적 개혁 정신을 바탕으로 기원전 367-366 통과된 Lex Licinia-Sextia 법을
부활시켜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는 방법을 구사하기에 이른다. 즉 !! 기본적으로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공유지를 분배 하려는 의도를 포함하는 것으로 법률에
의해 정해진 초과 분은 정부가 몰수하며, 소규모로 분할하여 빈곤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는
의도가 배경에 깔려 있었던 것(토지 상한선-1000 유게라 농지 분배 위원회를 구성-30
유게라 씩 토지를 추첨분배 방식)이었다. 어찌되었든지 이러한 혁신적 치유 책은 보수적인 계층
(귀족)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비-합법적인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수반하는
것으로 마침내 보수계층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에 의해 좌절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희망은 9년 후 쯤에 비참한 최후를 당했던 형을 대신한 Gaius(가이우스)에 의해 새롭게 기획
되어 민중의 몫"을 찾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애초부터 분위기가 좋았다. 먼저
Pergamon(페르가몬)으로부터 곱게 유증(遺贈) 된 엄청난 국가 재산이 Gaius시기 일부나마
민중의 몫으로 활용가능해졌다는 의미인데 형만한 아우 없다고 하지만 Gaius는 한술 더 떠서...
Tiberius를 죽인 원로원 의원들이 살려 놓은 Lex Sempronia Agraria(농지법)에 더해서 사회
개혁을 더욱 확대하여 강력하게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함께...
좀 더 조직적인 개혁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재판을 거치지 않고 "로마 시민"을 처벌
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법률과 민회에서 해임된 행정관은 다시는 공직을 맡을 수 없다는 법률적 규정은
다분히 Tiberius의 죽음과 관련 있는 인물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당시 !! Roman Republic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곡물"을 거의 수입에 의존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국가 재정의 고갈을 염려
했던 원로원 의원들과 달리 재정은 건실하였다. 그 이유는 Anatolia(= Pergamon)의 속주에서 막대한
세금을 징수해 국고에 채웠기 때문으로 이를 위해 Gaius는 입찰을 통해 선정한
Publicanus(= 푸플리카누스, 에퀴테스의 민간 조합)에게 속주의 세금 징수를 일임시키고,
징수된 세금의 1 할을 내주는 법안을 발의하여 법제화 했다. 이른바 Tax Farming(징수도급)
이라고 불리던 이러한 제도는 공화정이 끝날 때 까지 존속시키는 한편 "에퀴테스"가
주축이 된 이러한 조합은 원로원의 가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법규와 함께 제정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호민관에 입후보하지 않았던 Gaius가 시민들의 자발적 지지로서 재선
(기원전 123 →기원전 122)할 수 있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사실에 고무되어 Gaius는 그 어떤
조절없이 사회의 소외계층을 위해 다양한 법을 제정했다. 한편으로 Gaius는 곡물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거대한 곡물 저장소를 Tiber River 유역에 세우며, 빈민자들을 위해 곡물을 저렴한하게
판매하고, 무산시민을 새로운 식민지에 이주를 유도하였으며, 시민들을 속주에서 착취하는
총독들을 재판할 수 있도록 배심원에 포함시키는 혁신을 단행하였고, 동맹국 시민들에게도 Roman-
Republic의 시민권을 부여할 것을 제안 하였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갈 때까지 간것 아닌가 싶다.
이처럼 Gaius Gracchus의 급진적이며 단세포적인 정책은 평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반면에 시간이 갈수록 원로원의 불만은 높아져만 갔으며, 졸도하기 일보 직전에 이르렀던 것이다. 결국
Gaius는 보수계층의 제거 대상 명부에 올라 꼿곳한 원로원 의원들의 저주를 받기에
이르렀으며, 꼭두각시 호민관을 내세워 각종의 방해공작과 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 이간질
술책 등의 비열한 방식이 동원되었고, 마침내 Carthago 식민시의 "농지 분배 문제"와
공공시설 건설지를 결정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Gaius 제거 작업을착수하였다.
과정은 정교하게 진행되었으며, 먼저 Senatus Consultum Ultimum(세나투스 콘술툼 울티뭄)을
발동 하여 집정관을 통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게 하였는데 비-공식적으로 집정관이 어떤
조치를 취하더라도 원로원이 승인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개혁세력들은
졸지에 모두 제거되었고, Gaius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불명확하지만 Gaius Gracchus는
자신의 개혁정책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개혁의 실패"가 법 체계를
초월하여 팽창하고 있었던 공화정의 위기를 가속화 시켰다는 사실로서 민회의 권력이 확대 되던 시점
에서도 귀족들은 사회적 불화의 원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으며, 억압과 기존의 체제 유지 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대략 이러한 시기 Urbs Roma의 정치적 구조는
끝없는 귀족과 평민의 대치 상황으로 몰렸고, 충돌을 피하면서 평화적으로 대응하는 대신에 서로
간에 세력 확장을 꾀 하게 되었다. 단순하게 접근하자면 이제는 당파(Optimates, 옵티맡테스-벌족파 /
Populares, 포풀라레스)-평민파 양분된 구조)를 결성하여 치열한 신분투쟁을 넘어 권력 투쟁이
전개 되었다는... 사실로서 Roman Republic는 이제부터 군사력을 통해 적대적 권한을 추구 할 수
있는 선례를 만들게 된다. Tiberius Grachus가 예견한 대로 개혁의 실패는 군사력의 쇠퇴로 이어진다.


Roma People는 지중해를 정복하였으나 당대의 기반은 견고하다고
볼 수 없었다. 더구나 Gallia(켈트) & Germania(킴브리인과 튜턴인) 지역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Roma People 들은 벌족파와 민중=평민파으로
나뉘어 당쟁이 심화 되고, 혼란속에 빠져 들어 내란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기회를 틈타서 무능한 원로원을 배제하며, 지배자로 우뚝 솟은 인물은 민중의 장군
이기도 한 Marius(마리우스)이었다. 그는 Numidia의 반란을 진압한 후 국민적 명성을
얻었으며, "자유 농민의 몰락"으로 약화된 "로마 군단"를 개편하여 정복 국가
Roman Republic의 명성도 회복하고자 했으며, 당시 !! 이러한 움직임은 긍정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기원전 2 C 개혁에 성공하지 못한 사실이 결국 화근 덩어리가
되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Roma People 들은 기원전 1 C에 이르면 동맹 시들의
반란과 함께 북방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양대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하지만 내부적인 취약성이 드러나며 Roman Republic은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곤두박질 치게 되었다. 당시 위기로 보여진 일련의 사건은 오래 전부터
불만을 삭이고 있던 산악지대 족속들이 무장을 갖추고, 신속한 기동력을 발휘하여
그들의 선조가 그랬던 것 처럼 평원을 휩쓸며, "캄파니아 지역"을 압박해 들어간 사건이
그 하나이고, "한니발" 이래 최대의 강적 Pontus(= Mithridates)가 공공연하게 선전
포고에 나선 것이 두 번째 사건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Roma People 들 입장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Anatolia→Black Sea 연안에서 도발한 "전제 주의"
국가 Pontus의 경우 무적의 "로마 군단"을 앞세워 무찔러 버리면 그만이었으나 Italian-
Peninsula 내부의 혼란 상황은 위협적이었고,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여기서 "사비니 여인의 강탈"
사건을 따로 언급 하지 않더라도 이로인한 Roma People VS Sabini Pwople
간의 전쟁을 기억할 필요가 있으며, "사비니 여성"들이 아버지와 남편들 사이에서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살자고 호소했던 순간...그러한 호소가 받아 들여져 종국에는
함께 일곱 언덕에 정착하게 되었던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들을 담아내고, 있으며 아름다운
이야기로서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일찍이 고대 사회를
통털어Civitas(시비타스) 문제에서 "로마" 만큼 관대한 도시는 사실 없었다. 더불어 도시의
진정성에 있어서도 일곱언덕에는 언제나 다양한 과거가 공존되었는데 나름대로 사연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 Urbs Roma의 가치와 신념을 공유하면서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들이 선택하 수 있었던 최선의 방식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로마 인"으로 인정 받고 살아 간다는 사실감이 전달해 주는 상징성 보다
어느 시기부터 이들이 성립시킨 도시와 그 배경 속에는 "경멸"이라는 단어가 잠복하기 시작
되었던 것 같다. 기원전 1 C Italian Peninsula 전역을 자치 자치 도시화 시키려 한다거나 끊임...
없었던 과격시위, 살인 그리고 비-시민을 추방한다는 법령이 통과된 순간 소외된 계층으로
분류되었던 족속들이 Samnium People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폭력 사례는 반란의 형태로 진화
되어 급속한 속도로 진행되었고, Clam & Oyster만 보면 정신을 못차리는 Roma People들의
Balneae Pensiles(공중 목욕탕)시설을 갖춘 저택들이 몰려 있던 Campania 지역을 급습하게 된 것
이다. 당시 !! 정복지(속국)에게 노획한 물품을 실은 배들이 Italian Peninsula를 향할 때 대개 Vesuvio
(베수비오)의 매끈한 뿔 형태의 모습을 보고, 방향을 잡았다고 하며, 선원들은 수평선을 살피면서
항해의 온갖 위험을 뚫고, 목적지(Napoli-Capua- Nola)에 도착하면 안전하게
돌아 올 수 있게 해준 신들에게 감사기도를 드렸다고도 한다. 고대 도시의 성벽 너머에는
Grape Vineyard & Olive Tree, 산, 바다, 들판이 있었으며, 대략 이러한 곳을 당대
Italian Peninsula의 보석이라고 칭하였다. 또한 그처럼 비옥하고 풍요스러웠으며 사치
스러웠던 곳이 통칭 Campania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처럼 호사스런 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저 산악지대에서 생긴대로 검소하게 살아가고 있던 족속들은 "비웃움의 대상"이
되었고 실제로 그러한 인식들은 그들이 쏟아놓는 정책과 맞물려 있었다. 오호∼통재로다... !!
Italy Latin People 들의 시민권에 대한 갈망과 자유와 평화에 대한 욕망은 상대적으로 깊은 사회적
갈등 구조를 작동시켰으며, 한때는 전쟁터에서 힘을 합쳐 적을 섬멸했던 관계가 이러한 반란
사건을 계기로 양자간에 검과 창을 겨누는 사태로 진전된 것이다. 산악 족속들의 반란이 진행되던
시기 Roman Republic 최고 군-통수권자는 Maius Marius(가이우스 마리우스)이었다. 또한
이러한 시점에 Roman Republic 내부에서는 심각한 권력 투쟁이 두 사람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이다.


물론 !! Social War의 발발로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기는 하였으나 Urbs Roma
시민들 입장 에서는 그야말로 천지개벽할 일이었고, Maius Marius !! 그는 군인으로서는
뛰어난 인물이었는지 모르나 정치력의 한계 시점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Roman Republic
역사에 치명적으로 다가섰다. 말하자면 Urbs Roma의 역사 속에서 자유와 평화라는
목표의식과 함께 완성도 높은 팽창의 역사를 써 내려 갈 즈음 투박한 손의 주인공들은 공화국의
이익과 그들만의 몫을 위해 자신의 "집과 토지(땅)"을 떠나 있어야 했다. 그런데 Roman-
Republic 확장되는 것과 비례하여 집과 토지(땅)를 떠나 있는 기간이 길어졌고, 이제는 기약없이
여러 해가 흘러가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재산(토지)은 타인에 의해 쉽게 상실될 수 밖에
없었으며, 사회적 무-질서가 대세로 자리잡게 된다. 즉 !!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들의 것을 쉽게
강점할 수 있었던 시대이기도 했고, 소규모 자작농(평민)들은 자신들의 경작하던 Grape Vineyard
대신에 광대한 농장이 들어서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훗날 "스파르타쿠스"가 행군하면서
지나간 곳들은 대체로 대규모의 경작지이었고, 그곳에는 노예 집단이 노동력을
착취 당하고 있었으며, 거의 무인지경 속의 도시를 벗어난 지역(시골)에는 자유민,
자영농, 목동이 사실상 사라진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거울 속의 야만이 판을 치며,
심각한 경제난과 채무 노예의 양산으로 사회적 혼란만이 가중 되던 시기에 바로 !!
이러한 현실의 불합리성을 치유하고자 뜻있는 개혁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동료 시민들에게 Roman Republic의 위대한 군사적 기반이 썩어 들어가고 있다고 경고
하였으며, 자영농이 상실되는 것은 바로 Roman Republic가 병사(군인) 하나를 잃는
것과 같다는 맥락에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점에 Roman Army의 개혁의 불가피
성이 강조 되는 시점에 이르렀는데 Maius Marius는 이러한 현실적 상황을 설혹 자신이
원치 않았던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수용해야 했다. "로마 군단"은 과거 무산 자들의 징집을
제외 시키기도 했으나 이제는 무산자, 유산자를 가리지 않고, 개방시켰고, 전투 장비는 국가가 제공
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군단은 직업적 병사들로 채워졌고, 이러한 순간부터 토지의 소유는 더...
이상의 징집 요건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보상이 되었다. 반면에 Gracchus 형제의 개혁
실패 이 후 "로마 인"들 사회에서 귀족들을 적대시 하는 다소 과격한 호민관 들이 연이어 등장하게
되었으며, 당시 인구는 크게 증가하여 곡물의 국내 생산량 만으로는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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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ing Point
Roman Republic의 속주에 대한 착취 구조는 일반적으로 동방은
세금이 주류를 이뤘고, 서방의 경우 광산 채굴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실용적인 만큼 냉정하기도 했던 세금 체계는 능동적으로 탐욕을 부추겼는데
동방의 군주국들처럼 속민들을 쥐어짜내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거대한
관료 집단이 없었기에 Republic(공화정 = 공화국)은 필요한 전문가를 선발
하여 활용했다. 또한 "징세 도급"이기도 한 "계약"이 공식적으로 경매에 붙여졌고,
그러한 징세권을 구매한 사람은 국가에 징수금 전액을 선지급 했어야 했다.
따라서 천문학적인 액수이었던 만큼 웬만한 거부가 아니라면 이러한 특혜를 누릴 수
없었으며, 대체로 Consortium을 형성하고, 집단적 자본을 갖춘 일정한 대표자에
의해 재정 규모에 걸맞는 수탈적 경영이 이뤄졌다. 속주에 파견된 자들은 먼저
징세 업무를 핵심적으로 다뤘고, 우편업무까지 처리 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Publicanus
(푸블리카우스)라고 불리던 세금 징세원들은 오로지 과도한 이윤추구에 집중하였던
나머지 국가에 선납한 공식적인 징세액수 그대로 거두는 목적을 두었다기 보다는
약탈하는 자의 특권을 이용하여 속주민의 팔을 비틀어 추가분을 강요하였으며, 필요
하다면 직접적인 폭력 행위도 서슴치 않았다. 결국 과도한 세금이 하나의 채무 형태로
반전되고, 살인적인 이율의 빚으로 남겨졌는데 가진 것은 몽땅 털리고 종국에는
노예 신세가 되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 멀리 떨어진 속주(Orient ↔ Spain)등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예속민들이 불합리한 착취구조에 항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식이 일부 이상주의 적인 귀족 들에 의해 형식적 가치로서 보장되기는 했으나 이러한
비상수단도 제공되는 뇌물의 양이 엄청나다 보니 엄격한 원칙마저 무색해지고 오히려
원로원에서 파견한 행정관들의 빼먹기 방식에 의한 착취구조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Large-Marcus Porcius Cato 시대부터 "로마 인" 들은 자본가라는 속성을
이해한 듯 싶다. 자본이나 성장, 재-투자, 법인체 등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요소를
이해하고 실행하였는데 공화정시대에 대표적인 인물로서 Marcus Licinius Crassus를
꼽을 수 있다. 한마디로 "자신이 군대를 거느려야 진정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군대를 가진 듯하며, 정치, 경제 분야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확인된다. 참고적으로 Roman 상류 층이 대체로 통상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었고, 진정한 "부"를 획득하는 수단은 "농업"이라며 상업을 천시했으나
부유한 평민 계층에서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던 대량 통상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당시에는Wine, Olive Oil, Garum, Grain. Ceramics 같은 종류의 물품을 거래
되었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상품은 Amphora(암포라)라는 항아리에 담겨져 해상을
통하여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어야 하는 원거리 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원로원 의원
들이 통상에 개입되면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 정책을... 임의로 변경하 수 있었기
때문에 통상 개입을 규제하는 법과 대형 선박 소유를 막는 법안을 통과(기원전 100)시킨 것으로
보아서 상당 규모의 교역이 진행된 것은 확실하며, 귀족들은 변칙적으로Negotiator(네고티아토르)
라고 불리던 중간 거래상들을 통해 자본을 투자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택하여 법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따라서 중간 거래상들은 자본금을 지원 받는 대가로 자신들의 명의로 통상을 하였고,
거의 모든 위험적인 요소를 떠안은 반면에 귀족들은 투자가 성공하면 막대한 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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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ing Point
고대 동, 서양의 어떠한 정치적 공동체를 막론하고, 하나의 조직이 유지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 안에 포함된 성원들이 세금을 내주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유쾌하지 못한 의무로서 그들에게는 일종의 필요 악이었다. 당시 로마는
Polis에 속한 건물, 토지의 매매에서 생기는 돈, 임대료로서의 농지세와 방목세
그리고 통행세, 관세, 염세 등 간접세 등을 거두어 국가를 경영해 갔다. 그러나
문제는 기원전 406-기원전 398년 사이의 9년 간 치러진 전쟁 즉 !! Veium = Veio을
포위 공격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당대의 Urbs Roma 군대는 상비군이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 기본적으로 생업에 종사하고 있면서 적이 나타났다는 신호로서 "야니쿨룸
요새" 에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순간 그리고 나팔 소리가 들리면 즉시 !! 시민들은 평소
자비로 마련해 둔 무장을 하고 Campus Martius(군신의 광장)에 모여 총-사령관이었던
Consul(집정관)의 지휘아래 적을 물리치고 나면, 자동적으로 해산되어 생업(농업)에 곧바로
임하였던 것이 Citizen Militia(시민 군) 형태의 병제 체제이기도 했다. 전투는 대부분
단기전으로 치러졌고, 그래서 국가는 병사들에게"생계 유지"를 위한 봉급을 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9 년이라는 장기 전을 치루면서 학습된 결과로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원로원은 곧 !! Tributum(트리부툼)이라는
전쟁세를 징수할 것을 결정하였는데 이러한 문제가 바람직스럽게 해결
되었고, 전쟁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부과한 직섭세이었던 셈이다.
그것을 통해 이제부터는 병사들에게 봉급을 지불하며, 장비를 갖춰주는 수단을 마련
하는 제한된 특수 목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기 때문에 "목적세"라고할 수 있었고,
영구적인 방식이 아닌 한시적 개념으로 1 년 단위로 부과되는 특성을 보인다. 사실
Tributum은 기원전 167년에는 징수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Urbs Roma가 속주와
동맹국 들로부터 얻어진 "부" 자체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기원전 43-기원전 36년 사이의 내란 사태가 촉발되었을 때 원로원의
의결에 따라 Tributum이 다시 징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Tributum은
국가의 일반적 예산에 들어 있지 않은 특별세이었으므로 오직 "전비"를
마련하고자 했던 하나의 목적을 위해 과세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모든 세입, 세출을 장악(국고)하고 있던 원로원의 결정에 의해 부과 되었다는 것이다.
세금의 성격이 이렇다보니 Tributum의 납세자도 무장할 수 있는 성년의 남성
(시민)들에게 집중되었고, 17-45세 이하의 청년 조(Luniores), 46-60세 까지의...
노년 조(Seniores) 모두를 포함하여 병사로서 동원될 수 있었던 시민들
(Les Mobilisables), Assidui(아씨두이)가 병사로 동원된 시민들(Les Mobilises)에게
봉급을 주기 위해 Tributum을 납부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병역 면제
혜택(Immunis Militae)을 받은 Proletarii et Capite Censi는 "트리부쿰"을
납부할 자격이 없었고, 따라서 그들은 법률상 "트리부쿰" 면세자가 되었던 셈이다.
따라서 돈많은 과부 혹은 고아들의 경우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하더라도
트리부쿰의 납부가 권리상 불가하였다. 다만 그들의 후견인을 통해 그들의 재산을
국가에 공탁하고, 공탁금으로 기병의 기마 유지비로 사용하게 되는 길이 열려
있었을 뿐이었다. 또한 이것은 재산의 비율에 따른 직접 부과세로서 재산 비례 정치의
논리에 맞춘 것이기도 했다. 가장 부유한 자는 가장 무거운 부담을 그렇지만 가장
커다란 영예와 가장 큰 책임들을 소유하게 된다는 개념은 재산 비례원칙이
정치제도의 근간을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많이 가진 자가 세금을
많이 내고, 적게 가진 자가 적게 내는 것이 공익에 유리하고, 정당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재산이 많을수록 시민들은 Tributum을 더 많이 납부해야
했던 것(가변 세율의 원리)이다. Tributum 기본적으로Census에 기록된 재산 평가에
근거하였으며, "부" 에 따라서 확실하게 시행되었다. 또한 Tribuni Aerarii
(트리부니 아이라리이)에 의해 국고에 선납 한 후... 납세자에 대해 징수되었던 점이
특별해 보인다. 그들은 병사들에게 봉급을 지불할 돈을 할당 받은 사람들로서
의무를 지닌 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일단 재산이 많은 자로 분류될 수
있는데 기원전 46년 Julius Caesar에 의해 폐지되었으나 기원전 70년에 제정된
Lex Aurelia에 기초해서 보면 센서스의 재산 평가 기준으로 가장 부유한 평민들을 의미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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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이 평민 생활에 차지하는 커다란 비중 때문에 원만한 곡물 공급이 바로...
정치적으로는 선거에서 "표"로 연결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그것을 관장
하였던 "Cura Annonae(쿠라 안노나이)"는 어떤 야심에 찬 정치가도 노릴만한
고위 행정직이 되어준다. 대표적으로 이러한 시점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인물 중에
온전히 평민들의 지지로 선출된 Appuleius Saturninus(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우스)
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귀족들에 대한 반감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비례화 하여
성장시켜온 인물로서 여러 법안을 적용 시키며, 토지 귀족 세력을 압박하였다. 또한
그는 Gaius Marius를 귀족에 대한 공격과 방어 그리고 견제 정책을 함께 할 수 있는 적합한
인물로 보고, "마리우스"의 병사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하는 등 평민에 대한 충성도를 보여준다. 영토적 개념에서 귀족들에 비해 땅 한 조각이라도
소유하지 못했던 대다수 평민들 중에서 "마리우스" 휘하의 병사들 즉 !!
"무산자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은 제대 이 후 돌아 갈 땅이 사실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호민관이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한다는 것은 해석
하기 나름이지만 대단한 정치적 효과를 거뒀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되어서
Capite Censi(머릿 수)는 정치적으로도 Gaius Marius의 군-개혁에 필연적이었고, 매력적인
것으로 보였을 것이며, 배경에는 군대의 개혁으로 "권력"이라는 거대한 "힘"이 작동
됨으로써 자신의 정치, 사회적 입지에도 직,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핵심적 가치
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100년 Appuleius Saturninus가 호민관에 재선 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원로원의 분노가 극에 달했고, 본격적인 권력 투쟁 양상으로 전개되는 아찔한
장면들이 연출되기 시작하였는데 당대 원로원 의원들의 불만을 뒤로 하고, 가장 먼저
시행된 법안이 "토지 개혁안"이었다. 왜 !! 그는 이처럼 무리수를 둬 가면서 토지귀족들과
대립하여만 했을까 !!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뿐이다. 그것은 인구 분산을 노리고, Gallia Transalpine
(갈리아 트란살피나)지역에 이들을 정착시키기 위함이었는데 병사로서는 전투에서 살아
남는다면 일단은 약속한 토지가 주어졌으며, 한정된 지역에서만 싸워 살아남은 병사들이 그...
수혜자가 되었고 그 자신은 정치적 권력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르타고" 를
초토화 시킨 Scipio Aemilianus의 촉망받던 부관이었던 Marius & Sulla의 정치, 군사적
알력은 기존에도 존재 했다. 기원전 91년 초기 동맹시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Marius는 "벌족파"의
지원을 받은 자신의 부관이자 경쟁자 이기도 했던 Lucius Cornelius Sulla
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그래서 강력한 경쟁자의 제거를 시도 하고자 했으며, 이 때
그을 막아선 것은 기원전 90년 동맹 시들이 연대하여 일으킨 Social War이다.
또한 이러한 내분 양상의 전쟁은 Marius & Sulla가 동시패션으로 치룬 전쟁으로서
이로 인해 양자 사이의 갈등이 봉합되었으면 좋았겠으나 이들의 갈등관계는 기원전 88년
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당시 !! 동맹시들은 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으나 최소한의 목적은
이루게 되었는데 마침내 그들은 Roman Republic Civitas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어찌되었든지
이렇게 힘겹게 하나의 고비를 넘길즈음 그러니까 기원전 89년 갑자기 Marius Aquilius
마리우스 아킬리우스)가 속주 총독으로 있던 Anatolia→Black Sea 연안 지역에서
다급한 파발이 도달되었다. 그것은 변방의 군주국의 도발을 알리는 것으로서 결코 만만한
상대라고 볼 수 없는 인물의 도발에 기인한다. 일찍이 그는 Greece와 연합을 이루고,
Asia Minor에 남아 있던 Roma People 들을 학살하였다고 전해지며, 녹여진 "Gold(금)"을



속주 총독의 입안에 부어 넣어 절명시킬 정도로 잔인하였고,
이러한 행위를 Roman Republic에 대한 "전제 군주의 판결"이라고
공헌 했다. 그리고 포악함의 주인공이었던 Mithridates는 평소 암살이
두려워 소량의 독약을 먹고 내성을 길렀을 정도로 평소 자신의 관리에 철저
했던 인물로서 스스로 Persia 왕가의 후손임을 자처 했으나 실상은
동양의 한(漢)-제국에서 안식국(安息國)이라고 불리던 Parthia의 하나의
가문 출신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총사령관 직을
두고, 잠복하고 있던 양자 간 갈등이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초기에는 Tribunus-
Plebis(호민관)과 결탁한..."마리우스"가 단순무식하게 Asia Minor 정벌의
지휘권을 얻었으나 Consul(집정관)들은 종교 상 이유로서 휴회를 선포
하고 당일 통과된 법을 잠정적으로 유효 시키며, 또 다른 법안 통과도 저지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마리우스"는 자신의 권력을 향한 진일보한 행위를 서슴치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긴장감이 고조되고, 마리우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Forum-
Romanum으로 가서 "유스티티움"철회를 주장하며 집회장을 아수라장으로들었다.
역시 !! 권력의 달콤함을 잊지 못한 몸부림은 위대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여우
같은 "술라"는 그 순간에도 기지를 발휘하여 아예 "범(虎狼)"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갈
궁리를 했고,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술라의 도주 그리고 총사령관
직책의 향방은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고, 이제 술라의 번개불에 콩 구워먹듯한 반격이 이어진다.
참고적로 "로마 인" 들의 입장에서 Parthia는 지독한 적대국이었던 것이다.
Roman Republic → Roman Empire으로 넘어가면서 집요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동쪽 변방에서 Empire과 공존하던 강력한 전제-군주국이었다. Asia Minor를 근거지로
하여 Mithridates는 순식간에 Greece를 포함한 동부 지중해 일대를 손에 넣었는데
Roma People들에 의해 지중해 세계를 통일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당대 문명의 중심지는
아직도 동부 지중해이었던 데다가 이러한 지역은 "로마 인" 입장에서는 알짜배기 속주
이었던 것이다. 실질적으로 속주에서 착취하는 세금이 없었다면 Roman의 재정은 파탄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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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Patrici 가문의 여성과 결혼한 Gaius Marius는 실제로 그 자신은
별볼일 없던 시골 가문 출신이었으나 단 한번의 기회를 멋지게 자신의 성공적
삶과 연결시켰던 인물이었다. 반면 Lucius Cornelius Sulla 역시 !! 성장 과정에
있어서는 다수의 굴곡진 저항의 흔적을 갖고 있었지만 당대 "술라"의 Role-Model은
"마리우스" 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그 시대에 그만한 입지전적인 인물도 없기도
했지만 결과론적으로 양자가 똑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는 사실은 두 사람을 비극적인
헤어짐으로 이끌었다. 동맹시 전쟁에서 술라에게 모든 권한과 공적을 침탈 당했을
당시 사실 "마리우스" 는 조용히 모든 것을 포기하고, Campania 지역의 자신의 호사스러운
별장에서 SPA를 즐기면서 침거하며, 남은 여생을 보내야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가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 당연하지만 그것은"권력"이었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으로서 이미 모든 것을 소유했었던 그가 무엇이 부족해서 미치광이
마냥 권력을 탐 했는지 알길 없지만 그는 아름다운 퇴장을 준비했어야
옳았다는 점이다. 만약 !! 술라에게 자신의 영광스러웠던 자리를 자연스럽게
물려주었다면 역사적 평가는 좀 더 긍정적인 결과를 얻게 되었겠지만 그의 선택은
그렇지 못했다. 아주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 기원전 458년 국가 위기
상황에서 6일 만에 모든 상황을 종료시키고, 아무런 미련없이 원래 있던 곳(전원 생활)로
돌아간 Cincinnatus = Lucius Quinctius Cincinstus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는 현실 속 보다는 과거 Roman Republic의 역사 속에서 정답을 찾아야 하였던 것이다.
비교되지 않은가 !! 지나칠 정도로 "권력" 에 대한 집착을 보였던 인물과 "권력" 앞에서
초연한 모습을 보였던 위대한 인물의 차이를 말이다. Gaius Marius의 마지막 모습은 옹졸해
보이기 까지 하다. 그는 술라에게 완전히 밀린 후 Italian Peninsula를 떠돌며, 노예 병사
(용병)들을 모집했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Roman Republic에 대한 적개심 !! 개인적 복수로
연결시켜, 추잡한 인물이 되고야 말았다. 그러나 파란만장한 영욕의 세월을 보낸 노-장군의
마지막 순간은 역사 속에 초라하게 기록되었으며, 그나마 곁에 Lucius Cornelius Sulla가
남겨져 있었다는 사실로 만족해야 했다. Greece-Anatolia 출정에 앞서 "술라" 는 결과적으로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시켰고, 호민관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도출하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차기 집정관이기도 한 Gnaeus Octavius(그나이누스 옥타비우스),
Cornelius Cinna(코넬리우스 킨나)에게 신뢰성을 요구 했는데 이것은 유효
한 것으로 원정을 떠나기전 실권자로서 당연히 요구하는 적절한 행위이기도 했다.
그러나 "술라" 가 떠난 후 그중 한 명이 Poularis(포풀라리스, 민중 정치가) 성향을 곧 !!
들어낸다. 이 후 집정관들 끼리 대립이 이뤄졌는데 카이사르의 장인이기도 했던
Cornelius Cinna & Gaius Marius의 결탁이 성립되었으며, 앞서 언급되었던 그대로
절대 복종하는 군대 (마리우스의 노새)를 거느리고, Urbs Roma에 입성하여 참혹한 살육을
전개하였다. 반면에 술라는 기원전 87년 뛰어난 군단 전술을 선보이며 Greece를 탈환
하는 예상밖의 전과를 올렸으며, 이제 Asia Minor 까지 정복하면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배자가
될 수 있었겠지만 "미트리다테스" 의 예상 밖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 기원전 84년 원로원의
승인이 없이 Treaty of Dardanus(다르다우스)라는 평화 조약을 맺고 물러서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점은 Urbs Roma에서 또다시 Marius가 득세하여 반대 파를
숙청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어쩌면 "술라"는 Urbs Roma의 사정을 첩조를 통해
평화조약 체결 이전에 알고 있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당장 눈앞의
전투에서 승리보다 전략적으로 그저 반란세력이 되어버리고 만 Marius가 우선 시...
되었을 것이다. "술라"는 급거 귀국하고 또 다시 다시 피의 숙청 작업에 몰입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어찌되었던지 훗날 Croisade-
War의 "리처드왕과 살라딘"과 미묘했던 대결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고 보여지는데
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술라"의 원정은 빼앗긴 영토를 되찾았으니 절반의 성공이었던
셈이었다. 따라서 국민적 영웅으로 부각된 개선장군 "술라"는 가장 먼저 반대파를 또 다시
쥐 잡듯이 숙청하고, 자신의 병사들에게 의례적이었으나 충분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마친 뒤 그는 종신 독재관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전통적 Roman Republic의
위상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대략 10,000명의 친위대와 막대한 "부" 와 원로원 의원들
마저 임명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술라"의 "공포 정치"에 맞설자는 Urbs Roma에서
이제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으며, 최초의 고대적 군사 독재가 성립되었던 셈이다. → 반동적 법률 제정


인물이다. 그러 면에서 그의 성공은 입지전 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부유한 여성의
정부로서 계모의 유산을 바탕으로 정치적으로 도약한 지독한 승부욕과 냉철한
이성을 갖춘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는데 일인자가 된 후 그가 펼쳐보인 개혁 Program을
살펴보도록 하자 !! 우선 그는 Italian Confederacy(이탈리아 연합 = 라틴 연합) 세력의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하는데 주력하였고, 실제로 그의 전투 이력에서도 드물게 가혹한 처벌이
뒤 따랐다. 그러나 Social War의 마지막 시점에 가서는 양측이 모두 지쳐 지쳐 있던 상황
이었기에 결과적으로 "술라" 는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으나 Gaius Gracchus &
Livius Drusus(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주장한 "로마 시민권 허가"를 신중하게 고려 했고, 수용
해야만 했다. 또한 강력한 정치 개혁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원로원 숫자는 → 300 명으로
"에퀴테스 계급" 에서 충원시켰으며, 점차로 증가하여 600 명으로 하였다. 행정관 20 명, 법무관
8 명을 두며, 재무관 당선자는 자동적으로 원로원 자격을 갖도록 하였고, 원로원에는
매년 20명의 신규 대상자를 채워 넣었다. 그리고 호민관의 권한 축소, 호민관이 발의한 모든...
법안은 원로원 승인 후 발효를 하게 하였는데 거부권 행사에 대한
제한, 호민관 직 후 다른 행정직은 절대 불허하는 법령이 발효되었다. 즉석
재판의 수와 규모 확충을 시도했으며, Censor(감찰관) 직 마저 폐지되었고, 그러한
직무가 가졌던 원로원 입회에 관한 통제의 권한도 당연하게 박탈 되었다. 주목
되는 것은 당시 "술라" 는"곡물의 분배" 를 폐지하였는데 이것은 Urbs Roma의 평민의
인구 수를 줄이기 위한 조치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에퀴테스 계급"의 부당취득
재산 반환 법정의 통제권은 다시 원로원으로 이관되었고, 실제로 술라의 이러한 "법적
제도"에 대한 개혁은 유용하였다고 전해졌다. 따라서 과도한 직권권한 남용의 부정
축제를 하였던 일부 토지 귀족이나 야망을 숨기고 있던 자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으며,
왕정시대에나 있었던 순서에 따라 행정직을 나누어 갖는 순환 구조를 갖게 된다.
무엇보다도 가장 치명지적이었던 것은 역시 !! 30세 이전에는 그 누구도 정무관직에 나설 수
없었다는 조항으로 하나의 관직을 갖고 임기 후 새로운 관직에 입후보 하기위해서는
10 년 이라는 간격을 두어야 했었다고 한다. 즉 !! 마리우스 처럼 계속해서 집정관이
됨으로써 생겼던 권력의부작용을 상당부분 감소시켰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떠한 대규모
군대도 Italian Peninsula 내부에 주둔시킬 수 없게 하였던 것이고 차후 전쟁에서 승리
하고 개선하는 장군들은 명령권을 반납하고 사적인 신분으로 Italian Peninsula에 들어 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무력으로 정부를 장악 하려는 또 다른 "술라" 는 필요
없다는 것이었으며, 이제 Urbs Roma는 "과두주의 자"들을 위한...
안식처가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개혁을 전개한 이 후의 술라는 마리우스와
달리 일단은 모든 주요한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후 기원전 78년 사망에
이르렀다. Roman Republic은 그를 위해 국장이 치뤘는데 그의 묘비 명에는
그의 성과들이 빼곡하게 새겨지게 되었으며, 그것은 당대 술라와 그가
살던 시대의 정치적 증거(권력)이기도 했다. → 술라의 독재관 은퇴(정계)가 주었던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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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ing Point
Campus Marzio(캄포마르치오) = 개선식의 행렬
Triumphator(트리움파토르)들이라고 하면 전쟁터에서 Imperatores
(임페라토레스)를 의미하였는데 승리를 거둔 장군들에게 부여되었다. 이 후
원로원의 비준을 받아 그러한 사실을 인정 받는 절차를 반드시 거쳤다.
"월계 관"을 쓴 개선 장군은 Jupiter의 옷을 입고, 금으로 치장된 Royal Color
웃옷과 망토 그리고 금박의 신발 Jupiter를 상징하였던 독수리로 장식된 상아로 만든
왕-홀을 꼿꼿이 세우고 서 있게 된다. 귀족 행정관들과 원로원 의원들을 앞세운
행렬은 Campus Marzio를 떠나서 Forum Boarium(포룸 보아리움)를 통해서 Pomerium
안으로 들어서며, 그곳에서 무적의 Heracles 신전 옆을 따라 가다가 Via Sacra
(비아 사크라)로 들어서는 Velis(벨리아) 언덕을 거쳐 Roman Forum을 가로 지른다.
그리고 마침내 Capitolinus의 언덕 길을 지나서 최고의 인정을 받은 의식이 거행될 Jupiter
신전에 이른다. 이처럼 승리자의 행로는 도시 초기 시대의 역사를 따라서 경건한
Palatinus 언덕부터 Capitolinus까지 이어지며 이러한 행렬에 부여된 의미는 공화정 시대의
모든 로마인들에게는 너무도 명백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영예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엄청난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부여 받을 수 있었는데 그 다음 시대 즉 !! 제정(원수정)에서
황제에 오른 인물들은 그러한 특전을 독점하려 했다. Imperator
(임페라토르)는 고대 로마에서 Imperium(임페리움, 명령권)의 소지자
라는 뜻으로 로마의 상층부 관리(행정직)가 가지는 고유한 권한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고의 군 지휘권이라는 의미만이 강조되어 점차로 전공을 세우고, 개선
하는 장군의 총칭이되기도 했다. 특히 공화정 말기에는 더욱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컨대 카이사르는 이러한 칭호를 평생 사용하였으며 여기서 군대의 지휘권,
개선식의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의 Imperator(임페라토르)가 황제권을 나타내는 칭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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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ius Marius는 기원전 107년 정치적으로 Novus Homo이었다.
그러나 그는 최고 관직을 7회에 걸쳐 역임했고, 병제 개혁을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받을만 하다. 애초에 그는 기사 신분으로 Gens Lucius-
Caecilius Metellus(메텔루스) 가문에 의해 보호와 지원을 받다가 “유구르타
전쟁”을 계기로 "메텔루스"를 밀어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 후 집정관이 되면서 병제 개혁을 하였는데 역시 재산 평가액에 따라 징병 시
Assidui(아씨두이)만이 소집될 수 있었던 제도하에서 병역에서 면제된 상태에
있던 Proletoarii(프로레타리이) 들의 자원하면 지원병으로서 받아들이게 징집 대상이
되었던 상황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군단이 전원 이들로 구성된 것은
아니며, 종전처럼 "아씨두이"들이 징집 대상이었는데 이들도 지원하면 가능해지게
되었다는 것(미봉책)이다. 이렇게 되면서 빈민들도 군대에 징집되면서 종전의
로마군단는 일종의 직업군대로 변질되어 사령관인 장군의 사병화되는 단계로 진입
되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기원전 111년에 제정된 “농지법”은 참고할 가치가 있다.
전쟁과 관련된 부분에서 소토지, 소규모 가축의 소유자에
대한 관대한 조치 !! 이것은 토지 분쟁의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함으로써
병력 동원의 장애를 제거하고자 했던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로서
국가의 공유지를 매각하는 규정이 함께 마련되었는데 전쟁지원 목적 또한
매각된 토지를 사유화 하면서 동시에 일정의 농지세 납부의 의무를 부과 또한
여기에 조세 청부업자가 개입되도록 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제도를 통해
(111) 로마의 정치판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또한 Gaius-
Marius의 병제 개혁 기존의 정치 세력에 대한 기사 신분의 세력을 과시하였던
중요한 단계로 확인된다. 무산자의 재정문제 → 청부업자(기사 신분) → 정치적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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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작용하면서 서부(西部) 지중해의 패자로 다가선 Roman Republic !!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던 위치에 올라섰으나 그들의 정복욕은 Carthago의 지배 영역
이었던 모든 곳을 흡수하고, Spain 마저 "속주"로 건설하였으며, North-Africa 역시
영향권 아래 두게 되었다. 이러한 Roman Republic에서 기본적으로 항상 중요시 되었던
정치적 결정은 토지 개혁안과 곡물 정책에 관계된 것이었는데 "가족의 혈통" 못지 않게 다뤄지던
것들로서 Roman Republic의 이해를 돕는 핵심적 요소이기도 하다. Citizen-Ship(시민권)
문제로 세계 최강의 군대가 둘로 쪼개져 싸운 내란 상태의 동맹시 전쟁이 발생되었던 것은 Roman-
Republic 말기 최악의 권력 투쟁에서 비롯되어진 것으로Populares(포풀라레스) & Optimates
(옵티미테스)의 반목은 "공화정 붕괴의 씨앗"을 제공했던 Lucius Cornelius Sulla(기원전 79) 사후에도
무한하게 지속되었고, 원로원에 의한 "과두 지배체제"가 불안정 속에서 지속되었다. 또한 결정적으로
이러한 시기 권력의 균형을 무너뜨린 것은 내부의 혼란 상황에서 비롯된 원인으로서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가중된 "적대 적 세력"들의 움직임에 의해서 이었다고 확인된다. 정리해 보면 동부(東部)-
Mithridates(미스리다테스)가 기회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 하고 있었고, 서부(西部) 지역에서는
한 때 원로원 총독에 의해 축출 되어 기반을 상실한 "마리우스"의 추종자
Quintus Sertorius(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반란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여 "술라"의
지배로부터 숙청된 망명자들을 받아들이고, 근거지를 마련 후 Lusitania People
(루지따니아)과 함께 Spain 지배권을 획득하며, 본토의 통제를 벗어난 채 속주 총독
Pro-Consul(전직 집정관)으로서 독립된 형태로 모국에 위협을 가중시켰다. 또한 본토에서는
Spartacus(스파르다쿠스)의 노예 반란이 혼란을 야기하고 있었고, 지중해에서는 해적의
활동으로 인하여 Roman Republic의 "곡물 무역 교류"를 위축시키며, 정체(停滯) 상태에 추락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해 "비상 대권"이 필요해 졌고,
사회적으로는 영웅의 출현에 목말라 했다. 난세가 영웅들을 부른다고 했다. Lucius Cornelius-
Sulla가 남긴 "군사 독재" 의 경험에 의해 마침내 "군인 정치"의 전통이 승계 되었으며, 등장
하게 된 인물들은 대략 Pompeius-Crassus-Caesar이었다. Lucius Cornelius Sulla"가 마리우스의
부관이었듯이 Pompeius(폼페이우스)는 술라의 부관이었다가 적절한 시기에
정치적 도약을 이루게 되었는데 Sulla가 미스리다테스의 전쟁에서 권력의 실마리를
잡았듯이 그 역시 군인으로서 충분한 족적을 남길만한 기회를 포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기원전 76년 원로원의 요청으로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4년 만에 진압하게 된 것으로서
그 덕택에 그는 첫 번째 월계 관을 머리 위에 올려 놓게 되었다. 하지만 술라에 비견
할만 한 인물은 아니었던 같다. 더구나 당시 Roman Republic 분위기는 결코 "일인 집권"을
허용할 만큼 구조적으로 취약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하도록 하자 !! 부유한 가문 출신의
자산가이며, "술라 시대" 숙청된 사람들의 재산을 사들여 최고의 부자가 된 인물이기도 했던
Crassus와 혹시나 전제 군주가 될뻔 했던 Pompeius는 그 누구도 술라는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양자는 경쟁자라기 협력자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었으며, 훗날 동시에 집정관이
되었던 두 사람이 이룬 공동의 성과는 역시 !! 고대 사회 최대의 노예반란을 진압한 것인데
바로 Spartacus(스파르다쿠스) 반란을 완벽하게 진압한 것이다. Latifundium(라티푼디움)의 발달로서
Urbs Roma로 유입되는 노예의 숫자는 크게 증가될 수밖에 없었고,
당대 노예들의 용도와 종류, 다양성에 비추어 반란을 일으킨 노예는 바로
"로마 인" 들의 경기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Gladiator(검투사)" 들이었으며,
기원전 73년 검투사들은 "트라키아" 출신의 스파르다쿠스를 지도자로 삼아
반란(킴브리인과 튜턴인 주축)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에 의해 Central-Italy =
지역이 직접적으로 유린되었는데 이때 Crassus의 용병과 Spain 반란 진압의 공을
세운 불굴의 Roman Legion(로마 군단)이 노예 반란을 진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 적으로 부유했던 "크라수스" 보다 자격에서 결코 앞서지 못했던 Pompeius는
이러한 시기부터 좀더 커다란 전공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는데 때마침 "술라" 와
맺은 조약이 파기된 사실에 분노(기원전 74)하며, 몸부림치던 Mithridates가 속주
공격(비티니아)을 시도하였고, 그러던 중 "로마인"들이 Black Sea 지역으로 부터 축출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따라서 당시 해적들과 동맹 관계 유지하며 호전적으로 나서던
Mithridates를 치기 위한 목적에 따라 원정군이 조직되었고, Syria-지중해 일대의 해적들을
아우르는 초대형 원정이 기획되기에 이르렀다. 시작은 기원전 67년, 해적
소탕부터 이루어졌으며, 비슷한 시기 원로원은 미스리다테스와의 1차 전쟁에서
"술라의 부관" 이었고, 훗날 Pompeius와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식도락가로 전락한
Licinius Lucullus(리키니우스 루쿨루스)에게 소-아시아 지역 비상 대권이 주어
진다. 그는 기원전 64년 Pompeius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 당하였던 비슷한 시기
도주하는 Mithridates(미스리다테스)를 추격 Armenia까지 진격하였고, 그곳에서 생소한
세력과 첫 번째 전투 기록을 세웠으며, "바빌론과 니네베" 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유프라테스 강 상류지역에 세워진 장엄한 도시 Tigranocerta(티그라노케르타)를
정복한 것은 온전하게 그의 공적이었다. 또한 군사적인 성과이외도 "술라 시대" 황폐화
된 속주의 재정을 재 정립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 징세 청부 업자와 대금 업자 통제
.
.
.


그런데 결과적으로 Mithridates의 파멸을 주도한 자는 Pompeius이다.
Pompeius의 경우 이미 서쪽으로 Portugal, North-Africa을 발 아래 두었으며,
Antioch(안티오크)에서 그 세력이 약화되었던 Hellenism 세계의 "Seleuco
(셀레우스코)의 왕"을 폐위시키고, Syria를 병합시켰으며, Parthia을 견제할 목적으로
Licinius Lucullus가 건드려 보았던 Armenia 마저 정복하고, "트란스-카프카즈"
까지 진격하였고, "알바니아 및 이베리아 인" 들과도 전쟁을 수행하였다. 한 마디로
전쟁의 화신이었는지 그는 전설속에서나 나오던 땅, Amazon 전사들의 터전,
Caspie Sea까지 원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시기 동쪽으로 Egypt...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로마 속주"의 재편을 일괄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주목
되는 사실은 Jerusalem 점령과 동시에 Roma People & Jews의 만남이 역사상
최초로 성사되었다는 점으로서 뒤이어 "Jericho & Petra" 에 대한 원정이 뒤따랐고,
Mithridates의 허무한 죽음 이 후 마침내 Asia Minor에서의 자신의 사명(기원 전 62)을
완수했다. 참고적으로 훗날 India & China에서부터 이어지던 대상로 중 하나는
Black Sea 남쪽을 따라 Kavkaz & Caspie Sea를 따라 이어진 길이었으며, 이곳은
이제부터 Roman의 지배 하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운하였다. 기원전 62년 로마에 개선(Triumphator, 개선장군)하며, 군대까지
해산시키는 충성도를 보였지만 Roman Republic 이익과는 상관없이 "로마의 표상"이라고
칭송되던 Marcus Pocius Catoffm 중심으로 한 원로원의 공화주의자 세력은 그를
승인하려 하지 않았고 당연스럽게 그의 요구를 묵살한다. 한편 이러한 시기 공화주의자로서
대표적인물로서 Republic 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있는 토대
위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던 인물도 다수 눈에 띄었는데 대표적으로
앞서 언급되었던 Lucullus & Cato도 포함되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던 지방 도시 "아르피눔" 출신으로 법률적 재능을 눈부시게 활용
하였던 Marcus Tullius Cicero 등은 당대 Pompeius-Crassus-Caesar 더불어
주목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어찌되었거나 Pompeius의 불운을 절대적 호기로
삼은 인물은 Gaius Julius Caesar(율리우스 카이사르)이었다. 일찍이 Lucius-
Cornelius Sulla는 카이사르의 인물 됨을 꿰뚫어 보았다. 그가 보기에 카이사르는
"위험 인물" 이었던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라의 Official Gazefte(처벌자 명단,
관보)에서 빠질 수 있었던 것은 모계 쪽-Gens의 구호 활동에 의해서이다. 서슬퍼런
시기가 지나고, 기원전 80년 시민 들의 원성을 사기전 독재관 직 반납 후 잠시 집정관 직에
머물기도 했으나 결국은 그가 가장 선호하던 화류계(花柳界)에서 놀기 좋아하는
시민으로 돌아간 이 후 권력의 공백기가 찾아들었는데 "술라의 독재관" 시기 경제적
이익을 취득한 Crassus(크라수스)와 군사적으로 나름대로 성공시대를... 구가
하던 Pompeius, "마리우스" 의 Gens로 묶여 있던 자로서 잠시 술라의 숙청자 명단에
포함되기는 했으나 사면된 Caesar(카이사르) 이들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전통적인 지배력을
회복한 평민 세력(호민관)의 지지로 집정관에 입후보 되었고, 당선되기도 하였으며, Lucius-
Cornelius Sulla 사후에는 이들의 세상이 되었으며The First Triumvirate(삼두 정치)를 이끌게 된다.
이들이 결속된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계기가 작용했는데 그것은
영민한 두뇌 소유자이며, 대중적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던 Caesar가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대권 후보로서 "카이사르는
명문 귀족 가문이라는 점 이외에 내세울 것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다른 인물들에 비하여 나이도 가장 어리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Roma-
People(대중) 들은 탁월했던 정치적 감각, 교양있는 지식인, 원로원의 뛰어난
웅변가이라는 모습과 그 이전 다소 혈통에 의한 결과이었으나 "마리우스"에
의해 반-어거지로 13 살의 어린 나이에 떠 앉게 된 감투Roman Pomtifex-
Maximus(폰티펙스 막시무스, 대신관)에 머물렀던 그의 신분에 대한 특별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기본적으로 "공화국 최고의 관직"에
오르는데 필요한 만큼의 정치적 인기를 얻으려면 합리적 평판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결코 서두르지 않으면서 그만한 가치가 있는 관직(행정직)을 하나씩 선점하여 왔다.
쉽게 말해 "술라"를 피해야 했던 시대에는 조영관, 법무관 등과 같은
관직(행정직)을 주로 선호하였고, "술라" 사후 돌아온 그는 마침내 기원전 61년
속주 총독(자신의 빛을 갚는데도 필요했던 직책과 군사적 경력 관리)으로
Spain으로 부임하였으며, 이곳에서 훌륭한 전사이면서 장군이라는 사실을 증명
하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집요하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축소시키려는 정적이 또한
있었는데 그가 바로 Small-Marcus Pocius Cato이다. 사실 카이사르가 요구 했던
개선식과 집정관 직의 요구는 법률적으로도 두 가지 모두를 얻을 수 없기도 했지만 Cato의
의견에 따라 결국 한 가지를 선택하여만 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여기서 Roman-
Republic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을 만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화려한 개선식
보다는 집정관 후보직을 선택한 사실로서 주사위 던지는데 있어서는 아마도 선수
이었지 않았나 싶다. 반면 앞서 언급되었듯이 성공적인 원정에서 개선장군으로 돌아온
Pompeius는 결코 평탄하지 못한 정치구조(원로원의 권한 남용) 속에서 뭔가 자신이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자괴감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렇지만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동시에 구현할 우월한 존재이었던 것은
당대 Republic에서 그 뿐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크라수스를 이끌어, 비밀회동을 추진하고 그들에게
탈출구를 제시하였다. 이때 "폼페이우스"는 재정적이며, 대중적 지원을 약속하고
집정관 선거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집정관에 오른 카이사르에 의해 원한던
두 가지 즉 !! 퇴역병에 대한 토지 분배와 동방에서 맺은 협정의 원로원 비준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삼두의 후광으로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무시하고,
민회를 통해 정책을 처리 했으며, 간혹 민회마저 무시하는 사례를 보인다.
즉 !! 때 이르게 독재의 색깔을 드러내었던 것으로 집정관을 지냈고, 철학자이면서
정치가이기도 했던 Marcus Tullius Cicero는 당시 카이사르의 전횡을 사실상의
왕정(Regnum)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제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집정관 직을
상실한 후 세력이 약화되어 미미한 존재가 되기를 바랄뿐이었으며, 관례에 따라
집정관 임기가 종료된 후 원로원이 골라주는 속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우선 먼저 야심
만만하고 정치적 계산이 빠른 카이사르를 통제하기 위하여 조용한 시골(공공 방목지와 가축
이동로를 관리하는 업무)로 보내려 했는데 그곳은 카이사르 입장에서 경력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자신에게 충실한 호민관을 내세워 평민회의에서
새로운 법안을 상정 하도록 했는데 그러한 법안에 의해 그는 잠재력은 있었으나 조롱
거리나 다름없던 Gallia Cisalpina 속주의 5 년 임기의 속주 특별관리권이 주어졌으나 그에게
굉장한 행운이 그에게 찾아온다. 그것은 로마의 법이 통하지 않는 땅으로 가는 통로가
되었던 Gallia Transalpina의 총독이었던 인물이 갑자기 기원전 59년 사망하는 바람에 시급히


지휘관을 파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졌고, 그곳은 카이사르 입장에서
"전쟁의 결과에 따른 경력 관리와 부"를 획득 할 만한 요소가 두루 산재하고
있던 곳이기도 하였다. 어찌되었든지 여기서 또 한번의 도약의 바판이 마련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에 의해 Gallia Transalpina & Illyricum
(일리리쿰)→Dalmacija(달마치야)의 속주 통치권과 3개의 군단 병력에대한 명령권,
자신의 부관을 선택할 권한, 그리고 식민지를 건설할 권한을 민회를 통해 부여
받았으며, 이 후 2개 군단을 더 확보 할 수 있었다. 한편 이러한 결과가 만들어지기 까지
집정관과 호민관이라는 꼭두각시를 조정하여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상정 법안을 입안
시키거나 폐지시킬 수도 있었던신성 불가침적인 존재이었던 삼두 체제의 권력의 힘을 확인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시기 즈음 정력적 결혼 전략이 성립(카이사의 딸 + 폼페이우스의 결혼) 하며,
단세포적이기만 했던 "Cato"의 복수의 날은 멀게만 느껴졌다. 또한 폭넓은 인기를 얻었으나
내세울만한 업적이 없었던 카이사르는 Transalpina(트란스알피나) 총독 직에 오른 직 후
부터 마치 물 잘 만난 물고기가 되었던 셈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군사적 업적을 필요로 했던
Gaius Julius Caesar에게는 천재일우(千載一遇)와 같은 기회가 제공된 것 이었다.
따라서 Caesar는 다시 올 수 없었던 금쪽 같은 기회를 군사적 부분의 공적이 전무한 상황에서
뛰어난 재능으로 순식간에 휘하 장교들을 휘어잡고, 탁월한 전술운용과 Leadership을 발휘
하여 또 다른 그의 경력을 쌓아가게 되었다. 아무튼 카이사르는 드디어 칼을 빼어들게 된다.
그것은 기원전 58년 헬베티 족속의 이주를 트집잡아 속주 총독으로서 의도적으로 국경 16 km
지점에 군대를 배치시킨 것으로 교묘한 음모가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그들이 지나는 길목이기도 했고,
그가 쳐 놓은 덫에 걸려든 "Helvetian(헬베티 족속)"들은
로마 군단을 즉각적으로 공격 하였다. 그 순간 카이사르는 Roman-
Republic을 방어하고 있으며 자신의 존엄성에 가해진 위해로부터 방어
한다는 목적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관장하는 5개 로마 군단을
동원하여 신속하게 Helvetian 족속 들에 대한 의도된 가혹한 전투적 교훈을
남겨주게 되었으며, 명분이 세워지고, 이것은 한마디로 북방 영토가 완전히
평정되기 까지 전투를 수행하겠다는 뜻으로 그 후 8 년동안 카이사르는 완전한
자신감과 야심을 결합, Roman Republic에 대항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쳐들어간 속도 만큼 빠르게 퇴각하는 전술을 앞세워 기원전 53년 Gallia Transalpina
& Gallia Cisalpina 지역을 평정 하고야 말았다. Gallia-Transalpina는 특징적으로
이곳은 Old Wine 무역의 중심지로 Rhone & Garonne River를 따라 높은 수익을
가져다 주었던 시장이 활성화 되었다는 점이 주목되는 곳이기도 하다. 반면
과거부터 껄끄러운 호적수인데다 부유한 전사 귀족이 주축이된 영웅 문화가 생겨난
곳으로 Rhine & Donau River 상류 지역이 그들의 본 고향이라고 확인 된다.
드넓은 지역에 수많은 족속이 산재해 있었고, 사실 이러한 지역이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다면 어쩌면 Roman가 지중해 지역의 패자가 되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 했을 지도 모른다.
Gallia Transalpina = France, Gallia Cisalpina = North-Italy,
Illyricum(일리리쿰)→ Dalmacija(달마치야)의 지역이 공략하기 쉽지
않았던 것은 외형적으로 60여개의 소국 Civtates로 나눠져 있었지만 공동체의
종교의식으로 하나의 Druds(드루이교)를 신봉하며, 제의를 함께 했던 곳
이라는데 있었고, 하나의 조상들을 두었던 호전적인 족속 들이 정치적으로는
분열되었으나 충분한 군사적 잠재력을 보이고 있던 이유에서도
찾을 수 있다. 더구나 Gallia Transalpina 지역은 Old Celt People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족속들이 호전적으로 대응하던 지역이기도 했다.
또한 기원전 390 년의 참화를 Roma People 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던 점도
작동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에 의해 "한니발"으로 부터도
당하지 않았던 "굴욕"을 당하기도 했지 않은가 !! 아무튼 "카이사르"는 절망적
이었던 이러한 지역에 공세를 펼쳐 주축 세력을 라인 강 너머로 몰아내는데 성공
하였고, 곧이어 벨가이인(= 벨기카)과 베네티인(France 서쪽 지역에 살던 족속)
을 정복하였다. 또한 도주하는 Celt People 들을 추격하여 기원전 55년에는
"United Kingdom Channel"을 건너 Britannia까지 공략하였다. 드디어 Roma People의
영향력이 세계의 서쪽 끝에 이른 것이며, 이렇게 해서 오늘날 United Kingdom
역사에서 첫 부분을 장식한 Roman → Britannia 침공이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카이사르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되었고, 원로원과 Pompeius & Crassus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삼두 체체의 이해 관계를 굳건히 하고, 원로원은
공동으로 견제한다는 방침을 결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반동으로 똘똘 뭉친
원로원이 원하던 것은 아니었기에 강력한 대응을 취하게 되었는데 가장 먼저 Pompeius를
제거하려던 중 The First Triumvirate(삼두 정치)가 깨지는 사태가 발생 했다. 그간에
남편과 부친을 결속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율리아"가 난산(難産)을 겪다 사망했고,
이러한 순간에도 훗날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된 Octavia(옥타비아) 까지 폼페이우스에게 주며,
끝까지 삼두 정치체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카이사르의 정략적 "혼인동맹"은 그의 거부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마침내 위태롭기만 했던 두 인물들 간의 동맹은 이것으로 박살
난 것이었다. 더구나 "크라수스"가 기원전 53년 카레(터키 남동부 하란) 전투에서 Parthia의
기마 궁수병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군기마저 빼앗기는 치욕스런 패배를 당하며, 급반전이
이뤄졌고, Publius Clodius Pulcher가 살해되면서 Roman Republic의 정치적 혼란은 가중되었으며,
그후 기원전 52년 원로원은 다목적 포석으로 먼저 제거하려던 Pompeius를
단독 집정관에 앉혀 "카이사르" 를 견제하면서 배제시키겠다는 의도를 드러내었다.
이것은 술라의 "종신 집정관" 처럼 "단독 집정관" 도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로마의 전통적인 공화정" 정치체제가 무너졌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반면
카이사르는 Roman Republic 공화정에서 마지막으로 Gallia 최후의 무장 봉기이었던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을 Vercingetorix(베르킨토릭스)를 진압한 것(기원전 52→
Cote d`Or→코트 도르) / Alise-Ste Reine→알리스 생레느)을 끝으로 그의 임무 또한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이로써 Roman의 영토는 Rhine River → United Kingdom of Channel
까지 확장되었으며, 그 지배력은 확고히 설정되었다. 따라서 카이사르의 개선은 Pontus를
정복한 "술라", Spain 정복시기의 Pompeius의 성과 보다 무게감에 있어서 앞섰던 셈이다. 그러나
법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군대를 거느린 채 개선 하면 안 되었다. Pro-Consul(속주 총독)
사임과 함께 군사지위 권을 반납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원전 49년 Gallia & Roman의
경계선이기도 한 Rubicon(피스키아텔로)까지 진군한 카이사르는 이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이러한
시점에 Urbs Roma에서는 "그라쿠스"를 죽음으로 몰았던 비상 결의가 발동되어 Gaius Julius-
Caesar는 한마디로 국가의 공적이 되어 있었다. → Senatus Consultum Ultimum 따라서 강을 건널
것인지 혹은 군대를 해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으며, 지휘관으로서 로마 군단의 선두에 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의 목소리와 적들의 불의가 우리를 부르는 곳으로 떠나자 !! 주사위는 던져 졌다 !! "



결국 그는 군대를 거느리고 Rubicon River을 건넜고, 공화정 몰락의 시점에
다가선 것이다. 8년 동안 오지에서 한몸 처럼 전투 경험을 함게 쌓으며, 생사고락
(生死苦樂)을 같이나누었던 당대 최강의 진용을 자랑하던 Gaius Julius Caesar &
Roman Legion는 거침없이 Urbs Roma로 쳐들어 갔다. 이때 원로원 의원들과 Pompeius는
"술라" 와 인연이 있던 장소 인 "브룬디시움"으로 가서 Adriatic Sea 를 건넌 후 도주하였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Adriatic Sea가 그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음을 알고, Pompeius의 권력
기반이기도 한 Spain을 향했다. 자유도시 Marseille(마살리아)는 진격하여 도중 안정 시켰으며,
"피레네 산맥"을 넘어 Pompeius의 수석 부관들이 "대리 통치"하고 있던 "로마군단"을 번개불에
콩... 구워 먹듯이 진압하고,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것은 최후의 일전 만이 남겨져 있었다.
Greece Thessalia의 "파르살루스" 평원 전투의 패전 이 후 집정관 직
(기원전 48)에 오른 카이사르는 이제 본격적으로 Greece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Pompeius는 야반도주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Egypt의 지배자는
카이사르가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카이사르의 이집트
원정은 그저 Pompeius의 죽음을 확인하는 요식 절차에 지나지 않았으며 여기서 세기
만남이 이뤄진다. 당시 Egypt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의해 통치되고, 21 살의
그의 이복 누이이며, 아내이자 공동 통치자이었던 Cleopatra라는 추방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Cleopatra가 중재 요청을 하면서 사태는 급진전 되었다. 카이사르는
그녀를 끌어들여 첩으로 삼고, 이에 이집트 왕이 분개하여 군사를 일으키자 전투가 벌어
졌으며, 기원전 47년 벌어진 전투에서 그는 "이집트 군"을 격파시키며 원정의 완성도를 높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Cleopatra 그리고 그녀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을 공동의 통치자로 카이사르는 지배자로서 지정하게
되었는데 주변에 수석 부관이었던 비운의 Marcus Antonius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 !! 이렇게 해서 로마 재정의 서쪽 날개 Spain에 이어 동쪽의 Egypt
마저 석권한 카이사르는 먼저 신경쓰이던 세습된 Pontus → Mithridates의 악재를 이번
기회에 털어버리고자 했다. 그래서 로마군단(7 군단)을 이끌고 Syria-Anatolia
북쪽으로 신속하게 이동하여 진군하였는데 하마터면 그것은 재앙으로 끝날뻔 했다.
그 이유는 기원전 47년 Anatolia 중부 지역(젤라 / 질라)에 도착한 후 막사를 세우고 있던
"로마 군단" 을 Pontus 군대가 기습 공격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를 "로마
군단" 은 군기와 노련함으로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카이사르가 원했던
Pompeius의 죽음과 성공적인 Egypt 원정 그리고 부수적인 Anatolia 지역의 안정을 기하고
Urbs Roma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 개선한다. 기원전 46년 그는 국가 비상 사태시...
임시로 임명하던 "독재관" 이라는 행정직의 임기를 6 개월에서 10년으로 연장시켜 차지했고,
2년 뒤 아예 종신 독재관직에 오르며 사실상 Urbs Roma의 왕의 자리에
우뚝서게 된다. 그는 무관 출신 "술라" 처럼 공포 정치를 앞세웠으나 공화정 시절
보다 훌륭한 진보적인 정치(속주안정을 위한 좋은 정부 구상)를 구현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병사를 포함한 군대에 물질적 보상을
함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안정시킨 뒤 Urbs Roma의 시민권을 확대하여 "전-로마
영토"의 통합을 모색하였다(Gallia → 시민권부여) 이제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Urbs-
Roma는 급속도로 번영하였으며, 당시 Urbs Roma의 인구는 무려 10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원로원은 형식적인 국가의 기관으로 전락되었지만 그대로 명맥을
유지 시켰는데 의원수는 900명으로 증가되었으나 대다수는 카이사르가
임명하였기에 정치적 상징성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상 왕정을
이끈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존속시키면서 과거의 전통적 가치를 존중하였으나
결과적으로 기능만 마비 시키면 될줄 알았던 원로원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게 되었다. 기원전 44년 Gaius Julius Caesar의 마음 속에는 오직
Parthia 뿐 이었다. "크라수스"의 사망 이후 Urbs Roma에서는 복수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어 있기도 했으나 무엇보다도 재정 문제에 있어서 Syria는 결코 놓아
두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종신 독재관"으로 오른지 두 달도 되지 않았지만 그...
기간은 "왕정 정치"에 대한 두려움과 공화정의 과거의 영화를 간직하고 있던 자들에게
카이사르에 대한 분노와 우려를 키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Parthia
원정을 앞두고 연설을 위해 원로원을 찾은 카이사르에 대한 Terror가 이뤄졌다.
결국 이렇게 해서 그에게 권력을 안겨 중었던 Rubicon River의 주사위는
그에게 죽음을 안겨 주었고, Marcus Junius Brutus는 그의 선조가 Etruria People의
왕정을 몰아내고, Republic을 확립시켰던 사실을 지지하여 공화정을 지켜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미 !! 대세는 기울어져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공화정의
이상이 Urbs Roma의 영토을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팽창되어 있었던 점이 치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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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 Republic이 회복될 것으로 여겼던것 같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Gaius Julius Caesar 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던
그대로...군대가 남아 있었다. 따라서 Gaius Julius Caesar의 죽음은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Marcus Antonius에게 뜻하지 않은 권력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러나
절대 권력자 사후... 전반적으로 Urbs Roma의 정치 환경은 그 충격으로 인해
매우 혼난스러워졌다. 이를 틈타서 살인자 무리는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Greece로
도주하였던 것이다. 반면 Marcus Antonius는 어찌되었거나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카이사르의 기병 대장이었던 Marcus Aemilius Lepidus와 결탁되어진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인물이 끼어들었는데 그가 바로 카이사르의 양자가 된 "누이의 외손자" "Octavianus"이었다.
평민 집안에서 출생(기원전)의 Octavius가 귀족 가문과
연결된 것은 언급되었듯이...그이 어머니에 의해서이었다. 부친은
훗날 원로원 의원이 되었지만 부유했던 "상인 계층" 출신으로 보여진다.
4 살 때 사망하였는데 그의 모친이 Julius Gaesar의 누이인 "율리아의 딸"
이었고, Octavius가 애초부터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이와 같은 인연을 통해서이었다.
Augustus는 일찍이 Spain 원정을 떠났던 "카이사르 막사"에 합류
(기원전 46)되었고, 18세의 나이로 "카이사르"가 계획한 파르티아 원정에서
고위 지휘관에 임명되어 Illyricum(= 알바니아)에 배치되었을 당시 암살의소식이
전해(기원전 44)졌으며, Urbs Roma로 귀환하는 중 자신이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접한다. 따라서 암살범 (해방자들)에 대한 복수 의지가 불타올랐을 것으로 생각
되는데 원정을 준비하던 "아폴로니아"에서 돌아와 브룬디시움(브린디시)에서 후계자로 인정
받기에 이르렀다. 반면 당시 !! "권력의 맛" 을 보기 시작한 "안토니우스"에 대한 원로원
의원들의 반감은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Cicero(키케로)에 의해 Philipics(필리피크)
연설을 통해 현실 화 되었는데...Cicero(키케로)는 Octavius가 이용가치가 있는 인물로
얕잡아 보았다. 따라서 초기에는 Octavius 또한 "안토니우스"를 공격하는 모양새를
갖추지만 그는 휘하의 군단을 Urbs Roma로 진격시켜 첫 번째 집정관 자리에 도전하였다.
키케로" 처형을 시작으로 이듬해 삼두정은 Bologna(볼로냐) 회동을 하고
원로원 권한(기원전 43)을 완전히 배제 시킨 채 이른바...Antonius &
Lepidus와 함께 기원전 43년 무서운 추방을 실시하여 반역자들을 응징하며
Second-Triumvirate(삼두 정치)를 형성 했다.그러나 이번의 경우 앞서 Gaius Julius
Caesar의 삼두와 크게 달랐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죽어서 까지도 대중에게
영향력을 발휘한 "카이사르" 라는 강력한 Charisma를 등에 업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며,
이들의 위상은 균등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주목할 것은 Urbs Roma 시민들이
신격 화 하고 숭배 했던 Divi Filius(신의 아들)이라는 사실 보다 정통성을 갖춘 인물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실질적으로 사망한 "카이사르"에게 더욱 충직스러웠던 인물은
표면적으로는 Marcus Antonius로서 그는 "권력"이 정점에 이르자 복수에 나섰고,
기원전 42년 Macedonia 까지 출정하여 살인자 일당을 일망타진 하였고 "키케로의
죽음" 마저 그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그리고... 언론의 자유가 지나치면 어떤 대가를
치루는지 보여주는 의미에서 그의 "머리와 손"을 잘라 로마의 연단 앞에 전시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여기서 언급한 것은 단순하게 "키케로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인데 공화주의자 들의 학살의 전주곡으로서 이후로 "카이사르의 제단" 위에
수백명의 공화주의자 들의 목숨이 바쳐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찌되었거나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전쟁이 일단락 되었고, 얼마지나지 않아 기원전 40년 Second Triumvirate
(삼두 정치)는 기원전 43년에 맺은 협정을 갱신하여First Triumvirate처럼 영토를 나눠 가졌다.
대략 당시 !! 구도는 Marcus Antonius-Eastern, Marcus Aemilius
Lepidus-Africa, Gaius Octavianus-Western으로 세력 분할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시기는 기반이 취약 했던 "옥타비아누스" 가 정치적으로 성장한 기간이었다.
역사 속의 땅 따먹기 판도에서 만족한 자와 만족하지 않은 자의 싸움에서 대개 후자의
승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점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원칙인지 모르나 세명의
인물 중 가장 만족하지 못하고 있던 인물은 의외로 Octavianus로서 가장 커다란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듯싶다. 이러한 시점..."안토니우스"에 비해 뚜렸한
전공(실적)이 없었던 Gaius Octavianus 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시칠리아
섬을 함대" 의 근거 삼은채 해상 통로를 장악하고 있던 Magnus Pompeius의 아들...
Sextus Pompeius을 해상에서 격파하고, Italian Peninsula의 곡물 공급의 안전을 지킨 것으로
이러한 전공의 배경에는 "밀라이 앞 바다"에서 적을 물리치고...
해전(기원전 36)을 승리로 이끈...그의 참모이자 영원한 벗이었던
Marcus Vipsanius Agrippa가 있었다. 즉 !! 시민들이 목말라하던 위대한
전공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Lepidus가 걸떡 되고
"옥타비아누스"의 군단을 장악할 목적을 띠고 Africa로부터 건너 왔지만 오히려
회유(기원전 36) 와 설득에 넘어간 그의 군단은 몰락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Lepidus는 재빨리 납작 엎드려 정치체제에서 이탈되었으며, 기원전 13년
사망 전까지 삼두에서 제외 되어 Pontifex Maximus의 자리에 만족할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남은 두 사람의 경쟁은 좀 더 노골 화 되었다. 하지만 승부는
명확해 보였다. Octavianus는 동갑으로 절친한 벗이기도 했던 Marcus Vipsanius-
Agrippa와 같은 참모를 거느린 채 거침없이 성장하고 있었고,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소유지분에 만족 하면서... "옥타비아누스"가 서방에서 명성을 쌓는
동안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지휘관이라기 보다 Hellenism 세계의 군주인 것처럼
행동하였고, 가뜩이나 이집트로 가서 공개적으로 Cleopatra의 치마 폭에서 지내게 된다.
더구나 치명적이었던 것은 Parthia에게 패전한 것인데...반면에 Octavianus는
이러한 시기 Antonius에 대한 격하운동이 진행되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불법적인 일이었으나 "유서를 공개"하여 간신히 균형을 이루고
있던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되돌아 보건대... 결정적으로 Octavianus &
Antonius의 갈등이 표면화 된 것은 "종교적 가치관"이 달랐던 두 사람의 행보에
기인하고, "옥타비아와 이혼(기원전 32)" 이 성립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Antonius는 로마의 법이 인정하지 않았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면서 동방의 군주을 표방하였고, Hellenism Type의 호화로운 생활에 중독
되어 있던 상태이었다. 반면에 Octavianus는 대조적으로 서방의 자유수호자 Vindex Libertatis
(빈덱스 리베르타티스)처럼 신분이 이상적으로 격상되어진다. 또한 동방의 군주 제도에
대한 원로원의 반발로 자연스럽게 Octavianus의 지지 세력이 결집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고,
드디어 원로원의 주도 아래 전쟁이 선포되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실질적인 군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바로 !! 역사적인
Battle of Actium(기원전 31)을 말함이고, Antoniusms-Cleopatra-Octavianus의
운명적인 관계에서 승리자는 "옥타비우스"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Antoniusms-
Cleopatra는 전쟁의 전리품이 아니라 자살(칼과 독)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로써 Egypt
Ptolemaeos(프톨레마이오스)는 대가 끊기게 되었으며, 역사적으로 가슴아픈 현실로서
수 천 년에 이르는 Egypt 왕국의 역사가 절명했다는 사실이다. 이때가 Menes(메네스) 왕이
첫 번째 왕조를 연 이 후 왕국을 세운 이래로 3000년이 조금 넘긴 시점이었다. 영웅의
삶은 청년기에 만개하는 것 인지 모르나 Alexandros가 동방원정을 완성한 것과 같은 33살에
Octavianus는 권력의 최정점에 서며, Urbs Roma의 일인자가 되었다. 이 후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으로 부터 월계관과 방패 그리고 군대 지휘권을 포함하여 속주의 지배권(기원전 27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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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내전이 종결된 기원전 27 그는 사실 상의 황제이었으나 "왕정"을
극도로 싫어하는 시민들을 고려하여 원로원은 그에게 Princeps(프린켑스) 즉 !!
최고 시민이라는 공식 직함을 헌정하고 아울러 Augustus(아우구스투스)라는 뜻의
존엄한 자 라는 존칭을 바치게 된다. 이때의 제정을 Principatus(원수정)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이는 공화정의 전통을 존중하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
이었을 뿐이고, 사실적인 제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정식명칭 → Imperator Caesar-
Divi Filus Augustus Imperator의 뜻은 소유자(명령권, 행정권)라는 뜻의
Imperium(임페리움)은 정복의 임무를 완수한 사령관을 의미하는 호칭이 되었다.
설명하자면 Divi Filus는 "신의 아들" 이라는 뜻으로 Caesar → 새로 바뀐 그의 이름이기도 했다.
참고로 고대 고대국가에서 달력은 매우 중요 했다고 알려져 왔다.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달력"이 없으면 불가능 하였고, 더구나 중요한
제사는 물론이고 왕의 생일, 각료들의 회의 소집일 같은 것들은 또한 "달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달력은 천문학의 지식이 있어야만 했으므로 만들기도
어려웠지만 아무나 함부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Roman Empire의
경우 기존의 있던 것을 카이사르가 지역마다 다른 것을 통합시켜 확정(16 C 까지
지속된 정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렇게 창안된 달력을 "율리우스 력"이라고
하였으며, 7월을 뜻하는 July는 바로 그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그전 까지
"로마의 달력"은 1 년을 12 개월로 하고, 4 년에 한번씩 13 개월로 했는데 "율리우스 력"은
오늘날까지 1년을 12 개월로 하였고 365 일을 윤년마다 2월을
29일로 하는 방식으로 하였다. Octavianus는 7월의 이름이 되어 있는
양-아버지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8월의 이름으로 정해졌다. 8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August는 여기서 비롯되어진 말이다. 이들 부자 덕분에 7월에서
10월 까지의 이름들은 오늘날 모두 두달 씩 뒤로 밀려서 9월에서 12월
까지의 이름이 되었던 것이다. Italian Peninsula의 틀안에서 Urbs Roma가
머물던 시대에 어울리는 정치체제가 "공화정"이었다면 지중해 세계를 통일한 Urbs-
Roma에 맞춤 정치 체제는 바로 "Imperial(제정)" 이었고, 위대한 제국이 탄생된
것이다. 2000년 전 Roman Empire 자체가 온전히 그에 의해 공고하게 되어진
덕분에 후대 유럽이 하나의 지역... 하나의 문화 권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유럽 통합도 결과적으로는 먼 과거...
이미 !! 그 초석이 다져져 있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 Key Word ...Treaty of Lis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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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원과 Urbs Roma의 시민들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받은 Augustus
(아우구스투스)는 단지 "좋은 결정을 구현하는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Princeps
이기를 받아들이면서 외형적으로는 모든 "권력" 을 원로원에 넘겨주는듯 했으나
실상은 "카이사르" 가 1000명 까지 확대한 원로원의 구성을 줄이고 Tribunus, Consul,
Pro-Consul, Pontifex Maximus, Censor의 권력 까지도 자신에게 집중되도록
하면서 자신의 손안에 모든 정치적 결정권(임페리움)을 스스로 집중시켰다. 그리고
"학살과 복수" 시대의 종결을 선언하고 황제로서 많은 것을 용서하였지만 과거의 과두 정치
(Potentia Paucorum, 포텐티아 파우코룸)의 독재에 대항에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시민의 투쟁의 본질이 상실시킨 것 또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훗날 "로마 인"들은
예전에 자신들이 누리던 "자유"가 멀어져 있음을 체감하게 되었고, 그보다는 평화와 번영을
더 중요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Caesar Augustus는 해방자들에 의해 살해된
아버지의 장례식이 거행된 곳에서 경의를 표하는 일을 추진하였으며, 그곳에서 가까운
장소에 아버지(양-아버지)에게 바치는 신전을 건립했는데 Urbs Roma가 한 인간의 죽음에
이토록 신격화된 예찬을 바치는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지금
부터는... 삼두 정치 시대의 내전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시점이 되었던 것이다.
Tempio di Geasare(템피오 디 줄리오 체사게) 신전 앞에
"아우구스투스"는 Rostra ad Divi Iulii(로스트라 아드 디위 율리)
라는 연단을 만들었는데 훗날 그곳에서 그가 세운 Gens Julius-Claudius
왕조에 대한 추모 연설이 행해졌다. 그리고 기원전 29 / 08 월 18 일에 헌정된
이러한 신전의 대리석 기둥에 새겨진 조국의 아버지에게...라는 글귀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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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A Man`s World
# by | 2009/10/14 02:00 | History ...Package | 트랙백



